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이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아본 순간, 멀리 보이는 그곳은 빛의 파도였다. 고시원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의 파도들. 서로가 서로를 밟고 밀치며 마치 쓰나미처럼 그놈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이 내뱉는 소름 끼치는 비명과 야생동물 같이 빛나는 눈.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고, 그 빛나는 눈은 분명히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들을 속인 걸 눈치라도 챈 걸까. 그들의 맹목적인 적의와 시선이 모두 이곳으로 향한다. 공포를 직면한다. 두려움이 몸에 엄습한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정신은 아득하게 멀어져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다. 포식자와 대면한 초식동물의 본능. 그리고 순간이었다. 손끝으로 아이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멍하니 그 파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계획이 내 머리를 채찍질하고 몸을 움직이게 했다. 여기서 잡히면 안 돼!
첫 인사말은 무엇이 좋을까 고시원에서 고민하던 시간이 생각난다. 어이없게도 내가 그 아이에게 가장 먼저 뱉은 말은 ‘빨리!’ 였다. 아이의 이름과 나이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음을 뒤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잡고 있던 손을 당겨 멍하니 있던 아이를 차 밑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빠르게 품에 안았다. 역한 배설물 냄새와 추운 날씨에 차갑게 식은 아이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그동안 쓰지 않던 뼈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빼곡한 차들을 헤치고 찬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끊임없이 숨을 내뱉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입에서 생기는 입김은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너무나 힘이 들었고, 그런 육체적 고통 속에 의지는 너무나 쉽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작은 심장 소리가 닳아가는 영혼의 정수에 기름을 부어 넣는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아이는 말없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시야가 빠르게 바뀐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머리가 띵하다. 어느새 도로를 벗어나 작은 인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 어둡고 고요한 도시는 이제 내 발소리와 그놈들의 뜀박질 소리로 가득하다. 그놈들이 내뱉는 비명이 내 근처까지 도착했음을 알려 준다. 어디로 향해야 한다는 계획은 잊혀졌다. 나는 그저 생존을 위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머리에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 삶이 이제는 끝이 난다는 공포와 작은 허탈감. 그리고 이 아이도 나와 같이 최후를 맞이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끝없이 달리고 있음에도 나는 죽음을 향한 주마등을 마주 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데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눈앞에 표지판이 보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근’이라는 표지판 앞글자만을 읽고 뛰었는데 갑자기 생긴 경사와 나무들 때문에 나는 당황해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과 양옆에 흙길. 그리고 마치 숲처럼 많은 나무들. 정신없이 뛰면서도 확인한 안내도가 이곳이 근린공원임을 알게 해 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한 순간 난 더 망설일 틈도 없이 계속해서 바삐 뛰어갔다.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올라갔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공원 속 숲속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나무들은 침입자를 눈치챈 듯 조용해지고, 들고 있던 손전등은 정신없이 앞을 밝히고 있었다. 프레임이 끊기듯 급박한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언뜻언뜻 보이는 계단들. 양옆은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고, 오직 손전등이 비추는 정면만이 내 앞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놈들이 치고 나올 것만 같은 공포심이 엄습한다. 한줄기 밧줄 위를 달리듯 걸음은 위태롭기만 하다.
다리 근육은 당겨오고 숨을 턱 끝까지 차오른다.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저 멀리 산을 오르는 빛의 무리들이 보인다. 그놈들의 눈빛은 아직도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단말마 같은 비명을 참으며 이를 꽉 다물고 다시 달렸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아이는 내 품에 얼굴을 박고 떨고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이 나를 다시 한 번 다잡았다. 절대 내가 먼저 포기할 수 없다.
그나마 앞을 밝혀 주던 손전등 불이 끊임없이 꺼지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다이소에서 구매한 싸구려 손전등은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 건지 아니면 떨어질 때 고장이 난 것인지, 중요한 건 지금 급박한 이 상황에서 앞을 밝히는 불이 사라지게 생겼다. 최악과 최악의 상황이 겹쳐오기 시작하자 나는 자신을 자책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계단을 계속해서 오른다. 전등이 꺼지다 켜지기를 반복한다. 내 눈앞에 계단은 없어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한다. 어둠 속을 걷는다. 난 지금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고 있었다. 언제 끝이 날까? 포기라는 방아쇠가 내 머리에 올라서자 내 숨이 한계 끝까지 차올랐음을 자각했다. 더는 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연신 아이에게 괜찮다고 속삭이던 내 입술은 마치 접착제를 붙여 놓은 듯 조용해진다. 발이 멈췄다. 손전등은 이제 수명의 끝을 한 발자국 남겨 놓은 듯 빠른 속도로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한다. 이 빛이 꺼지면 어둠이 나를 잠식하고, 그 지겹던 삶이 끝날 것이다. 나는 숨을 급하게 내뱉으며 체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마치 내 마음속을 읽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맑고 순수한 눈동자에 내가 거울처럼 비쳤다. 그 아이는 그 작은 창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다는 후회가 조금씩 든다. 하지만 넘어갈 듯한 숨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나는 입을 열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손을 천천히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흐릿한 전등불에 비치는 그곳은 조그마한 시멘트 건물이었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공포 때문에 짧아진 시야는 그것은 이제야 발견하게 해 주었다. 내 마음속 깊이 혹시나? 하는 희망이 치고 올라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손전등을 저 멀리 던졌다. 혹시나 이 빛을 따라 우리를 쫓고 있다면 제발 저것을 향해 가라. 난 빌고 빌었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부여잡고 격한 숨을 내뱉으며, 그 건물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아이는 아직 포기하고 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에게 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계단을 날듯이 뛰어오른다.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을 힘겹게 떠, 흐릿한 잔상이 남아 있는 건물을 향해 뛴다.
넘어질 듯 아슬아슬한 걸음, 그리고 손을 뻗자 시멘트 건물에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문을 찾는다. 건물 반 바퀴를 손으로 짚으며 문을 찾기를 잠시, 손끝에 느껴지는 유리문의 감촉에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옅은 달빛이 비치는 건물 안은 공용 화장실이었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아이를 내려놓고, 황급하게 화장실 문을 닫고 잠갔다. 이 얇은 유리 벽에 잠금장치는 그놈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테지만 문을 잠근 행동은 그저 본능이고 자기 위안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끌어안고 화장실 칸막이에 들어갔다. 아이를 대변기 위에 올려두고, 대변칸 문을 또다시 닫아 잠갔다. 그리고 나도 대변기 위로 올라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내 몸은 덜덜 떨렸고, 아이의 몸도 덜덜 떨렸다.
저 멀리 그들의 괴음이 들린다.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놈들은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향했고, 손전등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놈들이 분노에 가득 차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고막을 관통한다. 난 아이의 귀를 꾹 막아 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비명은 마치 나에게 어디 있냐고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발밑에 낙엽을 헤치는 소리가 건물 주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벽에 텅텅 무언가 부딪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손을 들어 거친 숨이 터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아이의 입 또한 막았다.
1분이 1시간 같았다. 당장이라도 저 얇은 문을 박살 내고, 그놈들이 내 목과 아이의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나를 놓쳤다는 분노와 짜증이리라. 손끝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화장실 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흡 들이켰고 아이를 끌어 앉았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떨고 있었고,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화장실 유리문이 깨지며 그놈들 중 하나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분노에 가득 찬 듯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상한 괴음을 읊조리는 그놈은 터벅터벅 화장실 바닥을 밟으며 우리를 찾았다. 그 발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야가 화장실 칸막이 아래로 향한다.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칸막이 아래로는 흉측하게 뭉개진 발이 서 있었다. 나는 아예 숨을 멈추고, 아이 또한 숨을 멈췄다. 순간순간이 너무나 느리게 느껴졌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났다. 그놈은 칸막이를 열 판단은 못 했는지 한참을 그곳에서 서성이다 성대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그놈이 나갔음에도 숨을 내뱉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묵혀 있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고, 아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천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단순한 생각과 행동들이 나와 아이의 목숨을 살렸다.
한참을 멍하니 화장실 벽을 바라보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아이를 살린다는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번이나 오가서야 난 고통스러운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었다. 난 가장 먼저 키티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 아이를 먹였고, 나도 순식간에 반 통을 비웠다.
해가 뜨기를 기다린다.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 여명이 밝아 오자 화장실 창문을 통해 이 칸막이 안쪽으로 빛이 들어온다. 마치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빛줄기 같았다. 그 빛에 의존해 일기를 마저 작성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아이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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