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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가 너무 강함-86화 (86/111)

< 협회장 로버트 데이비스 (4) >

테이블에 마주앉아 바라본 로버트 데이비스는 성연이 기억하는 것과 다소 달랐다.

타락한 초인, 비틀린 권력자, 미국의 독재자······.

그러한 이미지는 이 꿈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처럼 보였다. 남들보다 큰 체격과 카리스마는 여전했으나, 범접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는 없었다. 와인을 들이킨 로버트는 덤덤하게 말했다.

"순순히 항복할 생각은 없나?"

"······그건 무슨 소린지."

성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곧 로버트가 뒤이어 말했다.

"말 그대로네. 기꺼이 나한테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 없냐는 뜻이야."

"미쳤군. 내가 왜 그럽니까? 당신에 관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당신의 꿈이 신인류, 그러니까 각성자들만의 낙원을 이룩하는 거라는 것. 그 비상식적인 일을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고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나는 당신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비상식적인 일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가? 하긴. 자네가 뭘 이해하겠나? 격변이 일어난 한참 후에야 태어났으며,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던 하층민이 뭘 알겠어······."

"적어도 당신보단 부조리에 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럴리가. 넌 아무것도 몰라. 억울하게 부모를 잃고 그 사실을 묵살당한 것? 우습군. 사회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진짜 끔찍한 일들을 정치적 이유로 눈감아야 하고, 여러 관계에 얽매여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얼마나 괴로운 지 아나? 이제 난 모든 것에 질렸어. 사회구조는 잘못 되었네. 격변이 일어나기 전엔 완벽했겠지. 하지만 집단과 국가를 쳐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진 개인이 등장했는데도 모두가 평등한가? 아니. 초인, 신인류와 구인류는 평등하지 않네. 손짓 한 번에 그들을 무더기로 죽일 수 있는 이들이 왜 그들과 같은 한표를 행사해야 하며, 그 힘을 두려워해서 온갖 법으로 옭아매려는 겁쟁이들을 기꺼이 두어야 하지? 나는 용납할 수 없어······."

성연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성연은 같은 한표니, 힘이니, 신인류니 구인류니하는 이 말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성연이 그리워하며 바라는 것은 오직 과거의 평화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던 순간들.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없었던 나날들······.

누구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랬다. 괴수나 초인 따위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는 건 옳지 않았다. 수천년 이어져 온 인간의 역사에 이 온라인 게임에나 등장할 법한 요소들은 불청객에 가깝다. 사라져야 할 건 그쪽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연은 덤덤히 말했다.

"그따위 것들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똑똑히 말하죠. 나는 이 본 게임의 끝에 닿아 우승하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을 뜯어고칠 겁니다. 어떤 수단이 되었든 이 세상을 과거로 돌려놓을 겁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세상. 초인이나 괴수 따위가 없었던 시대로."

"어리석군. 그게 행복할 것 같은가? 너는 살아보지 않아서 몰라. 직접 살아본 입장으로서 말해주지. 그 시대는 아주 끔찍했어. 정말이지 아주······."

"그 시대가 아니라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게 끔찍한 것 아닙니까? 마침내 소원을 빌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모든 걸 감수했는데 왕으로 군림할 자격은 물론이고, 아무 노력 없이 얻은 초인적인 힘마저 사라지면 사람들이 당신을 괴물 취급할테니까. 그리고 더 이상 슈퍼맨이 아니게 된 늙은이 하나쯤 죽이는 건 분노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쉬울테니까."

"······."

그 말에 로버트는 눈에 띄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항복하게. 자네의 출신은 더럽지만 그 능력만은 높이사고 있어. 그러니까, 소원을 빌 때 자네가 부활할 수 있는 항목도 추가해주지. 새로이 찾아올 낙원에서 자네는 동양인이 아닌 백인이 될 것이요, 더러운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대접받을 수 있는 인물로 만들어주지. 사람들이 우러러 볼 자리도 함께. 다 같이 끔찍한 시대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나? 그 우울하고 낭만 없는 시대가 뭐가 좋다고 되돌리려 하지? 대중은 개떼처럼 몰려들어 누군가를 물어뜯길 즐기고, 서로 속고 속이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할 수 없는 그 시대를 왜 사랑하는건가?"

"적어도 억울한 죽음은 없으니까. 우울하며 낭만 없는 시대? 웃기는군. 역시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하루 아침에 찾아온 재앙이 가족과 이웃들을 앗아가고, 그 억울함을 토해냈음에도 그 살인마가 국가를 지탱하는 초인이라는 이유로 아무 죄도 묻지 않는 비정상적인 시대가 얼마나 토악질 나오는지······."

"말이 안 통하는군."

"말이 안 통하는 건 당신인거 같은데."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아주 팽팽했다.

로버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새로이 찾아올 낙원에 나는 마땅히 신처럼 추앙받을 사람들이 많길 바랬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했지. 신 대접을 받을 인물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우린 꽤 맞지 않는 듯하군. 역시 낙원에 어울리는 인물은 레베카 블런트뿐이야. 나와 그 영국인을 제외하곤 모두 멍청한 것들······이젠 더 볼 것도 없겠군. 유성연. 너는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너 하나만 순순히 죽었으면 네 주변인들과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었을텐데, 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거야. 낙원에 함께 할 기회를 걷어차다니!"

"낙원? 그리 낙원이 좋으면 하고 있는 마약의 양이나 늘리지 그러나? 듣기로 구름 위를 헤엄치는 기분이라던데······어쩌면 그 낙원보다 좋을지도 모르지. 아, 어차피 슈퍼맨은 구름 위를 자유로이 날 수 있나? 그럼 도대체 왜 마약을 하는거지? 난 이해할 수 없군. 고상한 미국인은 원래 마약을 하는 게 상식인지······."

"감, 히 이, 놈이······!"

그 뒷말을 들은 로버트는 눈에 띄게 얼굴이 붉어졌다.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준 모양이다. 성연은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앉은 채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힘이 있다고 누군가를 지배할 자격은 없다. 알겠나? 로버트 데이비스. 세월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 늙어가는 네놈 따위에게 신인류니 낙원을 논할 자격은 없다고. 슈퍼맨? 웃기는군. 나는 머리가 희끗해지고 주름진 슈퍼맨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 말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로버트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포효가 쏟아졌다.

폭음에 가까운 그 외침과 함께 꿈 속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직후, 성연이 눈을 떴다. 잠에서 깬 것이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1시간 50분이 지나있었다.

이제 출발까지 10분이 남았다. 성연은 물을 한 번 들이킨 뒤 캠프로 나갔다.

거기엔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있었다.

등급은 낮지만 첫 공격에 한해 뭐든 방어할 수 있는 안혜지, 레베카, 강윤식, 변수 만들기 용으로 끼워넣은 김윤기까지······.

그 밖에도 여러 인물들이 즐비했다. 든든한 이들이다.

그들을 보며 성연은 다짐했다. 이번 공략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성연은 망가지고 변화한 세상을 하루라도 더 보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온힘을 다해 달려야 할 때이다. 본 게임을 개최한 놈들이 지루하다느니, 빨리 끝나는 걸 원치 않느니 중얼거리며 개수작을 부리기 전에.

이 게임의 끝을 맞이한 뒤, 성연이 저 초월적인 이들에게 빌 소원은 간단하다.

시간을 돌리던가, 세계를 바꾸던가의 거창한 소원이 아니었다. 저 영악한 놈들은 성연이 그리 빌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최측은 성연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을 게임 속 장기말이요, 영화 속 등장인물 따위로 여기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정말 소원으로 뭐든 가리지 않고 이뤄준다면 그 결과는 본 게임을 주최한 이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되리라.

성연의 칼날은 그들을 향할 것이다. 감히 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일종의 유흥 취급하며 인간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들. 다시는 이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짓밟고 죽여버릴 것이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성연? 이제 일어났어? 갑자기 자길래 많이 피곤했나 싶었는데······."

"다들 준비는 다 됐습니까?"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슬슬 출발할 준비하죠. 마운틴 잡으러."

당장의 적은 저 멀리서 여길 내려다보고 있을 놈들이 아니다.

가까이서 커다란 몸뚱이를 웅크린 채 앉아있는 산만한 괴물이지.

***

"로버트,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눈거에요? 갑자기 연결이 끊겨서······."

비서는 로버트의 방으로 힘 없는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안에서 자욱하게 퍼지는 연기에 표정을 찌푸렸다. 지독한 냄새. 더해서 아래에 깔려있는 하얀 가루들······.

전보다 흡입량이 훨씬 늘었다. 안엔 약에 취한 로버트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영웅이라는 단어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추한 모습이다.

몽롱한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제안을······했다······."

"제안이요? 무슨?"

그 말에 로버트는 홀린 사람처럼 정신 세계 안에서 나눈 대화들을 털어놓았다.

그가 뱉은 첫말부터 비서는 경악했다.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항복하라니.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정말 하늘의 계시를 받은 노아요, 선택받은 선지자 정도가 된 줄 아는 미치광이가 아니면 하지 않을 내용의 제안이었다.

비서는 로버트 데이비스란 인물이 옛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정의감과 영웅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 아니었다. 위인전에 기록된 인물들엔 늙은 영웅이 없으며,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들의 주인공 중 노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월은 사람을 망가지게 만들며 늙어가는 과정은 곧 과거 찬란했던 빛을 바래게 만들기 마련이다. 로버트는 그 세월에 휩쓸렸다. 사상은 비틀렸고,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우상화하고 있었다. 세상의 중심이요, 마땅히 인류 위에 군림해야 할 존재로써······.

"로버트, 당신 대체, 무슨······."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나? 당장, 치워. 그 눈빛 치워!"

로버트가 괴성을 질렀다. 그 괴성은 가히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비서의 눈에 더 이상 한때 칭송받았던 미국의 영웅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려 처절히 발악하는 괴물이 있었다. 현대적 병기가 통하지 않는, 비틀린 사상을 가진 늙은 괴물······.

비서는 기겁한 표정으로 도망쳤다. 그때 뻗어진 손이 비서의 손목을 잡았다.

약을 흡입한 상태에서 힘조절은 지나치게 힘들었다. 손목이 통째로 뜯어졌고 비서가 비명을 내질렀다.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비서를 보며 로버트가 멍청하게 웃었다.

그가 흡입한 약은 양은 수 분동안 이성을 완전히 날려버릴 정도로 많았다.

"그래, 건방지게 구는 것보다 그리 울고 있는 게 훨씬 낫군, 이게 더 어울려. 나약한 것들은 마땅히 내 앞에서 이래야지. 뻔뻔하게 굴지말고······."

로버트 데이비스는 성치 않은 정신으로 움직였다. 그 와중에 비명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그리고 그 미국인은 각성 능력이 약기운을 완전히 몰아낸 뒤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술을 연거푸 마신 듯, 중간 기억의 필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린 로버트 데이비스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이 협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비서. 이젠 가족이라 해도 될 정도로 세월을 함께 한 여인은 바닥에 깔린 채 피범벅이 되어 살려달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출혈이 심상치 않았다. 로버트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 숨이 위험할 정도로 가빠졌을 때가 되어서야 포인트로 회복약을 구입해 그녀에게 건넸다.

부상이 심상치 않은 탓에 회복을 위한 수면에 빠진 비서를 바라보며 로버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무슨 짓을······.'

온갖 복잡한 생각이 솟았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죄책감이나 자기 반성 따위로 이어지지 않았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잘못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늙은 미국인은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가장 원망스러운 놈들에게로.

'이게 다 그 네크로맨서 놈 때문이다. 놈이 나를 자극하지 않았다면 스트레스로 인해 이런 일을 벌어지도 않았을 거야. 완벽에 가까운 내 능력이 스트레스로 인해 잠시 오작동한거다. 아니면 뭔가 또 수작을 부렸을 지 모르지. 그래, 왕웨이. 녀석이 또 협회 본부 주변에서 능력을 써서 내 정신에 혼란을 일으켰을지도 몰라. 암, 그렇고 말고. 아랫놈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라고 하는 게 좋겠군. 이런 예절에 어긋난 기습으로 내분을 일으키려 하다니······하기야 놈들에겐 이런 짓이라도 해야 승산이 있을테니까. 다행이군. 하마터면 이 완벽한 능력을 의심할 뻔했어. 한낱 기분 좀 좋아지는 마약 따위 했다고 내 정신이 불안정하게 흔들릴 리가 없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

그 합리화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과거,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 이후부터 로버트가 끊임없이 이어온 버릇. 그 버릇은 이제 스스로 고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요, 지독한 정신적 질환이 되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자가진단하기는 지나치게 어려웠다. 로버트는 바닥에 앉은 채 이상한 말들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 와중, 회복을 위해 잠에 든 비서는 아무 방해 없이 깊게 잠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깊게 잠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옛날의 꿈.

로버트 데이비스라는 미국인을 처음 만난 순간. 미국의 영웅에게 매료되었던 영광스런 과거의 날을······.

< 협회장 로버트 데이비스 (4) > 끝

(86)

작가의 말

다음화로 외전이 올라옵니다.

본편 내용과 크게 연관되지 않는 내용이니, 보지 않으셔도 무관합니다! :)

오늘도 감사합니다. 내일도 연참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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