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군주 유성연 (2) >
검은 물결이 파도쳤다. 두 번째 이벤트의 우승 상품으로 얻은 물건이다.
이클립스. 그 지팡이를 든 성연의 능력은 더욱 광범위하게 발동했다. 굳이 일으키려 하지 않아도 주변에 죽은 시체들이 언데드가 되어 일어났다. 그 언데드들은 도망치는 협회의 각성자 군단을 추적해 하나씩 숫자를 줄여나갔다. 핏물이 튀는 소리와 함께 단말마가 울렸고, 그 뒤엔 울려퍼진 비명만큼 언데드의 수가 늘어있었다. 저 네크로맨서가 일으킨 군단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는 이들은 이제 없었다. 슈퍼맨까지 돌아선 가운데 모두가 도망치고 있었다. 후퇴와 죽음이 연이어 반복되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 전장에 새로이 합류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로버트, 결국 당신이 자초한 일이군요. 결국은······."
늙은 여성. 그 주변엔 녹색 총기로 장비한 이들이 은밀하게 이동했다.
중심으로, 더 중심으로.
***
언데드가 된 마운틴은 강력했다. 그 수하를 부리는 주인의 입장에서 성연은 넘쳐흐르는 힘을 과장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슈퍼맨이건, 히어로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무력이다. 마운틴이 움직였다. 여전히 '할만하다'는 생각을 떠올리는듯한 로버트의 얼굴이 보였다. 멍청한 발상이었다. 이제 마운틴은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가 아닌, 죽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힘조절 따위는 없다.
로버트가 비행하며 뭐라 소리쳤다. 뭉개진 발음이다. 영단어가 뒤섞인 말들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대충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욕설이었다. 명예나 품위 따위는 저버린 채 분노를 마음껏 담아 쏟아내는 욕설. 그 욕설을 뱉은 직후 로버트가 초고열 광선을 쏴갈겼다. 원거리에서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그 공격은 지금 빛을 발하지 못했다.
레베카와 성연이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텔레포트 주문이 발동된 결과이다.
잠깐의 틈을 만든 후, 레베카는 곧장 새로운 마법 주문을 외웠다. 모든 열반응을 제한하는 강력한 억제 마법. 그와 함께 뿜어지는 열광선의 화력이 서서히 약해졌다. 눈에 띄게 얇아진 열광선은 마운틴이 뻗은 손에 의해 간단히 막혔다. 로버트가 다시금 욕설을 지껄이려던 그때였다. 마운틴이 반대쪽 팔을 휘둘렀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위력으로.
로버트의 몸에서 수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로버트의 몸이 저 멀리로 곤두박질치며 날았다. 흙먼지 너머에서 보이는 눈엔 명백한 당황이 담겨있었다.
이럴리가 없다. 분명 전엔 이것보다 약했······.
그러한 생각 따위가 담겨있는 듯했다. 성연은 마운틴에게 계속해서 공격하길 명령했다.
거대한 언데드가 전진했다. 다시 한 번 로버트가 곡예비행을 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명령을 내리는 주체인 성연은 생명 반응 감지 능력으로 정확한 위치 좌표를 알 수 있는 건 물론이요, 다케다 유이치의 능력을 활용해 발동시킨 초감각으로 슈퍼맨이 다음으로 움직일 위치를 예지에 가깝게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빛살에 가까운 주먹에 맞은 슈퍼맨의 몸뚱이 절반이 터져나갔다. 비명이 들렸다. 한쪽 남은 팔로 다급하게 포인트로 구매한 회복약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몸을 회복한 로버트는 문득 자신의 주변을 살폈다.
"이, 이 불경한 것들이······."
아무도 없었다. 저 네크로맨서의 뒤엔 여전히 많은 인원이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주변엔 누구도 남지 않았다.
대체 왜? 저 더럽고 미천한 출신인 네크로맨서의 편이 저리 많은데, 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정의를 지키는 자신의 곁엔 아무도 없는 것이냐······.
고작 자기네들 몇을 죽였단 이유로? 로버트는 이 순간 아주 큰 분노를 느꼈다. 대업을 위해 제물로 바쳐졌으면 감사해하며 기꺼이 몸을 던지진 못할 망정, 겁에 질려 도망치는 꼴이라니.
그리 생각하던 로버트는 마운틴이 자신과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것을 보았다.
승산이 없다. 저 네크로맨서가 나타난 직후 마운틴은 지나치게 강력해졌다.
놈도 제물을 바친 게 분명했다. 그래. 토벌대라는 명목으로 각성자들을 잔뜩 끌고 가 그들을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포인트를 벌고, 언데드를 이리 저리 뒤섞어 강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저 녀석도 자신과 다를 바 없을텐데, 왜 내 주변의 사람만 떠나가는가.
도대체 왜. 로버트가 허망하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때 적측에서 탄환 세례가 쏟아졌다. 로버트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없는 종류의 공격이다. 하지만 불꽃이 튀고, 요란한 소음이 가까이서 터지는 것만으로 로버트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한 감정을 느꼈다. 미세하게 두드리는 느낌.
모두가 자신을 적대하고, 같은 편은 도망치는 이 상황.
이게 히어로가 맞나? 성경 속의 노아도 이러한 상황을 감내했단 말인가?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질 수라도 있었다. 그런데 왜 신께선 나에게 아무 계시도 전해주시지 않는가? 하늘의 말조차 없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지 않은가. 인류의 적이 된 기분이다. 히어로가 아니라, 세상을 위협하는 빌런이 된 기분······.
"헙······."
그때 쏟아지던 탄환 세례들 중 하나가 로버트의 가슴께를 꿰뚫었다. 선명한 통증과 함께 피가 튀었다. 화망이 가린 탓에 흐렸던 시야 틈새로 거뭇한 무언가가 세차게 다가왔다. 마운틴의 발끝이 로버트를 걷어찼다. 땅에 박힌 돌부리가 튀어나오듯, 로버트가 힘 없이 날아갔다. 가슴이 음푹 패이고 머리가 어질했다. 로버트는 힘겹게 회복약을 구입해 마셨다.
그러면서 로버트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피로감을 느꼈다. 회복약은 육체는 말끔하게 낫게 해주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회복시키지 못한다. 통증은 정신적인 면에 속한다. 그러니까, 지금 로버트의 몸엔 죽음에 가까운 통증들이 여러 번 누적되며 끔찍하리만치 강렬한 격통이 쌓여있었다. 능력을 각성한 이래 몸을 크게 다쳐본 적 없었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이 아득한 통증 속에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리고 휘청이는 로버트의 모습을 보며 성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질기네. 지나치게 질겨."
그러곤 주변 전장을 살폈다. 그 위협적이던 협회 각성자 군단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신나게 방아쇠를 당기는 건 모두 아군이다. 로버트는 홀로 맞서고 있다. 아마, 곧 도망칠 요령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누구도 전의를 불태우지 못할 것이다. 저 늙은이가 정말 정의감에 불타 싸우거나 할리우드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말이다.
성연은 저 미국인이 난데없이 음속을 돌파하는 속도로 도망치며 회복약만 연신 들이키는 상황을 가장 경계했다. 그래서 마운틴에게 명령을 새로이 내렸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쓰도록. 마운틴은 그렇게 했다.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성대가 시끄러이 떨렸고 그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선 전원의 머리 위로 천둥이 내리꽂혔다. 로버트는 물론이요, 아군마저도 그 포효에 휘말렸다.
머리를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모두가 뇌진탕과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다. 누군가는 그대로 주저앉아 쓰러지기도 했고, 누군가는 휘청거리면서도 열심히 탄환을 쏴댔다.
로버트는? 비행하려던 자세 그대로 엎어져 바닥을 기었다. 그러다 날개가 부러진 날파리처럼 다시 느릿하게 날며 도망쳤다. 그런 것을 몇 번 반복했다. 이제 전장엔 진한 핏줄기가 하나 선처럼 쭉 그어졌다. 마운틴의 포효는 로버트의 머리를 성공적으로 뒤흔들었고, 그 각성 능력을 망가뜨렸다. 반편이가 된 상태에서 로버트의 몸은 탄환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이현우가 강윤식의 능력을 활용해 쏘아낸 것뿐 아니라, 다른 탄환 세례들도 그 몸에 선명히 상처를 새겨넣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추악하게 바닥을 짚으며 도망쳤다.
뒤를 돌아본 채,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듯 끈질기게.
성연은 그 미국인의 뒤를 쫓았다. 급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천천히 따라갔다.
***
"살려······살려주······."
로버트는 제 힘을 쥐어짜 도망쳤다. 능력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옛날, 능력을 각성하기 전 친구들과 술을 진탕마셨을 때가 떠올랐다. 속이 뒤집어지고 머리가 빙빙 돌던 기분. 우월한 육체는 이제 일반인의 수준으로 서서히 약화되는 중이었으며, 뒤에선 여전히 탄환 세례가 세차게 쏟아졌다. 그리고 일반인의 몸은 철탄을 막아내지 못한다. 로버트는 이 순간 슈퍼맨이 아닌 늙은이가 되어있었다. 자식을 낳고 손자를 보며 마땅히 죽음을 준비해야 할 나이의 노인······.
그 노인은 느릿하게 도망쳤다. 적들의 추격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이 순간 로버트는 아군이 간절했다. 자신의 편, 시간을 벌어서 자신이 힘을 회복하고 나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줄 아군······.
'제발. 제발 누가······.'
원래의 힘만 되찾는다면 방법은 많다. 저 네크로맨서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언젠가 빈틈이 생길 것이다. 로버트는 강자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겪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저 네크로맨서는 다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식사하는 순간, 휴식하는 순간, 잠을 자는 순간, 여자와 관계를 나누는 순간······그러한 틈을 노려 초고열 광선을 쏘아내면 언젠간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만 살면 기회는 많았다. 한 번만. 한 번만. 제발.
그때 저 시야 끝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서였다. 그와 가장 오랫동안 일해온······.
"아, 아. 이쪽. 이쪽이네! 이쪽!"
이 순간 로버트는 큰 기쁨을 느꼈다. 얼마 전 말다툼을 벌였지만 그간 함께 한 정이 있기에 도와주러 온 모양이다. 그래. 평생을 헛되게 살진 않았다. 로버트는 이 상황에서 살아나갈 길이 생겼다는 것보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은 인물이 그나마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하지만 비서의 표정이 이상했다. 구조를 온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여요."
그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로버트는 그제서야 비서의 주변에 녹색 총기를 든 인원들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전력이었다. 탄환이 몸을 스며드는 순간 로버트는 자신의 힘이 한없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여러 감정을 느꼈다. 슬픔, 배신감, 착잡함······그 모든 것이 더해지는 순간 최종적으로 떠오른 것은 분노였다. 강렬한 분노.
로버트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깝게 으르렁거렸다. 맹수의 것에 가까운 포효에 비서가 끌고 온 인원들은 물론이요, 비서마저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로버트는 절뚝이며 달려들었다. 그러곤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잡아 으깼다.
약화되었지만 슈퍼맨의 근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한놈을 치운 뒤, 로버트는 눈에서 레이저를 쏴 갈겼다. 눈에 띄게 얇아지고 약해진 광선. 하지만 머리에 작은 구멍 뚫기엔 더없이 충분한 힘. 그리하여 녹색 총기를 들고 있던 군단 전원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그 모습을 보며 비서가 허탈하게 웃었다. 로버트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비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도망치지도 않았다. 로버트가 소리쳤다.
"감히! 은혜도, 으, 은혜도 모르고!"
"은혜? 은혜는 당신이 모르지 않았나요? 모두가 믿음을 주고 당신을 따랐는데 당신은 무얼했죠? 거름이며, 제물······웃기는군요.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신에 한없이 가까운 사람은 신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불러요. 추악하고 비틀린 신념에 사로잡힌 괴물······."
"다, 닥쳐!"
로버트가 비서를 밀어넘어뜨렸다. 그러곤 목을 졸랐다. 켁켁대면서도 비서는 웃었다.
2m를 넘어서는 몸뚱이는 그 자체로 강인한 근력을 담고 있었다. 각성 능력 없이도 이런 늙은 여자 하나쯤은 간단히 죽일 정도로.
"미······친, 사람······."
그게 유언이었다. 목이 꺾임과 함께 비서의 숨이 끊어졌다. 로버트는 그 죽음을 확인한 뒤에도 위에 앉은 채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소리를 넘어서는 속도로 휘두르던 주먹은 이제 건장한 이십대 청년이 휘두르는 정도로 격하되었고, 그 정도는 이제 로버트 또래의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 형편없는 속도로 낮아졌다. 늙은 노인은 주먹질 몇 번에 땀을 뻘뻘 흘렸다. 피맛이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면서도 로버트는 계속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뭉개진 주먹을 때리는 주먹이 얼얼했다. 나약한 주먹은 때리는 행위로도 스스로 부상을 입었다. 로버트가 숨을 헐떡였다.
우월한 육체를 모조리 잃은 순간 아까의 전투에서 왕웨이가 흘려넣은 약성이 지금 힘을 발휘했다. 정확히는, 남아있는 잔재였다. 모든 저항력을 잃은 노인은 가만히 앉은 채 멍청한 웃음을 터뜨렸다. 늙은 미국인은 이 순간 이루어지지 않을 영광을 바라보았다.
모든 각성자들이 한곳에 모였고, 그곳에 마침내 자신이 서 있는 모습.
그 낙원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여러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리고 끝내 그 장면은 로버트가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으로 변화했다.
자신이 각성자 판정을 받기 전의 풍경. 가족들이 다 함께 집에 모여 식사하고 미래에 관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 아버지는 뉴스를 보시고, 동생은 자기만 아는 스포츠 이야기를 떠들며, 어머니는 그 모습에 웃던.
안경을 쓰고 허리를 굽힌 채 코믹스를 넘기며 열광하는 로버트 데이비스.
커피 향이 짙게 풍기던 집. 가족의 냄새. 로버트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렀다.
노인은 세월을 거치고 거쳐 결국엔 청년이 되었다. 가장 순수했던 순간의 청년······.
그때 로버트가 깔고 앉은 비서의 시체가 꿈틀댔다. 그륵대는 소리를 내며 비서의 시체가 팔을 뻗었다. 언데드. 성연의 능력이 일으킨 언데드가 그 미국인의 주름진 목을 꿰뚫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로버트는 비명을 지르지도,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이젠 이루어질 수 없는 머나먼 풍경을 바라보며.
서서히 흐려지는 죽음을 맞이했다······.
< 죽음의 군주 유성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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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로버트도 악역이지만 꽤 아끼던 캐릭터였는데 이렇게 보내니 아쉽네요.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느낌입니다. 더 여유롭고 독자님들과 함께 달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제가 국방의 의무를 곧 수행하러 가야하는 몸이 되었네요. 그 전까지 보여드리고 싶었던 이야기들 모두 보여드리고 깔끔히 완성해서 후회없도록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