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가 너무 강함-94화 (94/111)

< 회장 이현우 (2) >

"저것들이랑 싸워야 한다고요? 진짜?"

"예.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도, 유성연 씨를 위해서도."

공중을 날고 있는 로버트 데이비스. 진군해오는 각성자 군단.

그들을 보며 안혜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헌터 출신.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그녀로써는 협회의 전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더해서 저 늙은이가 스스로를 일컫는 '슈퍼맨'이라는 단어가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특정 상황에서 저 미국인의 힘은 코믹스나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허구 인물의 능력보다도 판타지스럽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인류 정점에 서 있는 초인들은 그만큼이나 상식을 넘어섰다. 안혜지는 그 사실을 알았다. 정말이지 아주 잘 알았다.

'이거 완전 개죽음당할지도 모르는데······.'

머릿속에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승산이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안혜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환사 김윤기, 마법사 박수한.

그에 더해서 새로이 합류한 전력들. 이들이 과연 저 영광에 취해사는 군단을 막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패배를 말하는 건 이롭지 않다. 이미 전쟁은 다가왔고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저 사람 좋은 서울대 출신 청년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세운 질서와 도덕, 법규가 무너지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느니 그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안혜지는 이현우를 알았다. 그의 신념도, 각오도.

이들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했을 때 안혜지는 충동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다. 안혜지도 나름의 각오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기꺼이 이 싸움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릴 각오도 있었다. 그때 이현우의 할머니가 다가왔다. 그녀는 만감이 교차한 얼굴이었다.

전쟁에 앞서 가장 먼저 이뤄진 것은 비각성자들의 대피이다. 그 비각성자들 중에서도 노인과 아이들은 먼저 도망치게 해야할 인원에 속했다. 지금 이현우의 할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녀가 보기엔 새파랗게 어린, 아직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누려야 할 청년. 사랑하는 이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며 자식을 낳으며 마땅히 행복해야 할······이제 부모가 사라졌기에 자신이 보살펴야 할 손자. 그 손자가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것이다. 패색이 짙은 전쟁에.

"현우······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이현우의 할머니는 많은 말을 삼켰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자. 아직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이 많다.

여기서 죽기엔 너는 지나치게 어리다. 며느리, 아들을 잃고 손자마저 잃으면 이 세상에서 어찌 살아가란 말이냐. 교통사고가 났을 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여린 너를 너무나 고생하게 만들었다······.

목구멍 안으로 함축된 말은 결국 쏟아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현우는 그 심정을 모두 알았다. 이현우가 각성한 능력은 눈을 마주친 할머니의 마음 속을 고스란히 읽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현우가 읊조렸다. 기약 없는 약속.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한 마디.

"할머니? 먼저 가 있어요. 나 곧 갈테니까. 사람들 잘 챙기고······."

***

각성자 군단은 단순한 전진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선봉에 선 이들의 대부분이 육체계 각성자로 구성된 바, 울려퍼지는 발소리는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중세 시대 기사들보다 요란했다. 숫제 괴수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비슷했다. 웅장하게 퍼지는 발걸음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위협이었다.

"씹······사람 새끼들 맞나······."

다행히도 지금껏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그보다 훨씬 커다란 적들의 습격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온 이들이었다. 투덜대면서도 다가올 충돌에 대비했다. 포인트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부터 각성자들의 수준은 어느정도 엇비슷하게 맞춰졌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투자를 해도 큰 변화가 없게 된 까닭이다. 당연하게도 현 시점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전부 일정한 강화와 테크 트리는 마쳤다. 그러니까, 각성자들 개개인의 전력은 지나치게 차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의외로 사소한 차이이다.

이를테면, 몸에 두르고 있는 장비의 차이.

세계헌터협회는 격변 이전부터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했고 격변 이후에 이르렀음에도 그 기술을 고스란히 공개하지 않았다. 정점에 선 기술력은 곧 뛰어난 장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진영 측의 인원들이 보는 협회 측 장비는 모조리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격변이 일어났을 때도 꺼내지 않았던 비밀리에 개발된 무기들. 통상의 총기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하는 것은 물론이요, 괴수가 아니라 각성자들을 사냥하는데 특화된 장비들이었다. 철컥이는 소리에 모두 경계했다. 더 접근하길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 외쳤다.

"다, 죽여!"

총성이 울렸다. 전투의 신호탄이다.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탄환 하나에 뒤이어 철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협회 측 선봉 몇이 고꾸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총알들은 살점을 꿰뚫고 지나가는 대신, 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방어막이다. 저쪽의 마법사가 탄환 따위는 손쉽게 막는 방어막을 완성했다. 그와 함께 놈들이 거침없이 전진해왔다.

박수한이 마법 주문을 읊었다. 길게 이어질수록 그 위력이 증대되는 힘. 다수전에서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화염 마법. 한 번의 손짓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넓게 펼쳐진 일대에 화염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쏟아졌다. 그 파도 앞에서 각성자 군단은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때 저쪽에서 뭐라 입을 달싹였다. 바람이 불었고 불의 파도가 기세를 잃었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저쪽에서 총성이 쏟아졌다. 빛살처럼 날아든 탄환이 박수한의 팔뚝을 뚫었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집중력을 흐트리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마법사는 주문을 사용하는 와중 중단당하면 그만한 페널티를 입는다. 정신적인 피로와 뇌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타격. 그 즉시 박수한이 신음을 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무력화를 확인한 다른 마법사들이 대신 주문을 읊었다. 적들의 전진을 멈추게 하는 냉기 마법이요, 총기를 막는 방어막 따위를. 하지만 저쪽과 달리 이쪽은 그 탄환 세례를 막아내지 못했다. 유리벽처럼 간단히 무너졌다.

"뭔······."

그들은 각성자 군단 측이 사용하는 탄환이 단순한 철탄이 아니며, 특수한 재질이 섞여 능력을 약화하는 기능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하여 엄폐물 없이 총 든 군단 앞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탄환 세례가 움직임을 억제하고 그 위로 마법과 파괴 능력들이 쏟아졌다. 전황은 처음부터 압도적이었다. 저기 날아다니는 슈퍼맨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왜? 여기서 행동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뜻인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그 눈빛은 더없이 불쾌했다. 그때 김윤기가 악쓰듯 소리쳤다.

"흑 - 염 - 룡!"

포인트를 투자하며 원래 외워야 할 오글거리는 주문은 세글자로 축약되었다. 그리하여 내뱉은 단어와 함께 상공에 거대한 생물이 출현했다. 드리워진 그림자만으로 몇몇 협회 측 군인들이 어버버거렸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소환수의 출현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배가 눈에 띄게 부풀었다. 판타지에서 으레 등장하는 드래곤의 무기. 숨결로 위력적인 화염을 뿜는 공격. 브레스다······.

전열이 단숨에 녹아내릴 것이 분명했다. 저런 형식의 공격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방어막을 뚫기에 아주 효율적이다. 사령관이 많은 희생을 예상한 가운데 하늘에 떠다니던 로버트 데이비스가 움직였다. 거침없이 달려들거나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건 아니었다.

등장한 드래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그리 시선이 향한 것으로 전세를 뒤집을 듯 보였던 소환수의 출현은 허사로 돌아갔다.

슈퍼맨의 눈에서 초고열 광선이 불을 뿜었다. 포인트를 투자한 덕에 격변 이전보다 몇 배는 굵어진 레이저가 흑염룡의 몸을 박살냈다. 비늘이 녹아내렸고, 피부가 갈라지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그 처참한 최후가 양쪽 진영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반응이 극명히 갈렸다. 대한민국 측은 절망했고, 협회 측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행동을 시작으로 슈퍼맨이 움직였다. 말끔한 정장을 입었기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지던 망토는 이제 휘날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발휘하는 무력은 예전에 비하여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악인과 괴수들에게만 쏟아지던 힘이 전쟁 상황에 함께하자 그야말로 악몽이 펼쳐졌다. 곳곳에 붉은 빛이 번쩍했다. 비명도 없이 피와 내장이 흩날렸다. 그리고 흩날리는 잔해들은 고열에 의해 곧 녹아내려 핏물로 화했다. 끔찍한 광경이다.

시체 특유의 냄새와 탄내는 불쾌함을 불러왔다. 더해서, 공포도 함께.

안혜지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거지. 죄 지은 적 없는 나라건 뭐건, 그냥 거슬리니 싹 쓸어버리겠단거야. 아주 대단한 분 납시었네. 하긴, 그래······시선 몇 번 주면 뒈져버리는 것들 비위 맞추기 힘들었겠지. 우리가 아주 벌레로 보일테니.'

그녀는 우수한 근력을 가진 탱커들이 으레 장비하는 무거운 총기를 든 채로, 한 손에 쥔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러곤 힘차게 달렸다. 방패로 찍어누르고 총기로 몇 발 쏴갈기는 것으로 여럿 죽음이 발생했다.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 않으나 착실한 포인트 투자와 원래부터 타고난 전투 감각은 이 상황에서 마치 하나의 각성 능력처럼 활약했다.

총이라는 최고의 무기가 탄생한 이래, 탱커는 전쟁에서 살육 전차처럼 여겨지곤 했다.

안혜지는 고개를 들어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외쳤다.

"야, 이 씨발 새끼야! 진짜 좆나 치졸하게 군다. 정의의 사도니 뭐니 하더니 가관이야. 전엔 나한테 유성연 정보 넘기면 자리 준다고 하더니, 이젠 태도 바꿔서 거슬리는 것들은 다 죽여? 부모님이 잔소리하면 패륜도 서슴없이 저지르시겠어. 하긴, 엄마도 벌레처럼 보이려나? 너네 어머니는 하늘도 못 날거고 눈에서 광선도 빵빵 못 쏠테니······."

헌터 시절부터 안혜지는 입이 험하기로 유명했다. 기 센 남자들과 말싸움이 붙으면 늘 상대쪽이 먼저 열불을 내며 주먹을 들곤 했다. 그리 시작된 다툼에서 안혜지는 진 적이 없다. 흥분한 적을 상대하는 건 이성적인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 네크로맨서가 강한 이유도 그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침착함을 잃지 않는,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점 때문에······.

하지만 저 슈퍼맨에게 그런 본받을 만한 침착함은 없었다. 로버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더해서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안혜지에겐 빛의 속도로 쏘아지는 그 광선을 보고 피할 감각이 없다. 하지만 예측이라면 가능하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육감에 가까운 감각으로 공을 쳐내듯, 여러 행동들로 하여금 다음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초고열 광선이 쏘아지기 전에 안혜지가 미리 움직였다.

큼직한 방패를 들어 몸 주변을 가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과연 로버트는 예상대로 초고열 광선을 쏘았다. 안혜지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포인트 투자로 하여금 첫 공격에 한해 완벽방어를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테크트리를 투자한 덕분에 개방된 새로운 능력.

완벽방어에 성공할 시, 막아낸 공격의 위력을 온전히 실어 어딘가로 튕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말이다. 안혜지는 손끝을 타고 느껴지는 감각으로 하여금 초고열 광선을 튕겨낼 각도를 조절했다. 그리하여 그어진 붉은 선은 이 순간 다른 각도로 다시 한 번 쏘아졌다.

적들을 향해서.

"WHAT······."

마법사들이 만든 방어막이건, 협회의 잘난 기술로 만든 방어구건 가리지 않고 단숨에 녹여버리는 광선이 적들 진영을 붕괴시켰다. 한 번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다리가 녹아내리고 뱃가죽이 불타 내장을 쏟아낸 이들이다. 안혜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패를 치우며 또렷한 눈으로 로버트를 노려보았다.

그 슈퍼맨은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

상대의 당황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에 해야할 것은? 간단하다.

저 강력한 무기를 쓰지 못하게 허세를 떠는 것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인간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안혜지는 최대한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서 레이저 더 쏴, 개새끼야! 니 따까리들 다 죽여버리게!"

로버트는 안혜지의 능력이 첫 공격에 한해서만 발동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또 초고열 광선을 쏘면 꼼짝없이 잿더미로 화할 것이란 사실도.

저 늙은 미국인의 머릿속엔 자기 초고열 광선이 일종의 무기로 이용될 미래만이 가득할 것이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 자부하며 생각 많은 이들의 문제점이다. 안혜지는 헌터로 활동하며 그런 이들의 복잡한 사고를 역으로 이용하는 법에 관해 아주 잘 알았다.

로버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FUCK······."

그 추측은 맞았다. 유유히 날던 로버트 데이비스가 땅에 착지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랜딩 자세로.

그 모습을 보며 안혜지는 늙은이가 꼴볼견을 떤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긴장은 늦추지 않았다. 저 슈퍼맨의 힘은 초고열 광선에 한정되지 않는다. 무기 몇 개를 봉쇄했을 뿐이다. 저 비대칭 전력은 여전히 지나치게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승산은 생겼다.

"잘했다."

인류가 매겨놓은 기준에서 최고점을 받은 초인.

이쪽에도 비대칭 전력이 있는 까닭이다. 로버트에게 한 번 당한 이후, 더욱 발전을 이룬.

또 다른 늙은이.

"이젠 내게 맡기도록."

왕웨이가 나섰다.

< 회장 이현우 (2) > 끝

(94)

작가의 말

성연이가 그 동안 많이 힘들었으니 조금만 더 재워줄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