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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16화 (16/313)

[16]

어제는 일기를 작성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다. 피곤이 쌓인 걸까? 내가 잠에서 깨어나니 나보다 먼저 일어난 일행들이 분주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난 졸린 눈을 비비며 쑤셔오는 근육통에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내가 일찍 잠든 사이에 일행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해가 지자 한 명씩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고 진수가 나에게 알려왔다.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안심했다. 일행들도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좋은 변화다. 내가 지니고 있던 짐이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다.

우린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통조림과 비스킷 몇 조각이지만 저녁과 밤사이 오랜 공복은 그런 초라한 음식조차 소중하게 보였다. 일행은 적은 식사량 때문에 아쉬운 얼굴을 해 보이면서도 적지만 소중한 음식을 열심히 천천히 씹고 삼켰다.

채연이에게 통조림과 비스킷을 들려주고,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뻑뻑한 비스킷을 씹으면서 가방 안쪽을 보자 확연하게 줄어든 통조림 개수가 보였다. 모두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수량을 확인했다. 최대한 아껴먹는 상황임에도 통조림은 3일, 비스킷은 일주일이면 전부 먹을 개수였다.

일행이 늘어나자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가 확연하게 보였다. 괜히 생존자들을 데려왔나 하면서도 같이 밥을 먹는 게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는 채연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다. 내 행동은 좋은 선택이었다. 긍정적인 생각만 하자.

하지만 그것과 반대로 현실적인 상황에 놓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곧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도시로 향해야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미래, 꿈도 희망도 없이 계속 이런 삶은 반복해야 한다. 입안이 씁쓸해 비스킷을 씹다 말고, 물을 삼켜 넘겼다.

미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부족한 식량과 비교적 안전하지 못한 쉼터.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함을 알면서도 구체적인 계획은 짜지 못한다. 마치 안개 낀 길을 한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보자 얼굴이 누렇게 떠 있다.

채연이도 갈수록 체중이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체력은 한없이 줄어들고, 영양 상태도 서서히 나빠진다. 낮은 온도 때문에 면역력은 떨어지고, 평소엔 아무렇지 않을 병균이 질병을 가져온다. 최악의 시나리오만이 머리에 스친다. 이성적인 사고가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곧 멈춰야 함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일행들은 밥을 먹다 말고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순간 도란도란 떠들던 일행들은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여태 감춰 뒀던 우울함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오늘도 그놈들을 피해 숨어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이 좁고 좁은 쉼터가 우리들의 전부였다. 자유도 인격도 생존 앞에 너무나 초라하게 변해 버린다.

한동안 우울한 분위기가 지속하였다. 채연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햄스터처럼 비스킷을 갉아 먹으며 사방을 둘러본다. 난 그런 채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듯이 쉼터 근처에 수동 물 펌프가 있었다. 오늘은 해도 쨍쨍하고 평소보다 날씨가 따뜻하니 펌프에서 물을 퍼와 씻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씻자는 소리에 여자들 둘은 표정이 갑자기 환해진다. 진수도 괜히 엉겨 붙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는다. 나는 때가 꼬질꼬질한 채연이를 바라보며 세수하는 시늉을 해 보였고, 채연이는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환하게 웃는다.

추운 날씨라 목욕은 못 해도 머리와 얼굴 정도는 씻는 게 가능할 것이다. 나는 한쪽 구석에 있는 쉼터 화장실로 들어갔다. 당연히 물은 나오지 않았고, 변기를 열어 봤는데…….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한쪽에 반쯤 사용한 비누가 보였고, 큰 대야도 보였다.

물 펌프 앞은 너무나 탁 트인 공간이었다. 물을 떠와 이곳에서 해결해야 안전하다. 난 큰 대야를 챙기고, 화장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물을 떠오겠다고 말하자 강수련과 진수가 자기가 떠오겠다고 나섰다. 이혜인도 쪼르르 옆에 달려와 서는 게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처음에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내가 다녀오겠다고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옆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는 채연이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내가 밖을 다녀올 때마다 일행들이 유난히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자기들을 버리고 갈까 봐 걱정하는 것일까? 난 그들의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 흔쾌히 대야를 내밀었다.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잠시 밖을 살펴봤다. 오늘 날씨가 조금 흐린 게 신경 쓰이지만 일단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문을 열었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대야와 빈 물통들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이내 문이 닫혔고, 난 창문으로 물 펌프로 향하는 그들을 바라봤다.

씻는 게 그렇게 기쁜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들이 걱정되면서도 밝은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행들이 물 펌프 앞에 무사히 도착한 걸 확인하고 창문에서 눈을 뗀다. 그리고 품에 채연이를 안은 뒤 일기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기 덕분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실감이 난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꼭 몇 달이 흐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난 내가 그동안 써온 일기를 읽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채연이는 아직도 비스킷 하나를 다 먹지 못했는지 끊임없이 오물거린다. 그리고 내 무릎 위에 앉아 내가 보는 일기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심심해할까 봐 내 공책에 낙서하게 해 줬는데, 이내 그것도 질리는지 얌전히 앉아 있다.

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괴로움과 고민이 계속 나를 괴롭힌다. 아닌 척 연기 했지만, 상황은 나를 신체적, 심리적으로 부담스럽게 조여 왔다. 사실 많이 고통스럽다. 어쩔 수 없이 도시로 향해야 한다는 불안감. 그리고 언제 그놈들에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스트레스를 극한까지 몰고 간다.

적어도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겨울을 지낼 물품들을 모두 모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안전하다고 확신할 정도의 쓸 만한 쉘터를 만들어야 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나도 일행도 모두 지쳐간다.

(쓰다만 흔적이 남아 있다.)

* * *

일기를 보는데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난 깜짝 놀라 일기를 내려놓고 황급하게 창을 찾았다. 그리고 채연이를 바짝 엎드리게 하고 창을 손에 잡은 다음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그놈들인가? 누가 비명을 지른 거지? 하는 생각들이 온통 머리를 지배했다.

밖을 바라보자 얻어맞고 있는 진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건 두 여자였다. 난 최대한 침착하게 떨리는 시야를 부여잡고 진수를 때리는 그놈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움직임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군복이었다. 군인이다! 그 군인은 혼자였고, 오른쪽 다리가 피로 젖어 있었다. 왜 군인이 우리를 공격하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 군인은 계속해서 반항하는 진수를 개머리판으로 친다. 진수는 힘없이 쓰러졌지만, 용케 기절은 안 했는지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군인은 총을 진수에게 겨눴고 진수는 멈칫했다. 여자들은 연신 비명을 지르며 군인에게 달려들어 총을 뺏으려 했다. 이혜인이 울고 있었고, 강수련은 얼굴이 창백한 상태로 연신 이쪽을 바라봤다.

군인은 짜증이 어린 얼굴로 그 둘을 뿌리쳤고, 군화로 진수의 얼굴을 올려 찼다. 그리고 이혜인의 머리를 잡았다. 이혜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비명을 질렀고, 강수련은 어떻게든 그놈을 떼어놓으려 했다.

난 채연이를 봤다. 채연이는 비스킷을 손에 꼭 쥐고 겁먹은 얼굴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난 그런 채연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며 화장실을 가리켰다. 채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내가 엄한 얼굴을 해 보이자 결국 눈물을 터트리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자 진수는 완전히 제압이 된 건지 바닥에 고통스러운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여자들도 한 대씩 얻어맞았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군인은 정확하게 총을 이곳에 조준하고 있었다.

‘나와!’

나는 침을 삼켰다. 놈은 우리가 모두 몇 명인지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유인한다, 혹은 뒤를 덮친다. 라는 계획들이 전부 사라졌다. 나는 창을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챙겨온 탄창 없는 리볼버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그 군인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에게 총을 겨눴다.

그리고 다 알고 있다는 듯 총구를 내 머리에 겨누며 외쳤다.

‘창 버려!’

나는 천천히 창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오른쪽 다리는 피를 흘리고 있다. 탈영병인가? 근데 왜 우리에게 이러는 거지? 약탈? 날 따라온 건가? 많은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결국 생각이 도달한 끝은 참혹한 결과뿐이었다. 그 군인의 얼굴이 전에 죽였던 괴한의 얼굴과 오버랩 된다.

난 그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이물감은 뭘까? 저놈은 혹시 우리를 죽이는 걸 망설이고 있는 걸까? 가장 위협적인 무기인 총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려 둔다고 해도 격렬하게 저항하던 진수에게는 왜 쏘지 않은 거지?

군인은 나에게 총을 겨눈 상태로 천천히 다가왔다. 한걸음, 한걸음. 그놈과 나 사이는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군인의 얼굴은 상당히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망설임이냐? 두려움이냐? 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차가운 공기가 내 식은땀을 식힌다. 싸늘한 총구가 금방이라도 노크해 내 머리를 뚫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난 이상한 이물감을 지우지 못했다.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군인 뒤를 바라봤다. 강수련은 기절했는지 죽은 듯이 누워 있었고, 이혜인은 배를 부여잡은 상태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수는 낑낑거리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연신 기침을 내뱉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 눈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포기나 절망이 아니었다. 그 눈은 무언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제압되면 어찌 되는 거지? 이 미친 세상에서 이놈은 우리를 살려 둘까? 아니 만약 우리를 살려 둔다고 해도 최종적인 목적이 약탈이라면? 식량은 모두 빼앗기고, 우린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럼……. 채연이는? 그리고 일행들은?

우린 모두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식은땀이 코끝을 타고 흐르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무언가 간절하게 눈빛을 보내는 진수. 그리고 뒤에서 나를 기다리며 떨고 있을 채연이. 주머니에서 묵직한 리볼버의 무게가 느껴진다. 난, 난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야 한다. 오로지 내 직감으로 판단하는 그런 위험한 도박.

난 자세를 풀었다. 군인이 당황한 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치 당황한 기색을 지워 보려는 듯 윽박지르며 총구를 들이민다. 그리고 순간 난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 군인에게 겨눈다. 어설픈 조준 자세, 총알이 없는 빈 실린더. 삶을 대가로 한 지독한 심리전.

군인은 총이 자신에게 겨눠지자 당황하며 크게 움찔한다. 군인은 나에게 총알이 없다는 걸 모른다. 그렇다면 군인이 할 행동은 두 가지.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나를 쏴 버리던가, 아니면 쏘지 못하던가. 쏘게 된다면 난 죽는 것이고, 쏘지 못한다면 답은 한가지다.

저 뒤에서 힘겹게 몸을 반쯤 일으킨 진수가 고통을 이겨내고 처절한 고함을 내지른다.

‘아저씨! 그 새끼 총알 없어요!’

군인은 당황한다. 떨리는 눈이 나와 마주친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창을 잡았다. 그리고 놈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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