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동대장 에릭 스미스 (2) >
"그게,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잠깐만······."
에릭 스미스는 겁에 질린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협회에서 충분한 돈을 챙겨주면 집행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세력에게서 보호까지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말. 처음엔 팔벌려 환영했던 이들도 요구하는 자금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자 꺼려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여기서 거래를 잘 따내야 한다는 각오나 협회와의 뒷거래 관련 내용은 중요 기밀이라는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지나치게 강력하며 감정이 결여된 네크로맨서의 등장에 에릭 스미스는 살아남는 것만을 원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협회와 마피아, 카르텔들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마친 가운데 저택 거실엔 침묵이 가라앉았다.
불편한 침묵이었다. 그 고요 속에서 에릭 스미스의 일행으로 따라온 총 든 사내들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성연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쏟아진 한국어에 에릭 스미스는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눈에 거슬렸으니 죽여서 언데드 재료로 쓸 지 모른다, 산채로 해부해서 실험 따위를 할 지 모른다와 같은 상상들.
다행히도 스티븐 최가 통역해 온 말엔 그런 끔찍한 내용들이 담겨 있지 않았다.
"협회와 뒷거래를 했다는 증거 갖고 있나?"
"있습니다! 장부도 있고, 문자나 통화 기록도 분명히······."
"어디에?"
"저희 왕께서 보관하고 계실겁니다. 거래 할 때마다 상대 약점 될 만한 것들, 전부 금고에 넣어두시는 분이라······."
"금고라······."
그리 되뇌이던 성연은 곧 허공에 대고 손짓했다. 에릭 스미스를 옥죄고 있던 언데드가 곧 물러났다. 꿈틀대는 감촉이 사라졌음에 에릭 스미스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말했다. 정말이지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과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 왜 내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예?"
에릭 스미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성연이 다시 말했다.
"질문 몇 번 한 것으로 여기서 보내줄 줄 알았나? 아니면 보상으로 마약 다섯 배 쥐여줘서 배웅이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했나?"
"보, 보상은 필요없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평생토록 감사를······."
"에릭 스미스, 그쪽 왕의 행동대장이라며. 내부에선 꽤 힘 있는 편일거고 아는 사람도 많겠지? 아마 나름 다져놓은 세력 있을텐데. 걔네들 이용해서 왕이 보관하고 있다는 증거들 빼내올 수 있나? 다른 것들은 필요없고 협회 측과 거래한 기록 하나면 충분한데. 어때, 가능하겠나? 그럼 기꺼이 목숨 살려주도록 하지."
"그게, 사실 예전에 비슷한 의뢰 받은 적 있습니다."
"비슷한 의뢰?"
"예. 자기네들 약점 좀 지워주는 조건으로 두둑하게 보수 준다고 했었는데. 실패했어요. 왕께서 선출되시자마자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 '배신하지 말 것'과 '금고 주변 20m로 접근하지 말 것'입니다······."
"철저하군."
성연이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 복종시키고 권력 놀이하던 멕시코 카르텔 출신과는 달랐다.
그리고 에릭 스미스가 뒤이어 한 말은 그 인물이 철저한 사람임을 보충 설명했다.
"게다가 네크로맨서 님께서 직접 가시는 것도 힘들겁니다.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는 상처입힐 수 없으니 안심하시지만, 진영에 소속 안 된 외국인들은 암살 시도 할 수 있다고 지나치게 경계 하시거든요. 그쪽은 입국도 불가능하고 몰래 들어왔다가 걸리면 바로 즉결 처분입니다. 아무리 센 초인이라도 일단 거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위장 신분 같은 건 못 만드나? 행동대장이라면서?"
"입국 심사 때문에 안됩니다. 출입국 심사관이 칼 들고 목에 냅다 찔러요. 그래서 상처 입으면 외국인인거고, 멀쩡하면 같은 진영 소속이니까 들여 보내는 방식이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던 레베카가 말했다.
"겁쟁이네. 왕이라는 놈이 무슨."
"자기 죽으면 국민들 싹 다 전멸이니 그럴 수 있지."
"그건 뭐······."
그 말에 레바카가 끝말을 흐렸다. 성연은 고개를 돌린 채 에릭 스미스에게 말했다.
"그 남미쪽 대부분 꽉 잡고 있다는 왕, 지금 어떤 국가에 머무르고 있나?"
"예? 글쎄요. 연락 넣어봐야 알겠지만 보통은 늘 같은 곳에······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왕께서 머무시는 곳과 금고 위치는 꽤 먼데요. 협회 쪽 약점 잡으실 생각으로 가시는거면 왕 찾아가는 건 시간만 버리는 일······차라리 정보 원하시면 금고 쪽 가서 훔쳐오시는 게 훨씬 효율 좋을텐데요······."
"사족 붙이지 말고 위치나 정확히 말하도록."
약간 서늘함이 맴도는 말에 에릭 스미스는 다시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왕 위치는 왜? 협회 약점 잡을 용도면 쟤 말대로 하는 게 낫지 않나?"
성연은 간단하게 답했다.
"세 번째 이벤트 우승하려면 진영에 소속된 국민들 숫자 전체 1등이던가, 점령한 국가 숫자 가장 많아야 하는데 인구수로 중국이나 인도 이기는 건 무리고······걔네가 3주 내내 버티면 답이 없으니 최대한 많은 나라들 먹어둬야지. 그런데 가까운 곳에 슈퍼맨 약점도 갖고 있고, 여러 나라들 통합해서 점령해 둔 놈이 있으면 완전 일석이조잖아. 어차피 항복 받아내면 모아둔 증거들도 내 소유 될테니 녀석부터 치는 게 낫지."
"아······."
통역을 전해받은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성연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어디?"
"어······그······."
막상 자기 왕의 거처가 어딘지 말하려니 망설여 졌는지, 잠시 주저하던 에릭 스미스는 곧 바닥에서 언데드 세 마리가 꾸물대는 모습을 보곤 곧장 정확한 위치를 실토했다.
눈치를 살피던 에릭의 일행도 혹시나 화살이 자신들에게 향할까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이십 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한 이들은 결국 왕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자처하기까지 했다.
이들의 눈에 성연은 정말 마왕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까닭이다.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언데드 군단을 부리는 것은 물론이요,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눈에 몇 마디 말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마법사를 입 다물게 만드는 모습이란 감히 수작을 부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이 두려운 네크로맨서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꼬리를 내린 가운데 성연이 레베카에게 슬쩍 물었다.
"불편하면 저쪽으로 갈 때 빠져도 상관없어. 안 좋게 헤어진 전남친이랑 여행길 떠나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
그 말을 들은 스티븐 최는 이 직설적인 문장을 어찌 순화시켜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그대로 직역해 통역했다. 레베카는 곧장 울컥해서 소리쳤다.
"전남친 아니라니까? 내 말 좀 똑바로 들어!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성연은 그 늘어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스티븐 최는 이 억울한 표정을 지은 영국인에게 붙잡혀 몇 시간이나 연인이 아니었다는 해명을 듣고, 간략하게 정리해서 성연에게 한국어로 전달해야만 했다.
성연은 별 반응도 없이 그렇느냐고 고개만 끄덕였으므로 노력한 보람도 없었다.
***
멕시코를 떠나기 전 성연은 왕이 갖는 절대적인 명령을 내려 몇 가지 규칙을 내렸다.
일단 아이들에게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하지 말 것.
세상이 격변이 벌어진 가운데 남자보다 여자를 우선 챙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성연은 거리에서 아이들이 고통받고 강요에 의해 마약에 중독되어 노예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기껍게 보지 않았다.
마약을 유통하는 것 자체는 막지 않았으나 학교에나 다닐 법한 아이들이 몸에 주사기를 꽂고 헤롱거리며 걷는 모습은 이제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뒤로 전대의 왕이 모아둔 식량을 풀어서 나누어 주라거나, 정도를 넘어선 심각한 범죄 따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새로이 왕으로 부임한 네크로맨서가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게 되었다. 광기에 가까운 칭송이 쏟아졌고, 성연은 그 환호를 뒤로 한 채 멕시코를 떠났다.
"군 - 주!"
"위대한 네크로맨서!"
괴기한 언데드 군단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열광했다.
순식간에 달라진 거리의 모습들과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하며 스티븐 최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프리카에서도 느꼈지만, 짧은 시간만에 이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만약 이 본 게임이 종결된 뒤 괴수들이 사라지고 다시 인류에게 법과 도덕이 세워진다 한들, 전과 같은 풍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스티븐 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쌓아올린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일으키기 위해선 아득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낸 것은 일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만에 붕괴했다. 과거의 따분하고 평화로웠던 순간들은 이제 정말이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대학 동기들, 고향 친구들이나 가족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날들.
늦잠을 자서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물고 급히 택시를 잡던 순간. 택시 안에서 연예인 스캔들 기사나 유익한 내용 없는 뉴튜브 영상을 보며 낄낄대던······.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는 되찾을 수 없게 된 소중한 순간들.
"멕시코에 구원을 내려주셨다!"
스티븐 최는 멀어지는 멕시코인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고 사십 분이 지났다. 더 이상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무너져 내린 폐건물들과 그 틈새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
웅크린 채 무언가를 으적거리는 괴수들이 보였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 절망스런 광경에 저 네크로맨서는 놀라우리만치 덤덤하다.
그 전진에 언데드 군단이 뒤따랐다. 이십 미터 살덩이들이 뒤얽혀 서로를 짓밟고 부수며, 살점과 핏물들이 전장에 흩뿌려졌다. 피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피웅덩이를 밟으며 네크로맨서는 성큼 걸었다. 에릭 스미스의 안내를 따라서 남부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왕에게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
과연 왕이 머무르고 있는 국가의 경계는 지나칠 정도로 삼엄했다.
에릭 스미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임국 심사관들은 칼날을 목에 들이대는 것으로 통과를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줄지어 서 있던 인물들 중 몇이 이탈했다.
편법을 떠올리고 왔으나 막상 눈 앞에서 그 살벌한 모습을 보자 도망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이들은 주변에 상주하고 있는 저격수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만약 같은 진영의 인물이었다면 탄환에도 상처 입지 않았을테니, 뭔가 불경한 계획을 짜고 여기 접근한 존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유능한 임국 심사관들도 이 국가를 완벽하게 경계하진 못했다.
국가의 영토 하나를 완벽에 가깝게 수호할 수 있는 인물은 세상에 딱 다섯 뿐이다. 이젠 세 명밖에 남지 않은 S급 각성자들, 인류가 매겨놓은 기준에서 최고점을 받은 존재들만이 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이들은 그 최강자들의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지 못했다.
성연은 임국 심사관들과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다 숨지도 않고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거기로 전진했다. '어어'거리던 이들이 총구를 겨누며 뭐라 소리쳤다.
통역을 들을 필요도 없이 위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상관하지 않고 전진하는 성연을 보며 그들은 기꺼이 방아쇠를 당겼다.
"쏴 -!"
포인트로 구입한 강화 총기들의 탄환 세례는 과연 언데드들의 껍질도 꿰뚫었다. 그러나 새겨진 상처는 1초도 안 되어 모조리 회복되었다. 무한히 재생하는 언데드들이 전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의 탄환이 먼저 소진되었다.
"뭔······."
줄지어 서 있던 이들마저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사격이 몇 번 더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위협이나 사격이 끝나고, 안쪽에서 한 인물이 급하게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의 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임을 눈치챈 것이다.
"여긴 왕께서 머무시는 도시입니다! 외부에서 오신 손님이라면 신원을 밝히고 천천히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이건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
그 말을 통역받은 성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스티븐 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저들에게 전했다.
"항복하라! 항복만 하면 불필요한 희생은 없을 것이다. 멕시코의 사례처럼 권한만 넘겨받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왕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한다······."
터무니 없는 말이었다.
이 초월적인 언데드들을 보고서도 개인이 국가를 상대할 수 없다는 상식을 굳게 믿고 있는 임국 심사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언데드들의 뒤에서, 익숙한 얼굴을 한 좀비 둘이 걸어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과거 S급 각성자로 유명하던 동양인들을 알아본 임국 심사관들 중 몇이 기겁한 표정으로 뒤돌아 달렸다. 그러곤 각자 휴대전화를 든 채 뭐라 소리쳤다.
성연은 그들이 연락을 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뒤, 임국 심사관 중 하나가 걸어왔다. 아까보다 훨씬 예의 바르고 공손한 자세였다. 그가 말했다.
"네크로맨서 유성연 님 맞으시지요? 왕께 연락을 보냈는데 누구라도 이 나라에 입국하는 건 불가하다고 하십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뭔가 준비했을텐데, 난데없이 찾아오셔 곤란하다고······."
"그쪽에서도 멕시코에 연락 없이 들어오지 않았나?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입국이 곤란하면 왕이 직접 나오라 전하도록. 남부는 전쟁을 피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었나? 나도 동의한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면 그쪽 나라 국민들 50%를 죽여서 점령할테니 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라고 말하도록."
그제서야 입국 심사관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개인이 국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상대하는 것을 넘어서 처참히 짓밟을 수 있을만한 무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얼굴이면서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왕께서 그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이번에도 평화적으로 진행할 거라는 확신도 할 수 없고, 그런 식으로 항복을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개인이라도 국가를 상대로 그따위 소리를 할 순 없다고······."
맞는 말이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연은 만약 이 상황에 사기범 감방 동기가 있었더라면 일을 더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모습은 물론, 신체 정보를 완벽에 가깝게 복사하며 언변도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그 인물이라면 분명 이런 상황에서 크게 활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이현우는 없다.
그때, 입국 심사관이 뒤이어 말했다.
"멕시코가 보상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더해서,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기꺼이 내어주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강력한 네크로맨서와 전쟁하길 원하지 않으며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하신다고······."
그 말은 곧 남부의 왕이라 불리는 인물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부류라는 것을 증명했다.
권력에 물들어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지금 주어진 것에 충분히 만족하는 인물.
소원을 넘보지도 않고 대단한 부귀영화를 원하지도 않으며 변화가 아니라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기만을 바라는 안전을 추구하는 조심성 많은 왕.
전쟁의 명분을 끌어내기도 힘들고,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죽어도 뱉지 않을 인간상이다.
세 번째 이벤트의 우승을 위해서 점령을 해야만 하는 성연의 입장에선 만나고 싶지 않은 적이었다.
레베카가 성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차라리 협회 쪽 정보 달라고 요청하면 기꺼이 줄 것 같은데 그거라도 받고 만족해야 하나? 너 왕 죽이고 국민들 싸그리 전멸시키는 건 원하지 않잖아. 절대로."
"······."
"딱 봐도 이 상황 쭉 유지하길 바라는 것들이잖아. 멕시코 카르텔처럼 왕좌에 앉았다는 마음에 들떠서 날뛰다가 고꾸라질 놈으로는 안 보인다고. 어떡할거야? 솔직히 나도 여기 살아가는 사람들 모조리 죽어서 널브러진 모습 보는 거 원하진 않는데······."
글쎄, 어떻게 해야할까.
성연은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겁에 질려 틀어박힌 왕을 밖으로 끌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찾아가서 죽이면 소속된 진영의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다. 단순히 수십 죽는 게 아니라, 만 단위를 넘어서는 사람들이 일순간에.
그리 고민하던 와중 스티븐 최가 성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그는 스마트폰을 한 손에 쥔 채 그 화면을 가리켜 보여주고 있었다.
충격적이기 그지 없는 기사를.
"이거······."
그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격변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다툼이 빈번했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벤트에 이르러 결국 큰 사단이 벌어졌다.
이스라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 사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 번째 이벤트의 내용에 공지되어 있던 '왕이 죽으면 해당 진영의 모든 인물들이 사망한다'라는 문장이 거짓이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과연 그 내용대로 이스라엘에 살아남은 인물은 없었다. 모든 게 정지한 가운데 도시는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잠에 취한 듯 널브러진 이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몇 장 첨부된 사진들은 곧 한 나라가 너무나도 간단히 멸망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충격은 그 기사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협회에서 공식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죄 없는 많은 이들을 죽인 이란을 심판할 것이며, 조만간 항복 의사를 보이지 않는 한 지나치게 위험한 집단인 이란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협상은 없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슈퍼맨이 직접 나설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 나라의 멸망은 곧 신호탄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모두가 확신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이벤트가 끝나면 결국 인류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 것이다. 분명히.
그 기사를 한참 바라보던 성연은 곧 다시 몸을 돌렸다.
임국 심사관은 물러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성연이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항복 뿐이다. 끝내 안된다면 전쟁을 해서라도 받아낼 것이다.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는다면······그땐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나도 모르겠군."
그 말은 최종 선언에 가까웠다.
스티븐 최에게 통역을 전해받은 임국 심사관은 다시금 통화를 길게 이어갔고, 이번엔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계속해서 끈질긴 주장을 한 덕인지 아니면 한순간에 나라가 몰락케 된 이스라엘에 대한 소식을 전해받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입국 심사관이 무겁게 입을 뗐다.
"한 번 자리를 마련하겠다 하십니다. 대화 나눌 자리······."
< 행동대장 에릭 스미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