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게임 (1) >
성연은 쓰러져 죽은 로버트 데이비스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널브러져 죽은 슈퍼맨은 초라했다. 그 초라한 시체를 바라보던 성연은 언데드로 되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장 버거웠던 적들이 모두 쓰러진 가운데, 슈퍼맨은 수하로 부릴 가치도 없었다.
허망하게 널브러진 시체를 보던 성연은 뒤돌아 떠났다.
승리였다.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상처만 남은 승리.
"갑시다. 수습해야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이 싸움에 억울하게 휘말려 죽은 사람들도 너무 많······."
황홀감보단 피로감이 먼저 쏟아졌다. 모두가 지쳐있었다.
그리하여 치열한 전쟁이 끝났다.
얼마 뒤, 제 수장을 버리고 도망쳤던 협회 측에서 새로운 협회장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해서 그 수장이 대한민국 측에 항복을 선언했다는 말도 함께.
대한민국 땅에 새로운 미국의 왕이 찾아왔다. 일방적으로 이쪽에 유리한 조건들을 몇 개 내놓은 그들은 이현우와 협상을 마쳤고, 그들이 떠나간 뒤 로버트 데이비스의 시체가 심각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얼굴과 몸뚱이에 끔찍한 상처들이 새겨졌다. 히어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그를 애도하는 인물도, 장례를 치뤄주는 이들도 없었다.
성연은 그 소식을 덤덤하게 들었다. 그러곤 움직였다. 아직 네 번째 이벤트는 끝나지 않았다. 이 땅에 내린 재난과 전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
본 게임을 개최한 이들, 그리고 그 게임을 바라보는 관중들은 마침내 승리한 네크로맨서를 보며 환호했다. 로버트 데이비스 쪽에 판돈을 걸었던 이들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그들이 보기에 저 치열한 싸움은 일종의 영화나 드라마요, 스포츠 경기에 불과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신속하게 끝난 전쟁에 본 게임을 개최한 이들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깔끔한 결말에 웃었다. 저번에 다른 세계에서 게임을 개최했을 땐, 후반부가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던 까닭이다.
이번에 탄생한 명장면은 관중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릴 것이다.
주최자들은 이 재미난 장면들을 연출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배경이 된 세계를 일회용으로 버릴 생각이 없었다. 시곗바늘을 되감거나, 모종의 방식으로 다시 게임을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이 유희를 무한에 가깝게 즐길 것이다.
【마침내 승리한 건 결국 유성연이군요.】
【다음 게임에선 밸런스 패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하미궁에 네크로맨서 페널티를 걸어 견제하는 것 말고도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하겠군요.】
【예. 일단 마운틴? 저들이 그리 이름 붙인 GM에 몇 가지 요소를 추가해야겠습니다. 불로불사라던지, 진정한 의미로 공략불가라던지, 죽으면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던지······.】
【불로불사나 무적은 너무 재미요소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번에 마운틴과의 전투가 꽤 열렬한 반응을 끌어냈으므로 다음에도 써먹도록 하지요. 네크로맨서나 다른 각성자들의 능력치를 낮추면서 마운틴의 스펙도 낮춰서. 그리고 온라인 게임의 보스몬스터처럼 죽는 즉시 흙이 되어 사라지는 게 좋겠습니다.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지나치게 강력한 존재로 군림하게 되니······.】
【그 대신 요긴하게 쓸 물건들을 몇 개 드랍해주면 되겠군요. 아, 더해서 다음 패치엔 마법사들도 좀 견제하도록 하죠. 소위 S급 각성자들이라 부르는 이들의 스펙도 낮추고.】
【그건 안됩니다. 소시민들끼리 우르르 뭉쳐서 전쟁하고 정치질하는 것만 주구장창 나오는 건 인기가 없거든요. 볼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아먹을만한 주인공이 필요합니다. 유성연이 꽤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나름의 스토리가 있었던 까닭인데······.】
【그럼 다음 게임에서도 유성연은 불운의 네크로맨서로 등장하면 괜찮겠군요. 김유현 살해에 실패해서 조금 더 독기에 찬 모습이어도 괜찮겠습니다.】
【아, 김유현 능력은 좀 수정하죠. 잘 써먹으면 너무 강력합니다.】
【그럼 이 부분을······.】
주최 측. 인간들이 부르길 '신'에 가까운 존재들은 세상을 수정할 방법을 토론했다. 그 토론은 숭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임사 직원들이 어찌 유저들을 더 만족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사고로 진행되었다. 즐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튀어나온 재미난 인물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사건과 전개. 그 순간만큼은 주최 측도 관중이 된 것과 비슷한 재미를 느꼈다.
【유성연을 좀 더 처참하게 바꾸는 건 어떨까 싶군요. 그러니까, 그 가정사를 더 불우하게요. 약간만 건드려도 인물상이 완전히 변화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가정 폭력을 당했다던가······.】
【그거 괜찮군요. 살짝 수정하는 것으로 유성연이 다음 게임의 빌런 역할을 맡는 겁니까? 그럼 반대로 로버트 데이비스는 완전무결한 정의로운 히어로로 만들면 괜찮겠군요. 악한 네크로맨서와 선한 슈퍼맨······전형적인 전개지만 다들 좋아할 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과정으로 하여금 개개인이 느끼게 될 비참한 감정과 흘리게 될 눈물은 중요하지 않았다. 빈 공책에 캐릭터 설정을 써내려가듯, 재미난 스토리만을 떠올릴 뿐이다. 더 자극적이고 더 인기가 많을 이야기들. 이번 작품은 꽤 만족스러웠다. 다음 작품에 기대치가 많을테니 관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노력해야 할 터이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찌 망가질 지, 세계가 어떤 형식으로 엉망진창이 될 지는 중요치 않다.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시곗바늘을 되감아 다시 리플레이하면 되지 않는가······.
이들은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저 아래에서 분투하는 네크로맨서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
이현우의 통치와 함께 대한민국에 질서가 세워진 가운데, 그 아래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이들은 많았다. 옛날을 그리워하는 이들. 살육에 지친 소시민들.
그리하여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 성연은 움직였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레베카 블런트와 스티븐 최뿐이다.
"워 - 어 - 엌······."
출현한 군주들은 뭔가 해보기도 전에 성연에 의해 죽었다. 마운틴을 매개체로 만든 언데드와 각종 능력이 융합된 글러트니는 일종의 살육 기계였다. 빗자루로 먼지들을 치워내듯 전장을 휩쓸었다. 그렇게 모두 죽이고 난 뒤엔 레베카의 능력으로 순간이동하여 다른 곳에 평화를 내렸다. 그 광경은 일종의 신화에 가까웠다.
성연은 이제 강력한 네크로맨서를 넘어, 신으로 숭배받았다.
그 전투의 모습은 신화에서 묘사된 절대자들의 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건넬 정도였다.
"군주시여. 제 딸이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뭐든 바칠테니, 자비롭게 그 아이를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라면 분명······."
그 터무니 없는 말에 성연은 자신의 능력을 덤덤히 설명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부활이 아니요, 시체를 일으켜 썩어문드러진 몸뚱이를 가진 언데드로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신앙심이 부족하여 그러냐고 울부짖었다. 성연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아니라 괴수만을 보며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날 레베카가 물었다.
"끝에 다다르면 무얼 빌거야? 이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할거야?"
"······."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세상인데? 예전으로 돌아가면 뭐가 달라져? 네가 쌓아올린 업적들도 모조리 사라지고, 힘도 사라질거야. 안타까운 사정 가진 사람들 볼 때마다 니 표정 되게 복잡해지는 거 알아? 마치 너 따윈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소원을 빌 것처럼."
레베카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세상 이대로 둬. 어차피 제 모습 찾을거야. 그 동안 노력한 것을 바탕으로 부귀영화도 누리고, 신처럼 군림하면서 살아. 그 속에서 가족만 되돌려 달라고 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인생······너를 위해 살라고."
"망가진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이 망가지기 전으로 돌려달라고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모두 평화로운데 너 혼자 궁상 떨거잖아. 그 평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우울증에나 빠지겠지. 퇴역 군인처럼 PTSD에 사로잡혀 정신과 상담이나 받을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너의 행복을 위한 걸 빌라고."
"그렇담 시간을 돌려달라는 건······."
"너, 다시 이 힘든 걸 반복할 자신이 있어? 내가 보기에 넌 최선을 다했어. 이것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 순 있겠지. 하지만 개인이 세상에 내린 죽음을 모조리 막진 못해. 그건 누구도 하지 못하거든? 진짜 신이라도 아닌 이상에야······."
"신······그래. 신 정도는 되어야 세상을 뜻대로 바꿀 수 있겠지. 전지전능한 절대자."
성연은 그리 읊조렸다.
레베카의 말대로 시곗바늘을 되감아 봤자 다시 완벽하게 살아갈 자신은 없었다. 이보다 어찌 나은 결과를 만드는가? 교도소에서 처음 결심했던 그 소원도 이젠 빌고 싶지 않았다.
돌아온 부모님은 달라지신 당신의 아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순수했던 소년이 아닌,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된 초인을 볼테니.
그리하여 부모님이 짓게 될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았다.
성연은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이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길 바랬다. 그리고 세상에 벌어진 이러한 일이 다신 되풀이되지 않길 바랬다. 그러려면 아주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뜻대로 세계에 초인들을 만들고 괴수를 쏟아지게 만들 수 있을만큼 권능. 그러니까, 지구에 본 게임을 일으킨 이들과 동등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니. 되풀이를 막으려면 동등한 수준이 아니라 훨씬 우월해야 할 것이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초월적 존재.
레베카는 그 소원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한국인이 마침내 행복해지길 바랬다.
그 동안 고생했으며 노력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모든 독자들이 으레 그렇듯, 등장인물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길 바랬다. 자신을 희생해 세상에 행복을 불러오는 것 따위는 절대로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레베카 블런트를 보며 성연이 말했다.
"다케다 유이치. 그 소아성애자한테 끔찍한 꼴 당했었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만약 세상이 이렇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당했을까? 아니, 넌 그저 책 좋아하는 어린 영국 소녀로 남았겠지. 정상적인 사고를 가졌을거고 꿈에 부풀어 살았을거야. 트라우마 따위 없었을테고······아마 나도 그랬겠지."
성연은 그리 되뇌었다. 그러곤 앞을 바라보았다.
괴수들이 즐비하다. 굶주린 녀석들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제 성연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적들이다.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놈들이 핏물이 되었다.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이제 자신의 몸에 완전히 배어서 지울 수 없게 된 끔찍한 내음.
성연은 전진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마지막을 앞두고 열정이 솟은 까닭은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최후의 순간에서 성연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지 완벽하게 결정하지 못했다. 정말로······.
그리고 그리 심경이 복잡한 와중에서 네 번째 이벤트가 종료되었다.
우승자가 발표되었다.
한국인 유성연.
< 본 게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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