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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6화 (6/313)

[6]

해가 완전히 뜨자 영하로 떨어졌던 온도는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밤새 추위와 공포에 떨며 자다가 깨는 것을 반복하던 아이는 햇살이 얼굴을 비추자 조금 온화해진 얼굴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변기 위에 살며시 올려뒀다.

아이는 잠결에 손을 뻗어 나를 찾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아이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변기 칸 문을 열었다. 들어올 땐 몰랐던 화장실 내부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은 꽤 오랜 시간 방치된 흔적이 보였다. 진한 암모니아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스쳤고, 무언가 눅눅한 공기는 온몸을 눅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젯밤 일이 마치 모두 꿈이라는 듯 화장실 내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 한편에 있는 창문으로 걸어가 밖을 바라본다.

맹렬하게 이곳을 지나가던 그놈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시야에 보이지 않았고, 밖의 풍경은 고요하기만 했다. 간혹 들려오는 나무 흔들리는 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면서도 이내 그것이 바람 소리란 걸 깨닫고 작은 한숨을 내뱉어 보았다. 확실하게 그놈들은 이 주위에 없었다.

주위가 안전함을 확인하자 나는 다시 변기 칸으로 들어가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는 일어나기 싫다는 듯 몸을 움츠렸지만, 지금은 잠꼬대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강제로 몸을 일으켜 세웠고, 아이는 착하게도 내 고집을 받아줬다.

눈곱이 낀 눈가를 소매로 닦아주자 아이는 부스스한 눈을 뜨고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나도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메고 있던 키티 가방에서 물병과 라면을 꺼냈다. 아이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물과 라면을 보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물병을 개봉해 아이 앞에 내밀었고, 아이는 양손으로 물병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내 눈치를 본지만 나는 괜찮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아이는 황급하게 물병 입구를 입으로 가져갔고, 급하게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가 물을 마시는 동안 라면을 잘게 부수고, 아이 손에 쥐여준다. 마음 같아선 끓여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굶주림을 대변하듯 아이는 그렇게 한동안 음식에 집중했다. 나는 아이가 먹는 걸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물과 식량도 필요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생각은 끝없이 광범위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살아 있는 사람은? 정부는? 군대는? 그 많던 시체는 다 어디로 사라졌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어디가 안전할까. 많은 생각이 단시간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생각 속 한구석, 전망이 어둡고, 생존 확률은 희박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생각을 애써 지우며 단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모든 생각을 마칠 때쯤 아이가 물병을 들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반이 남겨진 물병이었다. 그리고 라면의 내용물도 정확하게 반 정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 물병과 라면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 배 안 고파.’

내가 거절의 말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이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아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분명 아이는 이 현실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꿋꿋하게 이겨내고, 그리고 이제는 타인마저 걱정하고 있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 아이이기에 보여 줄 수 있는 깨끗한 모습에 나는 마음속 한구석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뭉클함? 아니면 감동? 난 이 감정을 글로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아이가 내민 라면과 물병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받아들자 마치 내 몸속에 긴장과 악의가 전부 빠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난 아이 앞에서 다리 힘이 풀렸고, 이내 그 자세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난 화장실 벽에 몸을 기대며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처음은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이름이 뭐야?’라고 물어봤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보처럼 멀뚱멀뚱 나를 바라봤을 뿐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벙어리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족들과 도망칠 때 아이가 질렀던 비명을 기억하는 나는 그 생각을 철회했다.

그리고 곧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엄마와 아빠의 죽음을 지켜봤던 아이다. 그리고 그놈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하루 동안이나 바라보며 차 밑에 고립되어있던 아이다.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아이는 충격을 받았을 뿐이고, 마치 감기에 걸리듯 잠깐 아플 뿐이다.

그런데도 남을 생각하는 아이가 기특해 잠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래도 난 아이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은 마음에 내 일기장과 모나미 볼펜을 내밀었다. 그리고 일기장에 ‘이름이 뭐야?’라고 쓰고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내가 내민 볼펜을 꼭 잡고, 한 자 한 자 눌러서 쓰기 시작했다.

(이채연)

못생기고 삐뚤삐뚤한 글자다. 처음으로 일기장에 내가 아닌 타인이 글을 남겨본다. 이채연, 내가 고립된 방 한편을 나오게 해 준 아이이자 나를 방에서 꺼내 준 아이의 이름이다.

어찌 보면 참 웃긴 감정이었다. 만난 지 고작 하루 된 아이에게 동질감과 고마움을 느낀다니. 누군가 내 일기를 읽는다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핀잔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가 안전한 곳을 향할 때까지 지켜 줄 든든한 보호자가 될 것이고, 아이는 내가 다시는 스스로 갇히지 않게 도와줄 작은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 의지할 곳이 없기에 서로를 만났다. 난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가 내민 물과 라면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는 괜히 아이를 보고 웃어 보인 뒤 물과 라면을 입에 욱여넣었다. 라면은 고소하고, 물은 시원했다.

식사를 마친 내가 손을 내밀자 아이는 지체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천천히 변기 칸 문을 열었다. 그리고 살며시 걸어 창문 앞으로 다가가 창밖을 살펴봤고, 이내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 문 앞에 깨진 유리 파편을 발로 치우며 아주 천천히 걸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도 천천히 떨렸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화장실 문밖으로 나서자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자동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표지판과 나무들 그리고 운동 기구가 빼곡한 근린공원은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곳을 향해 올라왔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원을 내려가는 길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그날 봤던 빛의 파도는 모두 악몽 속으로 사라진 듯 주위에 그놈들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꼭 신이 돕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평화로운 길을 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음에도 우리는 어느새 근린공원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아이를 들어 올려 안았고, 주위를 조심히 훑어보았다. 저 멀리 육안으로 그놈들이 거리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이곳까지 우리를 따라오고 이내 놓치자 모두 제자리로 향한 모양이다.

다행히 그놈들과 우리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떨칠 수 없는 공포에 나는 긴장감이 섞인 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이는 눈을 꼭 감고 덜덜 떨며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가장 먼저 도시 밖으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다못해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해야 했다. 그놈들은 도시에서 끝없이 걸으며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닌다.

그리고 사냥꾼은 사냥감이 많은 곳에 모여든다. 생각을 단순하게 굴려봄에도 당연한 이치였다. 내 머릿속에서 많은 장소가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선 다양한 가능성이 흘러나왔다. 생각을 마친 나는 주위를 둘러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 전의를 가다듬고 있었다.

* * *

우리가 근린공원에서 빠져나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근린공원 바로 아래 있는 작은 편의점이었다. 편의점으로 향하려는 계획은 없었지만 우연치 않게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는 물과 식량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편의점이 외곽에 위치하는지라 주위에 그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물과 식량을 조달하기 좋은 최적의 장소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난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걸음 한 걸음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아이를 데리고,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혹시 그놈들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채연이는 그런 나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봤다. 하지만 난 아이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제 내 목숨뿐만 아니라 아이의 목숨도 지켜야 하니까.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끝날 수 있다. 절대로 경솔하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나는 걸음을 옮겨 편의점 문 앞까지 접근했다. 유리창을 통해 편의점 내부를 살펴봤고, 당연히 알바 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편의점 내부는 대단히 깨끗했고,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알바만 서 있었다면 완벽한 일상의 풍경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고 난 채연이를 내 뒤로 숨기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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