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회장 로버트 데이비스 (1) >
"한참이나 답이 없군. 늘 그랬듯 중립을 지키겠단건지, 아니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신호인지······."
로버트 데이비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레베카 블런트에게 주었던 시간이 다 되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버트는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내심 후자이길 바라고 있었다.
레베카는 새로이 세워질 신인류의 왕국을 다스릴 충분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S급 각성자들을 통틀어 드물게 책임과 의무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같은 편이 되어준다면 무척이나 든든할 것이다. 게다가, 여신으로 추앙받기에 어울리는 외모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대중에게 호소할 때 아름다운 외모란 일종의 강력한 무기로 손꼽힌다.
고결하며 아름다운 여신.
끔찍한 소아성애자나 전과 기록 있는 한국인, 방관자에 불과한 중국인보다 훨씬 멋진 인물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히어로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의 상징이 되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시간을 더 달라고 하면 얼마든 더 기다려 줄 의향이 있었다.
그땐 왠지 모르게 공격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그것을 꼬집고 온다면 기꺼이 사과할 생각도 있다. 이상하게도 약을 하기 시작한 이후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목을 천조국 깃발에 걸어놓은 일이 그랬다.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했으나, 감히 미국 국민들을 홀리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를 참지 못했다.
대통령의 경호원들은 지나치게 형편없었다. 뱀처럼 정치질을 하고 뻔뻔하게 꼬투리를 잡으며 비난하던 정치인은 최후의 순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외쳤다. 대통령을 죽이는 건 아주 쉬웠다. 그 목은 움켜쥔 순간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졌다. 로버트가 보기에 구인류들은 너무 나약했다. 우월한 신인류가 그들 위에 올라서는 것은 마땅한 일이리라.
로버트는 미국 대통령이 살려달라 울부짖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담배를 물었다. 히어로가 움직이는 것을 감히 법과 경찰을 무시한 폭력이라 말하던 인물이 빌빌기는 모습이란 언제 상상해도 짜릿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머릿속에서 비서의 정신파가 울렸다.
「로버트. 레베카 블런트와 유성연이 접촉했답니다. 아무래도 제안은 거절했고, 그 네크로맨서 쪽에 붙기로 한 게 아닌지······.」
최악의 소식이었다.
시간을 더 달라는 것도, 중립도 아니었다.
결국 그 영국인은 끔찍한 사형수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D급 출신이고, 더러운 네크로맨서이며, 동양인이기까지 한 놈에게······.
달콤하던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전에 말했던 대로 런던을 박살내기 위해 출발하려 할 때, 비서의 정신파가 전해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그때 말했던대로 런던을 불태우겠다."
「레베카 블런트는 자리 잡고 앉으면 S급 각성자들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데 괜찮겠어요? 아무리 로버트, 당신이라도 다칠 지 몰라요. 게다가 거긴 유성연까지 있다고 파악되었는데 혼자 가는 건 위험······.」
"왜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게 많나? 내가 누군지 잊었나? 언제까지 쓸데없는 사족을 붙일거야? 저번에 감히 협회에 테러 벌인 왕웨이, 그 놈도 죽이지 못하게 막지 않았나!"
「그건 혹시나 유성연이 왕웨이의 시체를 확보하면 그 전력이 지나치게 강해진다는 우려가 있어서······이번에도 죽이시는 건 안됩니다. 아시죠?」
"나도 죽일 생각은 없어. 머지않아 찾아올 세상에서 레베카 블런트가 맡아줄 역할들이 아주 많다. 런던을 비롯해 영국 도시들을 인질로 삼아 데려온 뒤 천천히 생각을 고치게 해야지.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협회에 있는 물건들이면 어렵지 않은 일이지. 마법만 못 쓰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에 불과한데······."
로버트는 그리 말하며 감정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러곤 방에 준비된 물건들을 챙겼다. 원래는 쓰지 않으려 했던 장비. 협회가 백 년에 가까운 연구를 통해 각성자들의 힘을 연구하고 그 원리의 일부분을 밝혀내 만든 것들. 각국의 각성자교도소에 지급되는 물건과 비슷한 것, 자세한 기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장비.
혹여나 적의 손에 들어갈 수 있기에 각성자 군단에게도 지급되지 않는.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녹색을 띄는 물건. 사실은 그 연구원들이 슈퍼맨을 약화시키는 '크립토나이트'와 비슷한 기능을 가졌다고 생각하여 녹색으로 만든 물건.
몸 안에 집어넣거나 신체 부위 어딘가에 채우면 초인의 각성 능력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협회 연구원들이 빚어낸 대각성자용 무기.
로버트는 녹색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허리춤에 찼다. 그러곤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목적지는 영국이었다. 영국 런던.
그리고 초고속으로 비행하는 로버트 데이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었다.
협회 본부, 비서실.
정신파를 쏴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는 단순한 각성 능력을 가진 비서.
이 협회에서 로버트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일한 여인은 한참동안 로버트가 떠나간 자리를 보다가, 복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선을 넘지마요. 당신이 인류와 정의의 수호자라는 걸 잊어선 안돼요. 당신은 미국의 영웅이라고요······억울하게 죽었을 생명들을 구하고, 악인들을 심판하는 위대한 히어로······."
그리 되뇌이던 비서는 방 한켠에 올려진 권총을 바라보았다. 방금 로버트가 가지고 나간 것과 똑같은 물건. 쏴 갈기면 상대가 누구든 일반인과 다를 바 없도록 능력을 상실시킬 수 있는 총알이 장전된······슈퍼맨의 크립토나이트가 거기 있었다.
"제발 로버트·····."
***
로버트 데이비스가 영국에 도착하는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슈퍼맨은 현존하는 모든 이동수단보다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건 물론이요, 그 과정에서 휴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덕분이다. 그리하여 무단으로 입국한 미국인은 아주 당당하게 그 안에 침입했다.
네 번째 이벤트가 시작된 여파인지 영국 내부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삐걱이는 가로등이 점멸했다. 그 폐허 속에도 경계를 선 군인들은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걷는 사내를 본 군인들이 총구를 겨누며 뭐라 외쳤다. 영국 특유의 발음으로.
"당신 뭐야? 여기 어떻게······."
그 질문에 로버트는 짧게 답했다.
"레베카 블런트는 어디 있나?"
"묻는 것에나 대답하지, 지금 무슨 딴 소리ㄹ······."
영국 군인은 내뱉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붉게 빛났고 곧 슈퍼맨의 시선에 있던 모든 것이 불타서 사라졌다. 포인트를 무식하게 때려박은 결과, 로버트 데이비스가 쏘아내는 초고열 광선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로버트는 무감정한 눈으로 녹아내린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초인적인 청각이 주변에서 움직이는 적을 감지했다. 숫자는 둘, 성인 남성으로 추정. 로버트는 적을 감지한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 미국인이 적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슈퍼맨은 땅을 박차고 달리지 않으며 물리법칙을 벗어난 어떠한 힘으로 비행하는 까닭이다. 더하여, 그 초인이 움직이는 속력은 음속을 넘어섰다. 신속한 움직임과 함께 과연 두 남성을 바라보았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거창하게 합이 오가고 처절한 발악 따위는 없었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서 적을 보았고, 눈이 붉게 번쩍이는 것으로 적이 섬멸되었다.
직선을 모조리 불태우는 초고열 광선. 저항을 허용치 않는 폭력이 순식간에 수십의 영국 군인들을 죽였다.
그 살육은 비명이나 폭음을 동반하지 않고 고요하게 이루어졌다. 초고열 광선은 모든 것을 녹게 만드는 가운데 피와 살점이 흩날리지도 않았다. 슈퍼맨의 시선이 지나간 곳은 원래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소멸할 뿐이다. 후방에 이 비대칭 전력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알릴수도 없었다. 그곳에 있던 영국 군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했다. 번쩍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나를 우습게 안 대가를 마땅히 치뤄야 할 거다.'
런던을 불태우겠노라던 경고는 정말로 현실에 벌어지고 있었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초인이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직선으로 쏘아지던 초고열 광선이 어딘가를 기점으로 우뚝 멈추었다. 로버트는 그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곧 알아챘다. 평화의 여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초고열 광선도 어엿한 열공격 중 하나이므로, 그녀의 원소 마법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에 속한다. 로버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붉게 물든 눈은 원래의 푸른 눈으로 돌아왔다.
암흑에 숨은 슈퍼맨이 움직였다. 과감하게도 그 대마법사의 41Km 반경 안쪽으로.
레베카의 능력을 훤히 알고 있기에 벌일 수 있는 짓이었다. 협회는 소속된 각성자들의 능력을 자세히 분석하며, 그 결과는 로버트에게 보고된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레베카가 음속을 돌파한 속력으로 비행하는 자신의 위치좌표를 읽어낼 수 없다는 것과, 위치좌표를 모르면 마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 오만한 슈퍼맨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네크로맨서의 생명 반응 감지 능력은 상대가 어떤 속력으로 움직이건 실시간으로 위치를 잡아낸다는 것. 그리고 그 위치 경로를 전해 마법을 행사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
"뭔?"
비행하던 로버트의 팔뚝에서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와 함께 비행속력이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냉기 마법이다. 서리를 내리게 만들며 대상을 얼어붙게 만드는.
로버트는 이 상황에서 그 대마법사가 어찌 자신에게 마법을 행사했는지 의문을 갖지 않았다. 슈퍼맨의 전투 감각은 모든 상황에 영리하게 발동되었고,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엔 복잡한 생각보다 간단한 행동이 낫다고 판단했다.
로버트는 몸을 세차게 흔들어 서리를 털어냈고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으로 날았다. 그 비행에서 발생하는 열이 몸을 덮는 냉기보다 강했다. 그 과정에서 0.02초 쯤 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을 구성해 쏟아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거 참······."
로버트가 레베카를 알듯, 레베카도 미국의 슈퍼맨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어줍잖은 공격은 그 우월한 육체에 타격을 입힐 수 없음을 안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맨몸으로 우주에서 비행할 수 있으며 눈을 뜬 채 불 속을 걸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천재지변을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건 큰 효과가 없다. 레베카가 구성한 마법들은 모두 그의 발을 묶는 종류였다. 영국의 대마법사는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가짓수가 아주 많았고, 마법사는 뛰어난 다수 섬멸 전투력임과 동시에 뛰어난 서포터이기도 했다.
구성된 마법들은 로버트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슈퍼맨이 포인트를 제 능력 강화에 모두 때려박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 - - !"
로버트의 눈에서 초고열 광선이 방출되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광선은 과연 마법사가 만든 현상들을 모조리 소멸시켰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으로 열에 관련된 현상을 쓰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데 어떻게?
답은 간단했다. 로버트 데이비스의 능력 총량이 레베카가 가진 총량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를 뚫고 슈퍼맨은 다시 비행했다.
감히 자신을 무시한 영국인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이 주변에 있다는 한국인 네크로맨서를 찾아서 찢어 죽이기 위하여.
과연 여기까지 찾아온 보람은 있었다. 도착한 런던 외곽에 남녀가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는 레베카, 그 옆에 멀뚱히 선 유성연. 로버트 데이비스는 망설임 없이 날았다.
출력을 억지로 끌어내 다시 초고열 광선을 쏘면 눈치채고 도망칠지도 모르니 확실하게 접근했다. 네크로맨서와 마법사. 이 거리라면 1초 안에 수십 번도 죽일 수 있는 족속들이다.
그리고 거의 코앞까지 다가간 순간이었다.
"······?"
로버트는 그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순간 늙은 몸뚱이가 이상을 일으켰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둘이 사라졌다. 이 괴상한 상황을 목격한 가운데 로버트의 전투 감각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슈퍼맨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그리고 그때 유성연과 레베카가 있던 자리에 다른 것이 출현했다.
괴상하게 뒤얽힌 살덩이. 살아있는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뼈와 살점의 집합체······.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한 외형. 그 한국인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언데드들의 특징이다.
로버트는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땐 이미 늦었다.
코앞에서 폭음이 울렸다. 마운틴의 것과 거의 동일한 수준에 근접한 껍질이 파편으로 뿌려졌다. 슈퍼맨의 몸뚱이에 고스란히.
< 협회장 로버트 데이비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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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