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장 이현우 (1) >
레베카는 성연을 품에 안은 채 주변을 살폈다. 마운틴이 사라졌지만 전장은 여전히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히려 아까보다 전황이 좋지 않다. 대군주가 덮쳐온 까닭이다. 괴수 군단이 몰려드는 가운데 지금 아군의 가장 큰 전력인 네크로맨서는 사라졌다. 서포터들 몇이 괴수들이 던진 무기에 꿰뚫려 죽었다. 여전히 네크로맨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정신을 완전히 잃은 걸까? 그건 아니었다.
지금 성연은 누구도 보지 못하는 문장을 읽고 있었다. 게임 인터페이스에 가까운 투명한 창에 적힌 문장들.
「놀라운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미증유의 가능성이 개방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끼며, 머나먼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신성'이 개방되었습니다.」
머리를 채우는 충족감이 있었다. 괴수를 사냥하면 으레 지급되는 포인트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채워졌다. 원래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 기관이 깨어난 느낌이다. 흐려져가는 정신 속에서 성연은 자신의 성장을 체감했다. 그러나 지금은 활용할 수 없는 힘이다. 허용치를 넘어선 능력의 사용은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동료들이 비명 지르고 절규하는 가운데 성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까이 접근한 대군주가 뭐라 소리쳤다.
【먹잇감! 먹어치워라! 죽은 것들은 모조리 일어나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성연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그러나 네크로맨서의 전투에 있어서 시야의 제한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네크로맨서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각. 죽은 이들을 장악하고 일으키는 그 일련의 과정을 성연은 느꼈다. 그러니까, 저 대군주란 놈이 감히 자신의 전리품을 가로채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쓰러진 마운틴의 몸에 꾸물거리는 무언가가 기어왔다. 불쾌한 힘이 그 시체를 서서히 삼켰다. 그 절도나 다름없는 행위를 성연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절대로.
"미, 쳤나······."
그 순간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네크로맨서 간의 전투. 쟁탈전이며 점령전이라 불리우는 싸움이다. 두 네크로맨서는 이백 미터 시체를 두고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군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월한 스펙을 가진 네크로맨서는 자신의 패배를 떠올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소유권의 절반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시체의 변이가 시작되었다. 대군주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감히 흉내낼 수조차 없었다. 지나치게 고등의 영역이었다. 세포 단위며, 뼈의 구조, 근육의 짜임새마저 건드리는 그 네크로맨서는 상식을 초월했다. 게임에서 단순히 유닛을 일으키는 과정은 거듭된 학습으로 하여금 무척 심화되어 있었다. 대군주는 저 인간 네크로맨서가 벌이는 일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마운틴의 소유권이 넘어가 있었다. 그때 대지가 뒤흔들렸다. 마침내 주인이 결정되었다.
숨이 끊어졌던 이백 미터 시체는 새로운 주인의 명령을 받들었다.
지상 최강의 괴수.
그러니까, 이제 지상 최강의 언데드가 된 살덩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잇, 먹잇감······.】
그 언데드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을 때.
대군주는 고개를 올려다 봐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의 군주」라 명명된 능력엔 제 휘하의 언데드를 강화하는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백 미터 몸집을 자랑하던 언데드는 거기서 더 크기가 불어났다. 정말 산이 걸어다닌다 해도 믿을 초거대 생물이 탄생했다. 크기 307m의 폭력이 포효했다.
적의 움직임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 얼어붙은 적들을 향해 언데드가 된 마운틴이 전진했다. 땅이 아니라 허공을 딛으며.
주먹 한 번을 휘두르는 행동으로 서른 혹은 마흔의 적이 찢겨죽었다. 그 주먹질에 동반되는 현상들. 폭풍과 지진도 그만큼의 적들을 죽였다. 마운틴의 소유권이 넘어간 순간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병사 대부분을 잃은 대군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죽은 것들을 일으킨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대신 대군주는 기동력을 빼앗겼다. 그러니까, 몸집에 어울리게도 무척 느리게 이동했다. 도망치기엔 부족한 속도로.
썩은내를 풍기는 마운틴은 높게 도약했다. 그러곤 위쪽에서부터 대군주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골통이 부서짐과 동시에 음료수캔을 짓밟듯 녀석이 찌그러졌다. 커다란 몸은 핏물이며 살점으로 화했다. 전장에 침묵이 맴돌았다.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 속에서 삼백 미터를 넘어서는 생물체가 홀로 서 있었다. 마침내 얻어낸 승리였다.
"아······."
"드디어 끝났······."
이 기쁜 상황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이는 없었다. 지나치게 많은 희생이 있었다. 중국의 지도자나 다름없는 인물이 죽었으며, 귀중한 인력인 서포터들과 마법사가 다수 죽었다. 생존자는 총 네 명뿐이었다. 게다가 넷 중 하나, 유성연은 말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레베카는 고요한 전장 속에서 포인트를 투자했다. 그리하여 구매한 회복약을 천천히 성연의 입가에 흘려넣었다.
"빨리 정신차려. 계속 누워있지 말고······."
포인트로 구매한 회복약은 어떤 부상이든 완벽히 치유한다. 하지만 그 치유의 과정에서 정신적인 피로나 뇌에 입은 타격을 회복하기 위해선 수면을 동반한다. 몸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한, 완전 치유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면. 그 수면은 부상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길게 이어진다. 레베카는 성연이 입은 타격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안쪽에 입은 부상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레베카는 이 네크로맨서가 기약 없는 수면에 들어간 것을 보며 제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막연히 어서 일어나길 바라며······.
"거기 둘. 빨리 돌아가. 얘는 내가 챙길게. 어서······."
"아, 예. 알겠습니다."
회복약을 통한 수면은 방해를 받으면 중단된다. 당연히 회복도 함께 중단된다. 레베카는 이 네크로맨서가 입은 상처들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옆에서 지켜줄 요령이었다. 괴수가 얼마나 몰려오든 지킬 자신이 있었다. 반경 41Km에 비하면 아득히 좁은 공간이다. 이 좁은 공간에 내린 평화는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리라. 절대로.
레베카는 잠든 성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기우뚱하게 선 언데드, 이젠 삼백 미터를 넘어서게 된 마운틴을 슬쩍 살폈다.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질거야. 누구도 우리 유성연 못 막을거라고. 빌어먹을 미치광이 슈퍼맨이건, 괴수 군단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긴 수면에서 일어나면 성연은 명백히 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있을 것이다. 원하는 건 뭐든 이룰 수 있는, 절대자에 가까운 존재······.
***
토벌대원 둘은 대한민국 생존자 캠프로 돌아왔다.
그런 뒤, 이현우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 네크로맨서는 과연 소문과 다르지 않았다. 유성연의 활약은 눈부셨고 영웅적이었다. 마침내 마운틴 공략에 성공했으며, 그 과정에서 언데드로 일으키는 것마저 성공했다.
대단한 업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생존자 캠프에서 실력을 키운 서포터들, 중국을 다스리는 위치에 자리했던 강윤식마저도······.
보고를 듣는 이현우의 표정은 다채롭게 변했다.
처음엔 기쁜 표정을 짓다가, 그 다음엔 놀란 표정을 지었고, 마지막으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토벌대원 둘은 정이 많다던 소문이 사실이란 것을 알아챘다.
한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자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이현우는 일부러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다른 둘은 왜 같이 안 왔······."
"유성연 씨, 입은 부상이 꽤 심한 것 같던데요. 회복약 흘려넣었는데 곧바로 잠들어서 레베카, 그분께서 자기가 지킬테니 우리 먼저 가라고 했어요."
"머리쪽 다쳤나보네요. 안 봐도 알 것 같아요. 딱 봐도 능력 무리하게 쓰다가 그렇게 된 듯한데. 그쪽 부상이면 최소 이틀 동안 잠드는 걸로 아는데······레베카님 계시니 그래도 안심이네요."
"예. 안심이죠."
"그럼 두분은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에요? 강윤식 씨 따라서 브라더후드에서 지원 와주신 분들이죠? 중국으로 돌아가실 거에요?"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여기서 돌아가실 거라곤 예상도 못해서······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연락 오는 거 기다려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보수 두둑히 챙겨드릴테니 여기 머무르면서 경계 도와주실래요? 저희가 각성자 한 분 한 분이 소중한 마당이라서요.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럼, 뭐······."
토벌대원 둘은 그 제안에 수긍했다. 보수라고 제시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기도 했고, 이현우라는 인물도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진영에 두 실력자가 합류했다. 가만히 앉은 이현우는 길게 숨을 내쉬며 성연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17시간이 지나고 대한민국에 누군가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기다리던 손님이 아니었다.
로버트 데이비스. 가장 꺼려하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저 새끼가 여기 왜······."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다. 로버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공중에 비행했다. 마치 관광을 하듯, 생존자 캠프를 한바퀴 빙 둘러 바라보았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이현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정보가 벌써 새어나갔나? 마운틴 사냥했다는 걸 벌써 알았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대한민국에 발을 들이지 않던 인물이다. 로버트 데이비스가 갑자기 이곳에 방문한 이유가 뭘까?
심경의 변화로 마운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기에?
아닐 것이다. 한국 출신 네크로맨서가 마침내 그 지상 최강의 괴수를 무릎꿇렸다는 사실을 전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놈을 언데드로 일으켰다는 사실도 함께.
그럼 왜 도망치지 않고 저리 당당히 쳐들어 왔을까?
추측하긴 어렵지 않았다.
로버트는 마운틴 토벌이 무척 험난했단 것을 알고 있는 건 물론이요, 그 과정에서 성연이 많은 걸 얻은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면 누구라도 로버트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건 외통수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한들 사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지금 성연은 산 송장과 같다. 로버트 데이비스가 아니라 어린 아이가 총구를 겨누고 쏴 갈겨도 저항하지 못할 상태. 이현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런 생각을 거치다보니 로버트가 방금 한 행동의 의미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놈은 이 캠프에 유성연이 있는지 살핀 것이다. 여기에 있다면 당장 싹을 잘라내기 위해서.
하지만 로버트는 이 캠프에 그 감방 동기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모든 이동수단을 뛰어넘는 속력으로 날 수 있는 저 슈퍼맨은 대한민국 영토를 죄다 뒤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유성연을 찾아낼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현우는 그 행동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막아야 합니다."
"예?"
"다 불러모아요. 유성연 씨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슈퍼맨이 죽이도록 둘 수 없습니다. 우리 전력 죄다 동원하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로버트 데이비스라 한들, 중국 지원까지 받는 우리 측 군대를 단번에 쓸어버릴 순 없을겁니다."
그리 말한 이현우는 곧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하늘을 나는 로버트 뒤편으로 화려한 무장을 한 무리가 보였다. 진군해오는 것이었다. 주인이 사라진 땅을 삼키고, 훗날의 위험이 될 싹을 자르기 위해서······.
그때 매캐한 담배 연기가 퍼졌다.
"여기서 틀어막지.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도록."
왕웨이의 한 마디를 시작으로 여러 인물들이 비슷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 우렁찬 외침을 들으며 이현우는 문득 예전과 비교하여 자신의 편이 무척이나 많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와는 달랐다.
그러니까, 수술비 몇 푼을 내줄 사람이 없어 범죄에 손을 대야만 했던 그 절망적인 옛날과는 달랐다. 돈을 빌려달라며 눈치를 봐야했던 날들, 교도소에 갇힌 채 할머니의 안부를 물어야 했던 날들, 신고식이라며 두들겨 맞으면서도 애써 밝은 척 웃어야 했던······.
모든 게 달라졌다. 이현우는 이제 명문대에 합격했음에도 중퇴한 인물이 아니요, 겁 많은 사기전과범이 아니다.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도, 닥쳐오는 위기에 힘을 보태줄 사람들도 많다. 그리하여 이현우는 지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현우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래요. 막읍시다! 미치광이 슈퍼맨이건, 협회 각성자 군단이건!"
전의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는 가운데, 여전히 하늘 높이 떠 있는 로버트 데이비스는 그 모습을 훤히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웃음은 기쁨이 담긴 미소가 아니었다. 명백히 비웃는 것이었다. 벌레나 다름없는 하찮은 것들. 노아의 방주에 탈 자격 없는 열등한 것들이 발악하는 모습이 더없이 우스웠던 까닭이다······.
< 회장 이현우 (1) > 끝
(93)
작가의 말
한 화 더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