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난 현실에서도 쫓기고, 꿈속에서도 쫓기고 있었다. 악몽이 남긴 진한 여운을 가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창문 밖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살짝 보이는 여명이 곧 아침이 올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주위는 조용했고, 달리진 풍경은 없었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자 건물 근처의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숲속에 놀이터라도 만들어 둔 듯 미끄럼틀로 보이는 조잡한 기구와 놀이기구들이 즐비했다. 아기자기한 구조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창문에서 멀어졌다. 완전히 해가 뜨면 밖을 둘러봐야겠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은 강수련이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봤고, 이내 살짝 고개를 숙여 나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나도 마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괜한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채연이를 흔들어 깨웠다.
채연이는 군말 없이 일어나 나에게 안아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손을 뻗어 채연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채연이를 들고 등산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담아온 핫팩을 모두 바닥 한쪽에 쏟아내고 남은 식량과 물을 확인했다.
식량은 대부분 비스킷과 초콜릿이다. 그리고 물도 넉넉하지 못했다. 공용 화장실에 두고 온 백팩이 생각났다. 다양한 통조림이 들어 있고, 아무도 없던 편의점에서 구한 거라 물도 많았다. 그리고 강수련이 지니고 있던 캠핑용품도 생각났다.
겁이 났지만, 식량이 가득 담겨 있던 백팩을 두고 오기엔 너무 아쉬웠다. 오늘은 공용 화장실 근처까지 가 보고, 그놈들이 없으면 그것들을 챙겨 와야겠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놈들은 낮이면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길 빌어야겠다.
나는 가방에서 비스킷과 초콜릿을 한 뭉치씩 꺼내 강수련과 이제 일어나기 시작한 남매에게 적당하게 분배했다. 그리고 물도 적당량 주고,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게 했다. 채연이는 역시 통조림보단 과자가 좋은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나는 채연이가 가장 잘 먹던 과자를 찾아내서 그걸 내밀었다. 채연이는 옳다구나 하고 받아서 먹기 시작하는데 참 복스럽게도 먹는다. 채연이는 정신없이 반쯤 먹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아저씨는?’ 하고 물어보는 거 같은데, 괜히 아이의 마음이 불편할까 나도 한입 먹고 맛있게 씹었다.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밝게 웃어 보인다. 난 남은 내용물은 채연이와 사이좋게 한입씩 나눠 먹고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살며시 의자 위에 채연이를 내려놓았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짧다. 할 일을 해야 한다.
난 일행들에게 오늘 계획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일단 이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어디 있는지, 그리고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냈던 화장실에서 물품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채연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나에게 안겨 왔다.
난 이런 반응에 조금 놀라며 채연이의 눈물을 소매로 닦고 달래기 시작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용케 화장실이란 단어를 알아들었나 보다. 아이는 그곳에 대한 공포가 많이 남아있던 모양인데, 난 그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우는 채연이를 달랬다.
다른 일행도 공용 화장실로 간다는 건 부정적인 생각인지 표정이 어두웠지만 차마 나에게 반대는 하지 못하는 듯 서로 눈치만 살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자 갈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일행은 깜짝 놀랐고 나를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오해하기 전에 그들의 말을 끊었다. 산과 도시를 왕래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일행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혹시나 소리를 낼까 하는 걱정도 필요 없다.
다만 유일한 단점은 혼자라는 위험이지만, 무력으로 그놈들을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건 그놈들에게 들키지 않는 은밀함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진수는 자기도 같이 따라가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이혜인이 깜짝 놀라며 동생을 말렸다.
물론 나도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내가 길을 떠나면 이제 이 쉼터에 남는 유일한 남성은 이진수다. 어제 공용 화장실 상황을 생각하면, 이진수가 이곳에 남아서 일행들을 지켜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남고 싶었지만, 또 상황이 여의치 않다. 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혜인은 내 말에 안도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얄밉다.
난 몸이 최대한 가벼워야 한다는 생각에 가방을 챙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시 중간에 허기가 질까 봐 주머니에 초코바 두 개를 챙겼다. 그리고 조잡한 창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보다 조금 느슨해진 감은 있지만, 아직 날도 멀쩡하고 준수했다.
가져온 전기 테이프로 몇 번 더 감아 주고, 나는 문 앞에 섰다. 일행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채연이는 눈이 퉁퉁 부어올라 퉁명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꼭 정말 거기 가는 거 아니죠? 하고 묻는 것 같아 시선을 피해 버렸다.
강수련은 그런 채연이를 안아 주며 나에게 무사하게 다녀오라고 말했다. 난 그녀에게 채연이를 부탁한다고 대답했고, 이진수를 바라보며 항상 주변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체구에 이진수는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심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왔고, 일행에게 문을 잠그라 말한 뒤 문을 닫았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귀를 차갑게 강타했다. 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긴장감에 주먹을 꽉 쥐어 본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고, 일단 쉼터 근처를 한 바퀴 돌아봤다. 특별한 지형은 없었다. 그리고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입구를 바라봤고, 가장 앞에 보이던 구조물을 향해 걸어갔다.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사람의 힘으로 물을 퍼내는 구형 물 펌프였다. TV에서 한 번 본 기억이 있는데, 이게 왜 이곳에 있나 하는 의문에 주위를 둘러봤고, 거기서 발견한 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그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린이 세족장’
그 표지판을 보고 다시 물 펌프 주변을 보자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발이 조금 들어갈 법한 움푹 파인 공간과 물 펌프는 이어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아이들이 발을 담그거나 물을 만지며 노는 놀이터인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 펌프 손잡이를 잡고 열심히 위아래로 흔들어봤다. 묵직한 감촉에 물이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신이 나서 땀이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자 이내 펌프 입구에서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물이 콸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기쁨의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지르지는 못하고 밝게 웃었다. 가장 걱정이었던 식수 문제를 운 좋게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물이면 오랫동안 씻지 못했던 채연이와 일행 그리고 내가 충분히 씻고도 남을 물이었다. 식수와 위생 문제가 단번에 해결됨을 느끼자 나는 쌓여있던 피로가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혹시나 펌프가 망가질까 봐 조심스레 손잡이를 놓고, 쪼르르 흐르기 시작하는 물에 세수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오랜만에 작은 행복이 느껴졌다. 채연이와 일행도 이곳으로 데려와 씻길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빨리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소매로 얼굴에 묻는 물을 닦으며 한쪽에 내려놓았던 창을 잡았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으로 달려올 때는 그렇게 무섭던 길이 해가 뜨자마자 평화롭고, 고요한 산책길로 변했다. 마치 저 도시와는 다른 공간처럼 삭막한 분위기도 악몽 같은 불안감도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공용 화장실로 가는 길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표지판과 언뜻 기억나는 지형으로 대략 그 주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나 그놈들이 내는 특유의 소리가 들릴까 봐 귀를 기울여 봤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몸을 바짝 숙이고 기어가듯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공용 화장실 근처로 다가가 나무 뒤에 숨었다. 급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한참을 공용 화장실 근처를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역시나 화장실 입구에서 그놈들이 남긴 흔적이 보였다.
입구 바닥은 피로 된 발자국으로 가득했고, 이상하게 화장실 외벽에도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자세히 보니 화장실 밖의 벽 대부분에 피로 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우리를 찾고 있던 게 분명했다.
나는 뒤로 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근처에 그놈들이 보이지 않는 걸 위안 삼았다. 그리고 침을 삼키고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돌멩이를 잡았다. 나는 돌멩이를 잡고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 입구를 향해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운 좋게 부서진 유리문에 맞았는지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음을 냈다. 나는 이렇게 소리가 크게 울릴지 몰라서 숨을 크게 삼키고 다시 바짝 엎드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놈들이 건물에서 나오거나 이곳으로 몰려드는 일은 없었다.
* * *
혹시 몰라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공용 화장실을 지켜봤다. 체감상 10분 정도가 더 흘렀고, 그놈들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난 이제야 그놈들이 이곳에 없음을 확신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숙인 상태로 공용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화장실 외벽은 더욱더 끔찍했다. 몇 마리나 이곳으로 향했는지 모를 만큼 수없이 많은 피 발자국. 그리고 화장실 외벽에 수없이 찍혀 있는 손자국은 그놈들의 집착과 살의를 보여 주는 듯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자세를 숙여 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화장실 안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화장실 내부는 조용했다. 자세를 바꿔 다른 쪽에도 그놈이 없음을 확인하고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피로 난장판이 된 바닥과 벽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썩어가는 내장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자연스럽게 구역질이 나왔다. 하지만 난 애써 입을 막으며 주위 환경을 살폈다.
내가 죽였던 괴한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여기저기 널려있는 내장과 살점 그리고 조각난 뼈들로 그놈들이 괴한을 포식했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여자가 세워 뒀던 텐트는 그놈들에게 짓밟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우리가 처음 가져 왔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들었고, 내부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모든 물건은 파손 없이 온전했다. 살짝 피가 묻어 있었지만, 생수를 꺼내 대충 씻어 냈다. 갈색으로 옅게 남은 핏자국이 괜히 찝찝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더 둘러봤다. 그러다 세면대 바닥 밑에서 괴한이 들고 있던 리볼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난 허겁지겁 그쪽으로 뛰어가 리볼버를 주웠다. 피가 잔뜩 엉겨 섬뜩한 비주얼을 자랑했지만, 난 생수를 꺼내 대충 씻어 내고 그것을 손에 들었다.
어설픈 손동작으로 리볼버 실린더를 열었다. 총알이 남았나 확인하기 위해 리볼버를 들고 탈탈 털자 탄피들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모두 발사되고 남은 탄피들이었다. 아마 괴한이 쐈던 총알이 마지막 실탄이었나 보다. 난 세면대 위에 탄피들을 올려놓고, 빈 리볼버를 챙겼다.
피가 묻은 담요와 망가진 텐트를 제외하고, 모든 걸 가방에 넣었다. 빨리 이 역겨운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문밖을 나섰다. 마치 지옥의 이면을 잠시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역겹고 무섭고, 소름 끼쳤다.
나는 은밀한 걸음으로 내가 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쉼터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자극적인 현장을 목격해서 그런지 걷는 내내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상념을 깨고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건 단 한 발의 총성이었다.
탕.
지금은 아무 일도 아닌 듯 무덤덤하게 일기를 쓰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제 화장실에서 괴한이 쏜 총의 여파였을까, 격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침을 삼키고 잠시 기다렸다. 처음 총성이 울리고 잠시 조용하나 싶더니 이내 연속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콩을 볶든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나는 등산로 옆쪽으로 기어가 길을 벗어났다.
그리고 구르듯 숲으로 들어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소리에 집중했다. 아까는 놀라서 몰랐지만, 총성이 근처에서 울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귀를 기울여 들려오는 총소리에 집중했다.
급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자 총소리가 산 아래, 도시 쪽에서 울린다는 걸 인지했다. 난 최대한 자세를 숙여 도시가 보이는 방향으로 천천히 산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낮은 산이라 일정 지대로 올라가면 도시가 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걸음을 옮기는 내내 총소리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놈들이 이 소리를 듣고 얼마나 모여들까? 그날 보았던 빛의 파도가 악몽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발 이 여파가 산까지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급한 걸음으로 지대를 오르자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급한 경사는 아니었기에 나는 조심조심 그 바위를 타고 올라가 그 위로 안착했다. 그러자 도시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긴장감 때문에 지독한 갈증이 느껴진다. 나는 시선을 고정한 상태에서 물을 꺼내 급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반쯤 정신없이 마시고 챙겨 온 초코바도 입에 물었다. 달콤함이 혀끝에 퍼지자 긴장감에 잔뜩 날카로워진 신경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난 숨을 고르며 도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총성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한동안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원인을 찾던 중에 나는 산과 꽤 가까운 거리에서 총성의 원인을 발견했다. 난 눈을 가늘게 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시야에 들어오는 군인들은 한 개 분대 규모였다. 육공 트럭으로 보이는 군용 차량 근처에서 총을 연신 쏘고 있는 군인들이 보인다. 이미 몇 명은 당했는지 시체에 대가리를 박고 포식에 집중하는 그놈들도 보였다.
총소리 때문인지 도시에 있는 그놈들이 다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골목은 그놈들로 빼곡했고, 건물에서 뛰어 내리는 놈들도 있었다. 군인들은 총으로 그놈들 다수를 제압했지만, 점점 많아지는 숫자에 하나둘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총을 맞으면서도 군인들에게 달려가 목을 물어뜯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허우적거리는 몸짓을 보아하니, 아마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다. 군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명중률이 떨어지는 사격과 우왕좌왕하는 행동들이 한눈에 보였다.
이제야 후퇴할 생각이 들었는지 육공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기도 전에 유리창에 몸을 날리는 그놈들로 인해 육공 트럭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곧 운전석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육공 트럭은 속도를 서서히 잃더니 멈춰 섰다.
그놈들에게는 잘 차려진 만찬이었다. 우왕좌왕하는 군인들은 하나둘 놈들에게 잡혀 썰린 고기가 된다.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군인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쯤 시선을 돌리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예정된 결과지만 난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야겠다. 채연이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 난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채연이가 있는 쉼터로 걸음을 옮겼다. 등산로를 멍하니 걸으며 생각했다. 군인들을 발견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지옥이 이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그동안 가지지 않았던 기대였기에 실망도 너무나 컸다.
구조대? 아니면 소탕 작전이라도 시작한 걸까? 그런데 겨우 분대 규모? 지휘 체계는? 그리고 이곳에는 무슨 일로? 총은 갑자기 왜 쏜 걸까? 그놈들이 소리를 들으면 몰려든다는 걸 모르는 걸까?
많은 의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명쾌한 대답을 해 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난 가슴이 턱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도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온 것이고, 이제는 얼마나 되는 이들이 살아 있는지. 또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나는 살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쉼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멍하게 쉼터 앞에 다가가 노크하고, 작은 소리로 문을 열어 달라 말했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더니 강수련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잔뜩 경계한 얼굴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밝게 변했다. 그리고 빨리 들어오라는 듯 문을 열었고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쉼터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은 훈훈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난 그제야 긴장감이 풀려 묵혀 뒀던 숨을 훅 내뱉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내 다리에 안긴 채연이를 끌어안고 앉았다. 일행들은 좋지 못한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군인들이 죽는 걸 목격했다. 나도 보는 순간 참담함을 느꼈는데 일행들은 다를까. 내가 말하는 걸 꺼리는 게 보였는지 일행들은 더는 묻지 않았다.
조금 이른 시간에 쉼터에 들어온지라 난 마음 놓고 쉬었다. 진수는 연신 밖을 살피고 있었고, 이혜인과 강수련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물품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안전한 장소에 있어서 그런지 그들 눈에는 희망이라는 빛이 조금씩 서려 있었다.
난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한쪽 구석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채연이는 정리만 하는 강수련이 재미없는지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난 채연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일기를 작성한다. 채연이는 내가 뭐라고 쓰는 것인지 아는 걸까? 멀뚱멀뚱 내가 쓰는 일기장을 바라본다.
생각이 많아진다.
[채연이가 그린 낙서가 있다. 분홍색에 별 모양 캐릭터가 내 글자들을 삼키는 낙서들을 그려 놨다. 내가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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