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동대장 에릭 스미스 (1) >
성연은 세 번째 이벤트에서 우승하려면 좀 더 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군단을 일으키는 능력은 국가를 상대할만큼 강력해졌지만, 점령을 더 빠르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3주만에 중국과 미국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의문의 각성자가 협회 본부 습격을 멈추고 그 슈퍼맨이 움직이게 된다면 더더욱.
그래서 모아두었던 포인트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능력 총량은 진화를 거치며 지나칠 정도로 충분해 졌으므로, 상세 능력 강화 부문을 투자하며 변수를 만드는 방향으로.
그리하여 성연은 「융합과 분해 심화 부문」을 선택했다. 새로이 테크 트리를 개방한 뒤 전장에 나섰고, 가장 먼저 전투의 양상이 변화했음을 깨달은 건 일행들이었다. 스티븐 최는 고작 한 가지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이토록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알기로, 포인트 강화나 상세 능력 강화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1단계나 2단계를 쌓았을 때나 그렇지, 그 단계가 오를수록 성장은 미미했다. 그런데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렇지 않았다.
성연이 눈으로 전장을 훑으며 언데드들을 통제했다. 몇 가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그 언데드들은 적에 맞추어 변이했다. 그 변이는 전보다 훨씬 다양한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힘차게 달리던 언데드의 하반신이 뒤틀렸다. 허벅지가 팽창하며 그 하반신은 말의 것처럼 바뀌었다. 그 속도가 순식간에 치솟았다. 포효하며 달리던 언데드가 제 팔을 떼어냈다.
몸에서 떨어진 팔이 곧 무기의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끝이 날카롭고 기다란 창으로.
고질라들은 이제 일종의 기마병처럼 싸웠다. 그리고 평범하게 땅 위를 걷는 병사와 기마병 간에는 엄청난 전력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언데드 기마병들은 그야말로 일대의 괴수들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죽음의 군주 능력이 전하는 강화 능력. 검은 기운을 머금은 기마병들이 내찌르는 창은 고질라들의 껍질은 물론이요, 내부 장기까지 일순간에 관통했다.
"워 - 어어어어어 -!"
두 번째 이벤트의 우승과 함께 얻은 아이템, 이클립스는 언데드 군단에게 낮은 지능까지 선사해주었다. 그 결과 이제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움직이게 된 군단은 불도저처럼 괴수들을 밀어버렸다. 우렁찬 포효에 괴수들의 비명이 섞였다. 기다란 창이 놈들의 머리를 꿰뚫으면, 꿈틀대던 고질라들은 곧 새로운 기마병이 되었다. 몇몇 괴수들이 운 좋게 포위망을 뚫더라도 네크로맨서에게 상처 입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위협에 대비하여 반응하는 배리어는 물론이요, 옆에 딱 달라붙어 생글거리는 평화의 여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강력한 힘을 머금은 주먹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근육과 뼈마디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머리통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두개골 안쪽이 까맣게 달궈진 놈은 뒤로 넘어가며 즉사했다. 이 과정에서 스티븐 최가 할만한 일은 없었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헌터냐. 이제라도 적성을 찾아서 다행이다. 안전하고 편안한 통역사 역할이나 충실히······.'
이 지나치게 강력한 일행들에 과거 B급 헌터로 유능하게 활동하던 한국계 미국인은 현재 주어진 일에 만족하기로 했다. 끝없는 굶주림을 호소하며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인간을 먹겠답시고 습격해오는 포식자들은 이제 뒤돌아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놈들은 일본인 언데드에 의해 말끔히 처리되었다. 우선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가 잘리고, 움직임이 봉쇄된 녀석의 머리를 공략하는 식으로.
여전히 세계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는 저 외계의 침략자들은 너무나도 간단히 죽어나갔다. 스티븐 최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때 성연이 중얼거렸다.
"융합을 다른 식으로 하면 더 강력할텐데······."
"굳이 지상 유닛만 뽑을 필요 있어? 괴수들 이제 진화 안 하고 계속 뚜벅인데 공중 유닛도 좀 뽑아. 어차피 총량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
누군가 듣는다면 전략 게임을 하느냐 물을만한 질문이다. 잠깐의 대화를 나눈 성연은 곧 단순한 조언을 실행에 옮겼다. 오 미터 정도로 축소된 날개 달린 언데드 다섯 마리가 상공에 등장했다. 빠르지 않고 묵직하게 비행하는 개체들이었다. 성연은 공중전 목적으로 만든 언데드들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몇 가지 변이를 추가로 진행시켰다.
괴기한 소리와 함께 얼굴 절반을 차지할 크기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입에서 강력한 부식성을 가진 타액이 쏟아졌다. 타액과 접촉한 껍질이 흐물거리며 녹았다.
괴로움에 괴수들이 비명지르는 가운데 날아다니는 언데드들의 입에서 기다란 혀가 솟아나 약해진 부분을 뚫고 급소를 꿰뚫었다. 꽤나 쓸만했다. 특별한 능력을 추가하지 않은 괴수들보다 훨씬 많은 총량을 잡아먹는다는 점만 빼면.
그 모습을 보며 성연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좀 더 효율 좋은 방법이 필요하다. 어차피 검은 기운 돌면서 대부분의 괴수는 일격에 보낼 수 있고, 죽음의 군주 능력으로 부상 당해도 무한히 부활할 수 있으니 차라리 크기를 축소하고 공격력을 극대화 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도 좋을······.'
그런 고민이 거듭되는 가운데 곧 전투가 끝났다.
괴수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지나치게 강력한 군단을 바라보며 성연은 적들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갈증을 느꼈다. 성연은 이번에 얻은 포인트를 계산하며 새로이 투자할만한 부분이 있나 더 살폈다.
"와!"
"다 쓸어버리셨다!"
멕시코인들은 이 나라에 카르텔 대신 새로이 부임한 왕을 보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 환호엔 위협적인 괴수들을 소탕해 주었다는 감사 인사와, 독보적인 무력에 다소 두려움을 느끼고 억지로 지르는 소리들이 섞여있었다. 성연으로선 뭐든 상관없었다.
성연은 오늘도 충실히 포인트를 벌었다는 사실에, 레베카는 이 네크로맨서의 전투에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그리고 스티븐 최는 자신에게도 일부 칭송이 쏟아진다는 사실에.
각자 다른 것에 충족감을 느끼며 멕시코로 돌아왔다.
누가 방문했는지도 모른 채.
***
전장을 떠나 일행이 향한 곳은 저택이었다.
도착한 그들을 알아본 카르텔 일원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영 묘했다. 아부 떨며 환영하는 게 아니라, 뭔가 어쩔 줄 몰라하는 듯한······.
"무슨 일 있나?"
"그게 안쪽에 손님이······."
손님? 올 사람이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성연은 저번에 경고해왔던 인물을 떠올렸다.
남미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나름 커다란 세력의 왕. 마약 물량 다섯 배를 넘기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는 말을 했었던······.
그런데 연락도 없이 찾아왔나? 이렇게 급작스럽게?
그때 레베카가 말했다.
"에릭? 그 새끼 왔어?"
"예······그쪽에 답변하기도 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바람에······."
"여전히 싸가지 없는 새끼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레베카는 표정을 찌푸린 채 성큼 걸어들어갔다.
성연은 빠르게 걷는 레베카를 뒤따랐다.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저택 거실에 도착하자 소파에 거만하게 걸터앉은 사내가 보였다. 그 뒤로 무장한 인원들도 함께.
생명 반응 감지 능력으로 하여금 그 무력 수준을 파악한 성연은 크게 긴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각성자들의 전투는 상성에 따라 갈리는 편이 많다. 그래서 성연은 만만해 보이는 적을 상대로도 언제나 방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손님이라는 저 인물들은 능력은 물론이요, 그 총량 또한 형편없었다.
"우리를 기다리게 해? 요즘 방문이 뜸했더니 빠져도 너무 빠졌······어?"
한층 거만하게 갑질을 시작하려던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쪽으로 솟았던 입꼬리가 내려갔고, 곧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에릭?"
에릭이라 불린 남자의 표정은 이런 상황은 상상치도 못했다는 표정이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레베카가 말했다.
"다음에 얼굴 비추거나 내 이름 운운하면 직접 사형 집행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맞지?"
"그······잠깐······."
"기억 못하니? 우리 옛 추억을 천천히 되살리는 시간을 가질까?"
"잠깐! 진정하고 대화로······나 더 이상 옛날에 감옥 갇혀있던 사형수 아니고, 나라의 높은 자리 맡고 있는 사람······그러니까 폭력말고 제발 말로······."
에릭은 말을 더듬거리며 겨우 문장을 완성했다.
그제서야 위협을 멈춘 레베카는 다시 말했다.
"남부의 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될거라며? 전쟁한다며? 전쟁 좋지. 가서 니 따까리들 더 데려올래? 한판 붙자."
그 단언에 에릭 스미스는 자신이 든든하게 생각했던 남부의 왕이라는 뒷배가 이 순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에릭은 최강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마법사가 어떤 광경을 벌일 수 있는지 몸소 경험해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하지만 여기서 너무 굽힐 수는 없다.
저 영국인이 멕시코를 적극적으로 돕는 게 아닐 시, 자신은 괜히 갔다가 거래만 망치고 온 병신이 되는 셈이다. 그건 안될 일이다. 기껏 다져놓은 입지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에릭이 조심스레 말했다.
레베카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기에 예의를 갖추어서.
"혹시 여기 왕이십니까? 아니면 책임자? 혹은 고용된 용병이라도······."
"내가 이 약쟁이 새끼들 왕이겠니?"
"그럼 이쪽 일은 우리끼리 처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화 끝나면 곧바로 사라질테니 한 번만 봐주시죠. 저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바로 가기엔 그림이 좀 그렇습니다."
"이······."
물러서지 않고 말하는 모습이 레베카의 짜증을 돋구었다.
과거엔 당당하며 과감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지금에 이르러 거만하고 꼴보기 싫은 모습이 되었다. 이 거리라면 0.02초 안에 에릭 스미스는 물론 뒤편에 선 무리들의 머리까지 일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 하지만 레베카는 이번만은 참기로 했다.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가운데 멋대로 날뛰는 건 이 네크로맨서가 좋아할만한 일이 아니다. 자세히 듣고난 뒤에 죽여버려도 늦지 않다.
그리 생각하며 레베카가 슬쩍 몸을 돌려 성연을 보았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성연이 말했다.
"마약 다섯 배, 저쪽이 요구하는 양 맞추기 힘든가?"
"예? 아, 다섯 배는 불가능하고 최대 세 배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 손해가 막심해져서······."
"약 팔아 먹고 사는 나라 손해가 어떻든 내가 상관할 건 아니고······어쨌든 해결할 순 있다는 소리지? 내가 이쪽 처음부터 책임자였던 것도 아니고 그쪽들이 알아서 해. 여기 낭비할 시간도 없고, 난 곧 멕시코 뜰 거니까."
성연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 미국인 사형수든, 마약을 팔아 연명하는 이 멕시코 카르텔이든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선량한 시민이라면 모를까. 둘 모두가 약자들을 짓밟고 불법적인 일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악질들이라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불쌍한 척을 해도 저 카르텔도 얼마 전까지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던 부류다. 성연은 그런 꼴보기 싫은 놈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에 에릭 스미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쪽 사장님, 말이 잘 통하네. 그래. 우리끼리 얘기 해 봅시다. 우리가 매번 사가는 양이 얼만데 다섯 배를 못 줘? 게다가 귀한 인력들 난데없이 총 맞아 죽었잖아. 그쪽에서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걸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도 눈감아 주는 대신 보상으로 많이 달라는 거 아냐. 왜 그래?"
순식간에 다시 당당해진 에릭 스미스는 신나게 말했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꼬리를 내리는 그 모습에도 성연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 카르텔들도 다르지 않은 족속들인걸 아는 까닭이다.
곤란한 표정으로 카르텔이 답했다.
그러던 와중, 성연이 흥미를 느낄만한 내용이 그 대화 중에 흘러나왔다.
그 부분을 놓치지 않은 스티븐 최가 통역해왔다.
"여기서 생산하는 양을 내가 알고 있는데 다섯 배가 안 된다고 자꾸 그래?"
"그게······이번에 새로운 거래처가 생겼거든요. 협회가 뒤 봐주는 대신 이쪽에 쫙 뒷돈 요구한 거 알죠? 저희 쪽은 자금이 부족한 탓에 대부분 약으로 넘기는데 보호비랍시고 요구하는 약이 확 늘었어요. 한 번이라도 거래 늦춰지면 자기네들 무시하는 거라고 안다는데, 솔직히 그쪽 무시하고 남미에 납품할 순 없잖아요. 슈퍼맨이 정의집행 명목으로 출동해서 나라 다 때려부수고,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고 뭐고 다 죽였습니다!'하면 진짜 작살나는데······."
"그럼 그쪽이 뒷돈 요구한 거 공개하면 되잖아? 대통령한테 지지율 밀리고 슈퍼맨 여론 엄청 신경쓸텐데, 그 협박 잘 먹힐걸?"
"잘 먹히겠죠. 그리고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거고. 다른 나라들이야 그 협박 카드 요긴하게 써 먹겠지만 결국 피 보는 건 멕시코 아닙니까. 그건 좀······."
그 통역을 유심히 듣던 성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뭔가 물어봐도 되나?"
"아니, 거기 사장님 방금 눈치 좋더니 갑자기 왜 이래. 우리끼리 하는데 왜 끼어들고 난리······."
성연의 정체를 모르는 에릭 스미스는 이제 기세등등해져서 쏘아붙이며 답했다.
그에 더해서, 소파에서 일어나며 거칠게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하며 기선제압도 들어가고자 했다. 그 동안의 협상에서 이런 물리적인 행동을 취하는 건 아주 효과가 좋았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저 동양인은 이런 제스처에 기겁을 하며 물러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질문은 나만 할 거고, 대답할 땐 그 소파에서 일어나지 말도록."
아래에서 무언가가 솟았고 발바닥을 꿰뚫고 발등에서 나왔다.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지를 기색도 없이, 여러 갈래로 뻗은 촉수가 손목과 발목을 소파에 고정시켰다. 소름끼치는 감촉에 에릭 스미스가 몸을 떨었다. 그제서야 이 미국인은 저 동양인이 레베카 블런트 못지 않은 초인이요, 살벌함으로 따지면 그보다 더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 생기 없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에릭 스미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몸을 옭아매고 있는 이 촉수에 검은색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마 전 협회가 내린 수배에서 보았던 특징이었다. S급 헌터 둘을 살해한 이력이 있으며,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유례 없이 강력한 네크로맨서.
한국인 유성연을 가리키는 특징.
싸이코패스요, 소시오패스라 소문난 인물을 바라보며 에릭이 벌벌 떨던 그때, 성연이 입을 열었다.
"협회장이 마피아, 카르텔들과 뒷거래를 했다고? 깡패들처럼 보호해주는 대신 뒷돈 걷는 방식으로?"
< 행동대장 에릭 스미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