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9화 (9/313)

[9]

그놈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다 일어났다. 그 꿈에서 나는 안개 낀 거리를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내가 목적지가 없는 길을 뛰어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자리에 멈춰 서서 난 그놈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잠시 뒤 빛의 파도가 나를 덮쳤고, 나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꿈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몰려오는 불안감에 천천히 일어나 직원 휴게실을 나왔고, 건물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둠 때문에 윤곽 정도만 보이는 컴컴한 건물 내부를 조심스럽게 돌아다니며,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들여다보며 밖의 상황을 살폈다.

가로등 하나 켜지지 않은 자전거 길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다. 빛 한 점 없는 이곳은 마치 우주 공간 속에 혼자 표류한 듯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귀를 기울여 보고 한참 어둠 속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난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밤새 훌쩍이던 여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이 들었나 싶어 그 방을 힐끗 쳐다보니 여자는 울다 잠이 들었는지 한구석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그냥 채연이 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내일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가는 길에 편의점이나 슈퍼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튼튼한 가방도 하나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념에 난 한숨을 푹 내쉬고 내 담요를 채연이에게 덮어 줬다.

아이는 추운 듯 담요를 끌어안으며 작은 잠꼬대를 한다. 잠을 자보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결국, 새벽이 지나가고 아침이 오기 시작하는지 창문에 걸린 여명이 보인다. 이제 곧 해가 뜨려는 모양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추위에 굳은 몸을 풀고 심호흡을 했다. 빛이 방안을 비추자 나는 채연이에게 다가가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가방을 뒤지며 식량과 물의 수량을 확인하고, 채연이가 좋아하던 비스킷과 물 한 통을 꺼냈다. 아이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군소리 없이 일어나 눈을 비볐다.

시간을 지체하긴 싫었다. 아이를 일어나자마자 걷게 하기는 싫었지만, 일단 나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채연이 입에 비스킷을 물려 주었다. 그리고 물을 몇 모금 마시게 했고, 나도 빠른 식사를 시작했다. 퍽퍽한 비스킷을 입에 물고 씹자 은은한 단맛과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나는 빠르게 씹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채연이 손에 물병을 쥐여 주고, 반대쪽 방 밖을 나서려 문을 열었다. 오늘은 꼭 산에 도착을 해야 했다.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이 체력을 계속 갉아먹었다. 난 앞으로 겪을 일이 두려워 한숨을 푹 내쉬고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한쪽 구석에 누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황급히 창을 들고 겨눴고, 채연이는 깜짝 놀라 내 다리를 붙잡고 뒤로 숨었다. 그러자 그 쪼그려 앉아 있던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였다. 밤새 울었는지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 한구석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포기 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눈 한가득 애처로움과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제발 데려가 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그리고 그녀는 또 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너무나 깊은 공포를 읽었다. 그녀도 나처럼 지옥도를 경험했을 것이다. 한순간 무너져 내린 일상에 차마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도망쳐야 했을 것이고, 같이 온 일행들이 찢겨 죽는 걸 목격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나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애처럼 떼를 쓰듯 나에게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게 아닐까. 그저 무서워서, 너무나 살고 싶어서.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존본능이었다. 난 그녀를 이해하고 동정했다. 하지만 그 감정과 현실을 너무나 다른 영역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빌고 있었지만, 내가 자신을 데려갈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포라는 감정 속에 체념이라는 혹을 달고, 절망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그 눈을 마주 볼 수 없어서 조금은 매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답을 말했다.

‘당신을 보호할 힘도 의무도 없어. 난 이 아이를 지켜야 해.’

그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당연한 대답, 하지만 너무나 듣기 싫었던 대답. 그녀는 그렇게 한쪽 벽에 몸을 맡기며 한참을 오열했다. 난 욱하고 올라오는 자기 혐오에 손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빨리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내 손에 항상 잡혀 있던 아이의 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자 채연이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비스킷을 오물오물하며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순수한 눈동자와 얼굴로 그 여자의 옷을 잡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아이의 행동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같이 가요.’

아이는 착한 아이였다. 누군가가 배가 고프다 손을 내밀면 자기가 먹던 음식을 줘야 한다고 배웠고, 누군가가 곤경에 처하면 당연히 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난 그 아이 앞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채연아, 채연아 그게 아니야. 그런 게 절대로 아니야. 난 터져 나오는 말을 일단 삼켰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난 아이에게 현실을 설명해야 했다. 이 비겁한 생각을 저 어린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입안이 씁쓸해 숨을 삼킬 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아이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아이는 나의 가장 큰 약점이고, 동시에 삶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었다. 그렇기에 현실과 이상에서 난 끊임없이 고민하고 충돌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 천천히 창날을 내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의 눈은 어느 그 무엇보다 깨끗하고 맑았다. 그 눈동자가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그리고 옛 회상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외면하고 바라봤던 아기와 아기 엄마의 모습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앞에 떨어지는 고깃덩어리. 그 고깃덩어리가 나에게 말했다. ‘왜 날 구해 주지 않았어요?’ 숨이 턱 막히고 손발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내가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 창문을 통해 지켜만 봤다는 그 방관. 비겁한 방관이 내 정신을 짓눌렀다.

그리고 순간 느껴지는 따뜻함에 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 내 오른손을 누군가 꼭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손의 주인은 아이였다. 아이는 그 여자의 옷을 움켜잡고 끌고 오듯이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꼭 부여잡은 것이다.

난 하 하고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난 저 아이의 손을 잡을까 말까 하며 수십 번을 고민하고 고통스럽게 고뇌했는데, 아이는 너무나 쉽게 내 손을 잡았다. 난 마치 모든 걸 잊으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채연이의 옷 단추를 꼼꼼하게 채우고 다시 가방을 고쳐 맸다.

그리고 난 그녀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따라와도 좋아.’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아이를 연달아 바라봤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입과 손으로 다시 한 번 ‘네?’ 하고 되묻길래 다시 대답해 주는 대신 난 채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 아이에게 고마워하라고 당부했다.

그녀가 아이를 우습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으면 하는 의도였다. 그 여자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기어오듯 이곳으로 오더니 아이 손을 잡고 울었다. 그리고 입으로 끊임없이 고맙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채연이는 헤 하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난 순간 아이가 얄미워서 머리를 손가락으로 콩 하고 때렸다. 그래도 아이는 좋다고 웃는다. 그 미소는 우월감도 아니고 뿌듯함도 아닌 그저 순수한 미소였다. 어른이 아닌 아이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깨끗한 순백의 미소.

난 이 감동을 깨기 싫었지만, 이내 작은 소리로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빨리 걷기는 가능할까? 라는 걱정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물 반병과 내가 먹던 비스킷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물과 비스킷을 받더니 황급하게 입으로 가져가 씹고 삼켰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고, 그녀는 입가에 비스킷을 잔뜩 묻힌 상태로 나한테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밖으로 향했다.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그녀와 채연이에게 자세를 낮추라고 말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그때와 같이 조용하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멀리서 다리 위에서 비틀비틀 움직이는 그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 거리지만 조심해서 나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녀와 채연이에게 조용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연신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고, 채연이는 여전히 멀뚱멀뚱 나와 길을 번갈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놈들을 경계하며 모든 신경을 주위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두 시간 좀 넘게 걸었을까. 저 멀리 보이던 산이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적당한 위치를 찾아 드디어 도림천을 벗어났고, 주위를 둘러보며 산 입구로 천천히 향했다.

아스팔트 길은 어느새 흙길로 바뀌어 있었고, 멀리서 보이던 그놈들의 밀집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산을 선택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 최대한 도시와 멀어져야 한다. 난 그놈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등산로 아닌 길을 채연이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올랐다.

뒤따라오는 그녀도 등산을 평소 즐기는 사람답게 뒤처지지 않고 따라왔다. 길이 거칠고 경사가 가파르다. 채연이는 위험하게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지만, 편의를 봐 줄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추운 날씨에 입김을 뱉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쉬기를 반복하자, 완만한 경사가 나오더니 평평한 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걸음을 옮기자 산행을 위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는지 운동 기구들과 작은 공중 화장실이 보였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마치 나만이 존재하는 무인도 같았다.

일행들 모두가 지쳐 있었다. 바람을 막고 몸을 숨길 건물이 하필 화장실이라는 게 좀 거부감이 들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밤을 지내자며 말했고, 그녀와 아이는 대답 없이 나만을 바라봤다.

그녀는 작은 텐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버너와 캠핑용 냄비들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텐트를 쳤다. 그리고 문은 잠그고, 혹시 몰라 청소도구로 손잡이를 막고 물을 묻힌 종이로 유리를 가렸다.

그녀가 따뜻한 음식을 해 먹자고 권유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냄새가 풍겨서는 좋을 게 없음을 그녀에게 당부했다. 그래도 냄새가 나지 않는 물을 끓여서 먹고, 통조림 하나씩을 까먹었다. 그리고 이제는 앉아 조금 이른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가 내 일기장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몰래 보면 버리고 갈 거라고 하니 금세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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