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미 왕 아이작 (2) >
그 과감한 통역에 김성철은 허둥지둥 해명해야했다.
외국어가 서툴렀던 탓에 저 친구가 잘못 이해했던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끼리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건 자연스런 일 아닌가. 나아가서, 원래 당사자가 없으면 사람이 뒤에서 이런 저런 말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횡설수설한 변명을 듣던 성연이 말했다.
"위험한 놈인가?"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인도 애들, 그냥 힘만 세면 귀족처럼 떠받들어주는거."
"미국이랑 친한데, 나 싫어하는 거 아닌가?"
"설마요······."
그런 대화가 오가던 가운데 핫산이 말했다.
"성연? 반갑습니다. 나 핫산. 신께 선택받은 분께 예의 갖춥니다. 그쪽은 브라만들을 무려 둘이나 죽였으니, 당연히 대단한 브라만이시겠······."
핫산은 지나치게 공손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인도는 격변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 인도를 지배하는 건 자신을 간디의 환생이라 칭하는 '마하트마'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독재에 가까운 통치는 인도라는 국가를 심각한 차별이 난무하는 국가로 변화시켰다.
비각성자를 불가촉천민이라 칭하며 각성자들을 계급에 따라서 나누는 새로운 개념의 카스트제가 탄생했고, 세계적으로 큰 논란이 된 바 있었다.
로버트 데이비스와는 찰떡궁합인 사상이었기에 미국과 사이가 무척 좋았다.
게다가, 스스로를 마하트마라 칭하는 그 가짜 간디는 과거 협회에서 아쉽게 'A+'라는 등급을 판정받은 적 있는 초인이었다.
미국과 사이가 좋으며 그 수장이 군대와 맞먹는 괴물이라는 사실은 논란을 금세 사라지게 만들었다. 각성자가 대부분 상류층을 차지하게 된 세상의 분위기가 그랬다.
격변 이전부터 그러한 차별은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성연이 말했다.
"핫산? 듣자하니 여기 왕 죽이러 온 암살자라던데······나는 남미 왕이 죽는 걸 바라지 않는다."
"예? 그럼 성철과는 왜 함께······."
"난 남미 사람들이 억울하게 전멸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깔끔하게 왕의 자리만 넘겨받고 세 번째 이벤트의 우승을 원하지."
"억울한 죽음을 원하지 않는군요. 하지만 이 남미의 왕은 수드라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신께 선택받은 다른 높은 계급들이 수드라 따위에게 명령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게 나을지도······."
"죽으면 끝이지, 다시 태어나기는."
"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영원히 환생을 거듭하기 마련입니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우리에겐 모두 전생이 있어요······."
성연은 인도인들이 믿는 사상 따위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쏘아붙이듯 중얼거렸다.
"전생이고 뭐고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남미 왕한테 항복을 받기 전에 누군가가 그를 죽이길 원하지 않는다. 알겠나? 만약 다른 암살자들과 연락이 가능하다면 이 사실을 널리 전하도록."
그 공격적인 어조에 핫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특이하군요. 하지만 그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제겐 당신보다 마하트마께서 내려주신 명령이 우선이니······."
"그런가?"
"예. 저는 남미 왕을 발견하는 즉시 죽일겁니다. 어떠한 자비도 두지 않고."
"그럼 널 그냥 보낼 수는 없겠군."
"죽이고 싶다면 그리 하십시오. 어차피 암살자들은 많습니다. 게다가, 불가촉천민 출신 중 하나가 운 좋게 이 나라에 들어왔다는 소식도 있더군요. 불평등이니 인권이니 하는 구닥다리 단어들을 지껄이며······."
"불가촉천민? 비각성자?"
그 말에 대신 답한 것은 스티븐 최였다.
"멕시코에서 이번에 새로 일어난 세력입니다. 비각성자 연합이라고, 한국인 이민자 출신이 각성자 두 명 죽이고 나라들 들쑤시며 움직인다 들었어요······."
"비각성자 출신?"
"네. 멕시코 마약상들 몇이 피해를 입었고, 횡포 부리는 각성자들 표적으로 테러 벌이고 있다는데요. 이쪽에 접근했다면 유성연 님도 조심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말에 성연이 답했다.
"그쪽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하루 아침에 얻은 능력으로 들쑤시고 테러 벌이는 건 가능하겠지만······개인이 나라를 위협하는 건 지나치게 어려워."
"그건 맞는 말이죠. 하지만 소문이 꽤 흉흉한 놈들이니까요."
"그래도 어려울 걸. 나 때문에 멕시코 쪽이 엉망되어서 그렇지, 여긴 다를거야."
성연은 과시하진 않지만 자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에 관해선 잘 알았다.
더해서, 일행이던 대마법사와 자신이 죽인 바 있던 두 S급 각성자들의 힘에서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 국가의 전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연 하루 아침에 새로운 능력을 얻은 초인이 그들과 빗댈 수 있는 힘을 가졌을까?
성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작 다섯 명 출현한 초인들은 지나치게 강력하다.
"지금은 놈보다는 남미 왕 죽이러 온 암살자들이 더 위협적이겠군.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아이작을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닭 쫓던 개 되는 꼴이니."
그리 말하며 당당한 표정을 짓는 핫산을 본 성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핫산은 목을 내밀며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도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이 까다로운 적에 속한다. 이상하게 비틀린 힌두교 신앙을 믿는 탓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네들 왕에게 광적인 충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그때였다. 김성철의 핸드폰이 울렸다.
성연이 입을 열었다.
"뭐야?"
"그게, 이 주변에서 아이작 움직임 포착되었답니다. 암살자들끼리는 목적이 같으니까 연락망 만들어서 그놈 위치 공유하거든요. 누가 죽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인 까닭에 협력하고 있어요."
"이 주변이라고?"
"예······."
핫산의 주머니가 진동함으로써 그 사실은 증명되었다. 목을 내밀고 있던 인도인은 연락을 받은 즉시 땅을 박차고 그 방향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 과정에서 암살에 특화된 각성 능력을 사용했다. 몸의 기척을 숨기고 스포츠카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강화계 능력. 물론 핫산은 S급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기에, 소리보다 빠를 순 없었다.
주변에서 울려퍼지던 잡음이 땅과 벽에 퉁기며 쏘아졌다. 김유현 언데드는 그 음파를 강력한 충격파로 변환해 핫산의 몸을 두드렸다. 전차도 일순간에 으깨버릴 수 있는 무형의 폭발이 발생했다.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그 습격에 인도의 암살자는 공중에서 풍선처럼 터져서 죽었다. 핏물이 되어버린 핫산을 보며 김성철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죽이는 걸 업으로 삼는 인물들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어렴풋이 남은 성연의 감정은 악인을 상대로는 솟지 않는다. 덤덤한 목소리로 김성철에게 말했다.
"어딘지 안내해."
김성철은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앞장섰다. 장소가 가까워지자 요란한 소음들이 들렸다. 총성과 비명들, 전투가 만드는 소리들이다. 성연은 아이작과 암살자 무리가 교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땐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투의 소음엔 누군가가 격렬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끼어있었다. 폭음들 사이에서 들리는 외침, 익숙한 언어.
한국어가 들렸다.
***
세 번째 이벤트의 왕이라는 자리에 앉기 전부터 남미 뒷세계의 왕처럼 군림하던 아이작은 할 일이 많았다. 세상이 난장판이 되며 마약의 수요가 급증했기에 더 그랬다. 아이작은 닥쳐오는 위기에도 당장 챙길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옛날부터 마약 관련해선 엄중히 처벌하던 중국에서까지도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다. 돈이 된다는 상품이라는 냄새를 맡은 브라더후드의 수장이 손벌려 도와주는 가운데 마약은 전세계적으로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고 있었다. 법과 도덕이 사라진 세상에서 과연 불법적인 일의 전문가들은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아이작은 꾸준히 자리를 옮기면서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옛날부터 고객 관리는 꼭 자신이 직접 해오던 신념을 지키기 위함이다. 잔챙이들은 몰라도, 중요 고객들은 남에게 맡길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 다가와서 속삭였다.
"서쪽이 뚫렸답니다. 안 그래도 그 네크로맨서 상대하느라 전력 모은 타이밍이라 막지 못한 것 같은데······."
"신원 파악은?"
"예. 멕시코로 이주한 한국인 이민자인데. 최근 들어 말 많은 놈입니다. 비각성자 출신인데 세 번째 이벤트에서 각성자 둘 죽이고 초인 됐답니다. 영웅이라도 되는 양 비각성자들 끌고 다니면서 개짓거리하는 중이라고······."
그 말에 아이작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비각성자 출신? 이제 별 병신 같은 놈까지······살아남는 것도 급급한 녀석들 아닌가? 능력은 물론 총도 제대로 못 쓸 게 분명한······."
"한국은 옛날부터 국민 전체가 군훈련 받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아마 총기는 잘 다룰 것으로 예상······."
"그래봤자 2년 남짓한 훈련 아닌가? 그 정도로 우리랑 상대가 되겠나? 그 네크로맨서라면 모를까, 이상한 신념 가지고 난리법석인 놈들까지 신경을 써야하나?"
아이작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가라는 집단의 힘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한 국가와 맞먹는 S급 헌터 둘을 살해한 전적이 있는 괴물 같은 네크로맨서라면 모를까. 아이작은 그 비각성자 출신 초인 따위가 비대칭 전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인물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난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작 다섯 명 출현한 것이 전부였다.
아이작이 말했다.
"마약에 목마른 비각성자 몇 추려서 나한테 넘기도록. 급격히 세력 불린 놈이면 정신 세뇌 계통 능력일텐데 전에 증명되지 않았나? 그 방면 능력보다 왕이 내린 '절대적 명령'이 더 우선 순위에 있다는 거. 불쌍한 놈들로 동정심 유발해서 침투시킨 뒤 자살테러 시키거나, 내분 일으키면 쉽겠군."
아이작은 뒷세계의 보스로 군림하며 여러 차례 위기를 이겨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제일 잘 나가는 약, 그놈이나 그놈 주변 사람한테 맛보게 만들어. 원래 우울감에 찌들었다가 뭐라도 된 줄 아는 놈들이 더 빠르게 무너지기 마련이니. 황홀감 한 번 느끼면 절대로 끊지 못할거다. 그놈이 거부해도 주변에 하나쯤은 모자란 놈이 있을거야. 원래 이상한 신념 가진 놈들이 가차없이 행동 못하니까, 모자란 놈이 약쟁이로 변해도 바로 잘라내지 못할 것이 분명해.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나약해 빠져서 그런건지······늘 뭐라 씨부리면서 설득하려고 들더라고. 허튼 짓 못하게 당장 쏴 죽여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사내는 아이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각성자 노예 새끼들이 해방 운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까부는 거 저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
이경민은 멕시코에서부터 억울한 사정을 가진 이들, 나름의 각오를 가진 이들을 모아 집단을 구성했다. 비각성자 연합이라 명명된 그 단체는 인권을 되찾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물론 사람들은 그 거창한 목적에 매료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오면 노예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더하여 이경민의 말에 담긴 '언령'의 힘이 작용하여 자기도 모르게 이끌린 것이었다.
비인간적으로 굴며 약자들을 차별하는 이들을 심판하는 일을 하던 이 집단의 목적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경민은 이제 자신이 새로 얻은 힘이라면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 아침에 초인이 된 청년은 언령이라는 지나치게 강력한 힘이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 한 마디에 천둥 번개가 치고, 사람들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지 않는가. 비각성자로 이십 년 넘게 살아온 이경민이 보기에 이 능력은 치트키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각오를 다지며 말솜씨도 늘었는지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면 엄청난 감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민은 그 공감이 언령의 힘이 작용한 덕분이란 걸 몰랐다.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
국경을 뚫고 들어와 길을 거닐던 이경민의 목적은 무척 거창했다. 남미를 지배하는 왕을 찾아서 언령을 써 권력을 넘겨받고 살기 좋은 나라로 바꾸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방식으로 항복시키는 게 가능한 지 아직 증명된 바 없지만, 이경민은 자기 능력에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선택받은 힘이 아니던가.
"왕을 잡으시겠다고요······."
"예. 그것만이 가장 빠르게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할 수 있는 방법 아닙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 악명 높은 남미 군들도 언령에 꼼짝없이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 무시무시하다는 남미의 왕도 이 힘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꽁꽁 숨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그 왕을 찾아낼 방법은 이미 찾아두었다.
내뱉는 언어를 현실에 불러일으키는 언령의 힘은 정말이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몸을 숨긴 인물의 위치를 찾아내는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이경민은 아이작의 위치를 안내해주는 화살표를 쭈욱 따라갔다. 이대로 따라붙어서 아이작의 정신을 지배하고 항복을 선언하게 한다. 그걸로 목적은 달성이다.
그 계획은 실패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제외하고도 여기 각성자가 서른 명이 넘었다. 자신과 비슷한 행보를 걸으며 각성자들을 살해하여 초인이 된 이들이다.
"자, 거의 다 왔습니다. 시선만 끌어주시면 제가 다 제압할게요······."
무리는 골목을 돌아 은밀하게 접근했다. 과연 이번에도 언령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장을 차려 입은 남미의 왕은 한 여자의 턱을 붙들고 있었다. 이경민은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조금 접근해, 뭐라 중얼거리는 그 대화를 듣고자 했다.
"한국인 이민자, 지가 뭐라도 되는 양 까부는 놈 찾으면 일행에 끼워달라고 해라. 할 수 있으면 녀석이나 녀석 주변인한테 약 권하고······거절하면 알지? 노골적으로 무시하진 말고 은근히 쫄보를 보듯 깔보는거야. 영웅이라도 된 줄 알고 날뛰는 녀석 자존심을 건드리라고. 원래 그런 덜 떨어진 놈들이 여자한테 은근히 무시받는 것에 예민하거든······."
그 나지막한 읊조림을 들은 이경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국인 이민자란 말은 명백히 그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아이작은 지금 이경민을 무너뜨릴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추잡하고 더러운 방식으로.
이경민은 더럽기 그지 없는 방식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 저리 접근해왔다면 과연 자존심에 상처 입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을 지 떠올렸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솟았다.
"저······씹······여러분, 지금입니다. 시선만······."
화를 최대한 억누르며 이경민이 중얼거렸다. 거물을 잡는다는 두려움에 떠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언령이 작용한 덕분이다. 눈에 초점이 없는 사람들이 과감하게 접근했다. 그 직후 총성이 울렸다. 시선을 끌기 위해 움직였던 이의 머리가 날아갔다.
"뭔······."
상식을 벗어난 각도였다. 총알은 곡선으로 휘어지듯 날아왔다.
그 뒤로 사격이 몇 번 더 이어졌다. 한 번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 명중했다.
이경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총, 내려놔, 모두!"
커다란 외침에 실린 언령은 곧 실현되었다. 아이작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제 의지에 상관없이 총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경민은 곧 명령을 잘못 내렸음을 깨달았다. 모두 총을 내려놓는다면 아군도 무기를 잃게 되는 셈이다. 실수였다.
초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은 아직 제 능력을 완전히 활용할 줄 몰랐다.
아이작의 주변에 머무르던 이들이 땅을 박찼다. 절대적 명령을 통해 소집된 각성자 무리는 누군가를 지키는 일에 한정해선 협회의 각성자 군단에도 뒤지지 않는다.
격변 이후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바 있는 이 전투의 베테랑들은 정신계 능력자를 상대하는 방법에 관해서 잘 알았다. 그들의 대부분이 어떤 조건이 발동되어야만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눈을 마주치거나, 손을 맞잡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방금 상황에서 저 한국인 이민자는 목소리를 뱉는 것으로 행동을 제약했다. 그렇다면 단어를 뱉는 것이 곧 조건이리라.
"다 땅에 무릎 꿇고 움직이지 말······!"
이 초인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문장 하나를 만들어내는 시간보다 훨씬 신속했다. 언령 외에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이경민이 보기에, 저들의 움직임은 흐릿한 형체 따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싸워본 적은 없었다.
정체를 숨긴 채 언령으로 정신을 통제하거나, 방심하고 있을 때 자연 현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만 싸워왔다. 정면에서 초인들과 맞붙어 본 적은 아직······.
그때였다. 땅 아래에서 무언가 솟아났다. 나무 뿌리와 비슷한, 구불거리고 굵은 줄기다.
솟아난 줄기는 달려들던 사내의 가슴을 일순간에 꿰뚫었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인물은 그대로 죽었다. 옆에서 함께 달려들던 초인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살아남진 못했다.
꺾어서 후퇴한 자리에서 가시가 솟았다. 공중에서 착지하려던 사내는 뒤통수가 꿰뚫린 채 꿰여죽었다. 순식간에 두 초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경민은 멍한 얼굴로 그 죽음을 보았다.
그때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경민이 뒤돌아 보려던 가운데 싸늘한 경고가 들려왔다.
"눈 돌리지 말고. 두 손으로 입 틀어막은 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말 것."
"······."
"언령 능력? 활용도 높은 능력인데 하나도 써 먹을 줄 모르는군. 대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도 모르겠······."
혀를 차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사하는 언어로 하여금 그 인물이 한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경민은 뒤에서 들려온대로 입을 틀어막은 뒤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곧 일어난 현상으로, 뒤에 등장한 인물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널브러진 시체들이 꿈틀대며 땅을 짚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힘. 네크로맨서. 한국인.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진 인물은 한 명밖에 없다.
유성연.
"혹시라도 어, 아 하는 소리라도 내면 곧바로 목을 날려버릴테니 주의하도록."
그 말이 떨어진 즉시 이경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위압감에 짓눌려서? 아니었다.
이경민은 멕시코로 이주한 한국인 이민자였고 유성연은 얼마 전 멕시코 왕에게 직접 항복을 받아 그곳의 왕이 된 바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명령은 왕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 명령'이 되어 이경민을 옥죄었다. 성연은 얼어붙은 이경민을 흘긋 보곤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끈질긴 추격 끝에 마침내 다시 마주하게 된 남미의 왕을 향해서.
< 남미 왕 아이작 (2) > 끝
(67)
작가의 말
오늘 한편 더 올라옵니다!
앞으로 연참을 꽤 많이 하게 될 거 같습니다.
비축분을 좀 풀 생각입니다. 정말이지 아주 많이 풀 생각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