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느새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명이 작은 창문에 걸리는 걸 확인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사이 겨우 잠이 들었다가 악몽 때문에 깨기를 반복했다. 긴장과 두려움이 온몸을 강하게 짓눌러 천천히 내 몸을 잠식시킨다. 시선은 계속 문으로 향하고,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도 흠칫 놀라게 된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채연이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속 한구석이 안심이 되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창고 문을 열어 편의점 내부를 천천히 둘러 봤었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아 편의점 내부는 조금 어두웠다. 하지만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분주하게 편의점 내부를 돌아다녔다. 식량과 물을 가방에 가득 채우고, 혹시 모를 생필품들도 가방에 넣었다. 가방이 겨우 닫힐 정도로 챙기고 나니 몹시 무거웠지만, 그와 반대로 마음은 가벼웠다.
편의점 한편에 죽어 있는 그놈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보기 싫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어제 일어났던 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난 눈을 뜨고, 긴 한숨을 훅 내뱉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잠시 앉아 고민을 하다가 시체 옆에 부서진 마대자루를 발견했다. 그 부서진 마대자루를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라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에는 어제 부숴 먹은 대걸레 말고도 다른 대걸레가 존재했다. 난 그 대걸레는 잡고 어제처럼 마대 자루를 밟아 부수고, 나무 부분만 챙겼다. 그리고 편의점 한쪽에 비치된 식칼 포장지를 뜯어 식칼을 꺼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이 어두움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난다.
그리고 두꺼운 검은색 전기 테이프를 찾아서 식칼과 마대자루를 연결해 여러 겹 묶었다. 그러자 조잡하지만, 충분히 위험이 되는 창 한 자루가 만들어졌다. 어제 그놈과 마주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성인 남성보다 뛰어난 완력. 그리고 겁이 없는 맹목적인 돌진. 만약에 다시 싸우게 된다면 긴 리치의 무기가 유리했다.
난 더는 방구석 시청자가 아니었다. 죽음을 직면했을 때 난 무력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나를 지키고, 그 아이도 지켜야 한다. 테이프를 묶으면서 바라본 채연이는 마치 천사처럼 잠들어 있었다. 난 아이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 한 번 다짐했다.
해가 완전히 뜨자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는 피곤이 얼굴에 가득해 보였지만 기특하게도 자기 스스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눈가를 닦고 다시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편의점 내부에서 다 챙기지 못한 식품을 꺼내 채연이에게 먹이고, 나도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난 아이의 손을 잡고 문 근처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밖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조용했다. 마치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도시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난 추위에 짙은 입김을 내뱉으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채연이는 당연하다는 듯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반대쪽 손으로는 마대 자루로 만든 창을 꽉 쥐며 편의점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덮치자 나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채연이가 입고 있던 점퍼에 모자를 꽉 조여 준다. 체온 관리도 생각해야 했다. 날씨마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어제 밤새 어디로 향해야 할지 고민했다. 구조대가 올 거라는 기대는 들지도 않았고, 결국 안전을 위해 은신처를 만들어 숨기로 했다. 사람이 없는 근린공원으로 다시 가 보면 어떨까 하다가 괜한 찝찝함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인적이 드문 산이 좋겠다는 생각은 바꾸지 않았다.
신림동 주위에는 크고 작은 산이 존재했다. 어떠한 산이 좋을까에 대해 고민했고, 가장 처음으로 관악산을 생각해 봤지만, 관악산은 지금 위치에서 거리도 멀었고, 번화가를 지나쳐야 한다. 번화가에 주거지역도 모여 있는 지역이라 사람들을 사냥하러 온 그놈들이 많이 포진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결국, 관악산을 머리에서 지우고, 두 번째로 생각한 산은 바로 청룡산이다. 위치도 상당히 근접하여 안성맞춤이었다. 대로를 따라 도림천으로 진입해 도림천 자전거 길을 따라 쭉 걷다가 도로를 넘어 청룡산으로 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천천히 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 대로가 보였다. 차가 빼곡하게 서 있고, 마른 핏자국과 썩어가는 내장들이 차 이곳저곳에 걸려 있다.
구역질이 나오지만 애써 입을 꾹 다물고, 채연이를 품속에 안아 눈을 가렸다. 그리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놈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잠시 몸을 웅크려 반대로 돌아가고, 또 그놈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잠시 기다려 다른 길을 찾았다.
그렇게 뱅뱅 돌기를 반복했고, 도림천까지 800m도 안 되는 직선거리를 반나절이나 걸렸다. 채연이가 지친 게 눈에 보였지만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는 도림천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져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채연이를 재촉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편의점을 나설 때는 우리 발소리를 듣고, 그놈들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해가 뜨면 그놈들의 인지 범위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한 번은 커버 길에서 그놈을 발견하지 못하고 발소리를 내 버렸다. 커버 길을 지나 근처에 있는 그놈을 발견하고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밤에는 그렇게 민감하던 녀석이 내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난 숨을 죽이고 서둘러 그 근처를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미친 광인처럼 붉게 빛나던 눈도 흐리멍덩하게 변했다. 빛이 있으면 저렇게 변하나? 태양 빛만 해당이 되는 걸까? 많은 의문이 들었고, 그놈이 소리를 어디까지 인지하나 실험해 볼까 하다가 이내 바보 같은 행동이란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완전히 녹초가 돼 버릴 때쯤 도림천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수위가 상당히 줄어든 도림천은 조금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혹시 주위를 돌아다니는 그놈들이 없을까 하고 둘러 봤지만, 저 멀리 도림천 다리 쪽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 도로인 만큼 버려진 자전거가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가 있으면 편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혹시 그놈들이 옆쪽 도로에서 우리를 발견할지도 모르니 또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길에서 내려와 자전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 길을 걷기 시작하자 결국 지쳐 버린 채연이를 품속에 안았다.
시가지를 빠져나오면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는지 도림천에 접어들 때는 해가 황혼에 걸리더니, 도림천 중간을 지나갈 때쯤 빠르게 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놈들이 있어 밤에 움직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나는 우리가 밤을 지낼만할 곳을 급하게 찾았다.
걸음을 바쁘게 재촉하자 저 멀리 큰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뛰듯이 그곳으로 향하자 평범한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읽어보니 이곳은 자전거 대여 센터였다. 해가 지기 시작했기에 따로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여기서 밤을 지새우기로 결정했다.
난 잠시 채연이를 내려놓고, 마대자루를 양손으로 꽉 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건물 쪽으로 접근했다. 채연이는 벌써 울먹이며 쪼르르 나를 따라왔고, 내가 뒤를 돌아보고 웃어주며 그곳에 있으라고 말하자 싫어하는 기색이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전거 대여 센터 문을 열었다.
환기가 안 된 듯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봤지만, 시체 썩은 내 같은 역겨운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야에는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거로 보아 장시간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안심이다. 나는 숨을 훅 내쉬며 채연이에게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채연이는 기특하게도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는지 빠른 걸음으로 쪼르르 달려와 내 손을 꽉 쥐었다. 난 채연이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아 잠갔다.
그리고 한쪽에 놓인 의자 위에 채연이를 올려두고, 책상에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순간 작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난 움찔거리며 마대자루 창을 잡았고,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방 하나가 있었는지 지는 해를 통해 생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그 방에서 나온 것은 한 여성이었다.
* * *
내가 그녀를 보자마자 했던 행동은 창날을 들이밀어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녀가 그놈들과 같은 괴물이든 평범한 인간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내 영역, 내 무리에 접근하는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난 착한 인간이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싸구려 식칼이지만 당장 눈앞에 닥쳐온 날붙이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적의 앞에 그녀는 당황한 듯 뒤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채연이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심히 내 다리 한쪽에 붙어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씩 물러나자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씻지 못한 듯 꾀죄죄한 얼굴과 머리, 그리고 무언가 잔뜩 묻어 있는 차림새. 그리고 꽤 큰 등산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 또 결정적으로 공포에 찌들어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녀가 종말을 피해 도망 온 생존자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무기로 보이는 물건도 없었기에 창을 조심히 내렸다. 하지만 경계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말한 뒤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채연이를 끌어안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직원 휴게실로 보이는 방 한편에 천천히 들어가자 밖보다는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느껴졌다.
여기 직원들은 출근을 안 했거나 오래전에 도망갔는지 휴게실 내부는 먼지로 가득했다. 나는 대충 근처에 놓인 휴지를 한 움큼 잡고 소파 위에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그곳에 채연이를 앉힌다. 아이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자 나는 머리를 쓰다듬고 가방에서 참치 통조림 하나를 꺼내 개봉했다.
그리고 채연이에게 내밀자 채연이는 헤 웃으며 통조림을 받아 들었다. 마지막 식사를 하고 반나절이 넘게 흐른 시간이다. 아이는 배가 고팠는지 참 맛있게도 통조림을 먹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날을 들고 들이밀었다.
‘그거…… 먹을 건가요?’
그곳엔 그녀가 서 있었다. 분명히 따라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뻔뻔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 눈에는 날카로운 창날이 보이지 않는지 시선은 온통 채연이가 먹고 있는 참치 통조림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간절한 눈빛으로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했다.
‘저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쾌함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이 통조림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생명줄이 될 식량이다. 앞으로 이 통조림 하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이 가치를 그녀도 아는지 굉장히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사람은 살기 위해서 간혹 뻔뻔해질 필요가 있기도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3일을 굶었어요. 제발요.’
나는 물러나지 않으면 헤치겠다는 의미로 창날을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채연이는 연신 그녀를 멀뚱멀뚱 보더니 그녀에게 자기가 먹던 참치 통조림을 내미는 게 아닌가.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채연이는 뭐가 문제냐는 듯 나를 헤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순수했고, 남을 위하는 착한 아이였다. 마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게 무슨 잘못이죠? 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걸 가르쳐 줘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다면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서로가 아끼고 나눠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
지옥으로 변한 세상에서 도덕은 방심을 부를 것이고, 윤리는 한순간에 사람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지독한 현실을 이 순수하고 어린아이에게 가르쳐 줘야 하는 걸까? 나는 눈을 꾹 감고, 작은 허탈감과 자기 혐오를 느꼈다.
나는 창날을 내렸고 숨을 한번 훅 내쉰 다음에 소파에 앉았다. 그것이 무언의 허락임을 알았는지 채연이는 그녀에게 참치 통조림을 들이밀었고,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주저앉았다. 그리고 엉엉 울며 허겁지겁 참치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입안이 씁쓸했다. 사람이기에 남을 도와야 한다. 하나 나와 채연이의 생존을 위해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고민이 계속해서 충돌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숨을 훅 내쉬고 있는데 채연이가 내 쪽으로 다가와 앉았고 이내 내 팔을 끌어안았다.
추워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위로하려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온전치 못한 정신임을 아는 나는 아이가 그런 세세한 배려를 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난 다시 가방에서 참치 통조림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눈물과 콧물을 먹는 건지 참치를 먹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심하게 오열하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한 죄책감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 엄마가 떠올랐다.
그녀는 참치를 모두 먹고, 그 안에 있는 기름까지 모두 핥아 먹었다. 그리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죄책감과 어색함에 그녀를 애써 외면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채연이는 피곤하기도 하고 해까지 지기 시작하자 연신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졸린 눈으로 내 팔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채연이를 소파 위에 눕히고 사무실 의자 한쪽에 놓인 담요를 가져와 먼지를 털어 아이 위에 덮어 줬다. 그리고 살며시 토닥여 주며 아이가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아이가 잠이 들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해가 완전히 지자 나는 가방에서 물 한 통을 꺼내며 한쪽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본 뒤 나를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알겠다는 듯 나를 따라왔다.
다른 방은 자전거 부품과 직원들을 위한 비품으로 가득한 창고였다. 난 그쪽 한구석 상자 위에 앉아 어제 마셔 반쯤 없어진 물 한 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감로수를 받듯 감동한 얼굴로 양손으로 물통을 받더니 입으로 황급하게 가져갔다.
꿀꺽꿀꺽 급하게 물을 마시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가 물을 모두 마시자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어디서 왔고 그쪽 상황은 어땠습니까?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큰 요소는 정보라고 생각했다. 어디가 위험하고 그놈들은 어쩐지, 다른 변수는 없는지. 최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나와 채연이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 동네에 사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저기 수원에 살고 있었는데, 주말을 맞이해서 친구들과 관악산을 오르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릴 무렵 이 사단이 터지고 만 모양이었다.
그 많은 사람이 집결한 지하철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걸 보면, 그녀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길 처음에는 5명이 탈출해서 여기까지 오는데 4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도시를 관통해 이곳으로 온 모양인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놈들을 피해 정신없이 혼자 도망치다가 해가 지기 시작하자 이곳에 온 모양인데, 아마 도착한 시간은 우리랑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나 보다. 난 여기까지만 듣고 눈을 감았다. 더는 그녀에게 용건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어디로 향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천천히 일어나 채연이에게 향했다. 뒤에서 그녀가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도 같이 데려가 주면 모든 일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나중에 돈도 주겠다는 말을 해왔다.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작은 동정을 느낀 건 분명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책임질 힘도 없었고, 의무도 없었다. 나는 구조대도 아니고, 히어로도 아니다. 당장 나와 채연이를 지키는 것에도 힘에 부치는데, 그녀까지 데리고 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리고 말없이 채연이 옆으로 다가와 어둠 속에 눈을 감는다. 그녀는 나를 따라 이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내 단호한 태도를 의식한 모양이었다. 죄책감과 자기 혐오에 난 잠이 들지 못했다.
밤이다. 채연이는 곤히 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손전등 켜 일기를 작성한다. 옆 창고에서 그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