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각성자 이경민 (3) >
할리우드 히어로들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초인은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미국인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지 못했다. 코믹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동경하며 이미지를 그려낸 청년은 완벽함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그가 동경하는 히어로들은 스캔들이나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더하여,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입막음과 살인 따위를 벌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로버트 데이비스는 물리적인 위협보다도 나쁜 방향으로 치닫는 여론을 더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미국의 슈퍼맨은 양지에서 활동하는 협회보다 효과적으로 군중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원했다. 이를테면, 대놓고 총질을 하고 마약을 판매하는 범죄자들.
그들은 이용할 시 원망의 눈초리를 돌리는 것은 물론이요, 의외로 쏠쏠한 수익까지 벌어들일 수 있었다.
변화한 세상에서 정의를 명목으로 내세운 채 학살을 일삼던 독보적인 집단이 내민 타협을 마피아나 카르텔은 기꺼이 환영했다.
마땅히 욕받이가 되길 자처했으며 뒤쪽에서 돈이나 식량, 마약을 찔러넣는 것으로 슈퍼맨이라는 비대칭 전력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로버트. 여론이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비난의 화살이 폭군처럼 행동하는 각국의 왕에게 쏟아지고 있어요. 절대권력을 갖고도 민주주의 체제를 꾸준히 유지하는 미국의 슈퍼맨이 그런 끔찍한 싸이코패스일리 없다는 의견들이 다수······.」
"그, 런가······?"
「예. 이제 우리가 내민 협상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저들이 폭군처럼 행세하는 이스라엘이나 아랍 국가들에 직접 가셔서 심판하시면 분명 여론이 반전될겁니다. 그 중국인이 협회를 상대로 벌이는 테러가 끝나면 그때 나서실 수 있도록 일정을 준비해 뒀습니다.」
"그래······그 빌어먹을 대통령은······?"
「두 팀이 전담해서 비난 여론 형성중입니다. 가까운 비서 쪽 매수해서 성폭력 건으로 엮거나, 마피아들 움직여서 마약 관련으로 엮으면 금세 추락할 겁니다.」
"다행이군. 수고했네. 정말 수고······."
「······로버트? 지금 뭐하고 있어요?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신, 경 쓸 것 없네."
그리 말한 뒤 로버트 데이비스는 흰 종이를 내려놓았다. 테이블엔 바늘이 구부러진 주사기 몇과 백색 가루가 흩뿌려져 있다.
비서의 텔레파시가 재차 전해져왔다.
「설마 약을 한 거에요? 미쳤어요? 각성자들이 마약하면 순식간에 능력 고장나는 거 알잖아요! 지금 무슨······.」
"우울해서 조금 했을 뿐이야. 어차피 1분, 아니 30초면 회복할 수 있어. 내가 누군지 모르나? 설마 슈퍼맨이 약 따위에 취하려고······."
어떤 바늘로도 피부를 뚫을 수 없는 탓에 로버트 데이비스는 그 가루들을 몸 안으로 흡입했다. 모든 독성에 저항을 갖고 있는 우월한 신체 때문에 적정량을 한참 넘어선 량을.
비서에게 전한 말처럼 그 초월적인 몸뚱이는 30초만에 몸에 돌던 약기운을 모조리 몰아냈다. 맨정신이 된 로버트는 한참이나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 가루를 들이마셨다. 다시 몽롱함에 젖어들며 로버트는 생각했다.
'내가 미국에 헌신한게 얼마인데 나약한 대통령에게 30%에 달하는 표를 뿌려? 그 입만 번지르르한 빌어먹을 새끼, 사소한 논란 몇 개로 내가 이룬 영웅적인 업적을 모두 잊고 욕지거리하는 개돼지들······감히 내가 더러운 것들과 손잡게 만들고 로버트라는 이름을 더럽혔어, 미천한 것들이······다 그 시체쟁이 때문이다. 내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출신 더러운 동양인 고아 새끼 하나 때문······.'
복잡한 생각들은 곧 모두 사라졌다. 구름 위를 떠오르는 듯한 기분에 잠긴 슈퍼맨은 의자에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신줄을 놓은 로버트의 귓가로 비서의 정신파가 시끄럽게 계속 울려퍼졌다.
「최근엔 뜸해지긴 했지만 왕웨이가 다시 습격해 올 겁니다. 경계가 조금만 허술해져도 덮치니까 로버트 당신이 언제든 출동할 준비를 해주셔야 해요. 그 중국인을 제압할 수 있는 영웅은 당신밖에 없다고요. 로버트? 듣고 있어요? 로버······.」
결국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비서는 마지막으로 허탈하게 정신파를 보냈다.
진심으로 안타까운 감정을 담아서.
「제발, 로버트······당신은 미국의 영웅이라고요.」
***
"순순히 멈추지. 추하게 굴지말고."
"왜! 왜 아무도 안 와!"
안드레아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누구보다 든든하게 협조를 약속했던 슈퍼맨은 몇 분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그 슈퍼맨이라면 진즉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을 벌었다. 버튼을 부술듯이 누르는 멕시코인을 보며 레베카가 말했다.
"그게 되겠니?"
그제서야 안드레아는 레베카 블런트가 열병기와 더불어 이 주변의 전자통신마저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저 초월적인 대마법사는 41Km 반경을 비전투지대로 만드는 것은 물론이요, 찬란히 발전한 현대문명들을 구석기시대 수준으로 전락케 만들 수 있는 초인이다. 그리고 구석기인들이 아무리 발악해봤자 다른 나라에 있는 외국인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다. 절대로.
게다가 의문의 각성자가 협회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많은 이들을 죽게 만든 그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임을 발표한 협회의 수장이 이 타이밍에 미국 본토에서 이곳까지 움직일 리도 없었다.
투표의 결과로 하여금 이미 30%의 미국인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안드레아는 절망했다. 자신을 도와줄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때 기다랗게 솟은 촉수가 그 멕시코인의 발목을 휘감고 잡아당겼다.
"아 - 아아악!"
그 손속에 자비란 없었다. 발이 뽑혀나가는 격통에 안드레아가 비명질렀다. 흰 뼈가 드러나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일어나지 않은 성연이 안드레아를 내려다 보았다. 과연, 이 네크로맨서에게 표정 변화란 없다. 기계처럼 메마른 눈빛을 마주했다.
안드레아는 이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성연이 짧게 말했다.
"지금 포션 네 개 구입하도록."
머릿속이 하얗게 질린 안드레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포션을······왜······."
"과다출혈로 죽으면 곤란하지 않나. 뜯어내면 다시 자라나게 해서 다시 뜯어야 하는데, 내 포인트를 지불하고 구입하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아······그······."
"혹시 두렵나? 그럼 항복해. 목숨만은 보장해 줄테니."
한국계 미국인이 통역해오는 저 덤덤한 통보에 안드레아는 겁먹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참으로 풍부한 것이었고 그 탓에 고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머릿속에선 다양한 장면들이 솟았다.
부서진 바닥 아래서 새로운 언데드가 솟아났다. 고질라의 형태가 사라진, 말미잘과 닮은 그로테스크한 언데드였다. 시각적으로도 충분한 공포를 주는 그 괴생명체의 접근에 안드레아가 떨었다. 발작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 외모만큼이나 다가올 일은 끔찍하고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상상을 마친 안드레아는 평생 트라우마가 될 것이 분명할 고문을 경험해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잠깐······."
꾸물거리는 괴생명체의 촉수들이 콧구멍과 귀를 파고들었다. 기생충이 기어다니는 듯한 끔찍한 촉감이 불쾌감을 극대화시켰다. 그때 컥컥거리며 안드레아가 소리쳤다.
"살려주······항, 항보······보옥. 제발······."
그 어눌한 말과 함께 체내로 파고들었던 촉수가 빠져나왔다.
여전히 소파에 걸터앉은 성연이 말했다.
"항복?"
그 거만한 모습에 안드레아는 코에서 뚝뚝 쏟아지는 핏물을 막으며 말했다.
"예······."
격변 이전부터 정부도 두려워하던 집단이요, 법 위에 선 주먹이라 알려졌던 카르텔의 보스가 무릎 꿇었다.
몇 번의 말이 오갔고 그 뒤에 멕시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이 바뀌었다.
한순간에 권력을 모조리 잃은 보스는 허망하게 선 채 목숨을 부지했음에 순수히 감사했다.
멕시코의 왕 자리를 넘겨받았다는 건 안드레아가 저 네크로맨서에 휘하에 들어왔음을 뜻했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벤트의 규칙에 따르면 같은 진영에 속한 이들끼리는 서로 상처 입힐 수 없다. 그러니까, 저 네크로맨서도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주저앉은 채 안심하던 안드레아의 앞으로 성연이 걸어왔다.
이 감정 없는 네크로맨서는 멕시코의 왕이 된 뒤 처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젠 권력을 잃은 과거의 왕에게.
"옷을 모두 벗은 채 사죄하는 마음으로 뛰어서 멕시코 땅을 열 바퀴 돌도록."
그 명령은 곧 강제집행되었다. 피를 철철 흘리던 안드레아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억지로 일으켜져 옷을 벗었다. 그 직후, 저택 밖으로 맨발로 뛰쳐나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 태우는 탓에 지구력이 형편없어 수분만에 호흡이 가빠지건, 발바닥이 까지고 힘이 부쳐 무릎이 꺾이던 말던 강제력은 그 명령을 집행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던 성연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끝난 것 같은데, 다음 목적지로 가지."
"이대로 간다고? 새로 얻은 권력으로 재미난 일 같은 거 안 하고?"
"그러고 놀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생각보다 시시하네. 진짜 이벤트밖에 모르는구나? 이 본 게임 끝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려고? 그렇게 불태우기만 하다보면 결국 마지막엔 너 스스로도 태워버릴걸?"
레베카의 말에 성연은 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성연은 본 게임에 누구보다 충실히 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본 게임에 우승하여 목적을 달성케 되었을 때, 바뀐 세상에서 자신이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여전히 성연의 눈에 세상은 흑백인 가운데 이 목적마저 사라진다면 삶의 의욕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연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문득 한 마디 던졌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돼. 지금은 현재에만 충실히······."
막연한 소리였다. 레베카도 더 묻지 않았다.
성연은 언데드를 일으킨 뒤 커다란 저택을 나왔다. 왕의 명령 탓에 강제로 이곳으로 달려오던 멕시코인들은 주저앉은 채, 마침내 왕이 바뀌었음을 깨닫고 환호했다.
성연은 이 광적인 환호가 기껍지 않다. 조금도.
표정을 찌푸리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다가왔다. 안드레아 구스만을 따르던 카르텔의 일원 중 하나이다.
아부라도 떨려는 건가?
그리 생각하던 성연은 스티븐 최를 통해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마약 유통에 관해 허락을 받으러 왔다고?"
"예. 새로 왕으로 부임하셨으니 의견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대답을 원하고 물은거지? 마약은 나쁜 것이니 팔지 말라는 훈계? 아니면, 내가 공식적으로 약쟁이들의 보스가 되어달라는 말인가? 난 왕의 권한을 넘겨받았을 뿐인데?"
"아닙니다. 형식적인 절차일 뿐······."
"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멕시코가 지금 이쪽으로 먹고 사는 중이거든요. 그러니까, 유통 막으시면 다 굶어죽습니다. 영미권에서 적당한 식량이랑 마약 거래해주거든요. 사실 저희 보스도 그렇게 얻은 식량이랑 자본 활용해서 착한 카르텔로 점수 딴 뒤 왕으로 선출된 거나 다름없······."
그 말에 레베카가 깔깔대며 웃었다.
"착한 카르텔? 역설적 표현이니?"
비꼬는 말에 멕시코인이 어버버거리며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다른 이가 덧붙여 설명했다.
"격변 벌어지고 마약 시장이 확 커져서 주변 나라들 대부분 이 장사 하거든요. 영미쪽은 둘러대면 되는데, 이틀 뒤까지 꼭 납품해야 할 나라가 있어서 그럽니다. 걔네 쳐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어요. 심각한 악질에다가 지독하기로 유명한 것들이라······."
"오라고 해. 나 꿀릴 거 없어. 오케이?"
"그게, 레베카님은 그 자리에 없는 게 좋으실 겁니다. 아마 찾아올 손님이 레베카님 알아보면 분위기 이상해질 게 뻔해서······."
"아니? 전혀? 내가 왜? 여기 슈퍼맨 방문해도 나 안 꿀리는데."
"······거기 행동대장이 에릭 스미스입니다."
그 이름이 나온 즉시 레베카가 입을 다물었다.
"······에릭? 걔가 왜?"
"고질라들 쏟아져 나온 틈을 타서 탈옥한 수감자들 중 하나랍니다. 슈퍼맨이 불을 켜고 찾는 통에 남미쪽으로 왔다는 소문이······."
"아, 미친······."
에릭 스미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성연은 통역을 들을 필요 없이 무슨 대화가 벌어지는 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형수. 과거, 4개월 간 레베카 블런트와 연애한 전력이 있는 그 이름을 모르는 인물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때 레베카가 중얼거렸다.
"······불러."
"예?"
"그 꼴통 새끼가 와서 깽판치려고 들면 부르라고. 다음에 나한테 얼굴 비추면 내가 대신 사형 집행해주기로 했었거든."
그 말에 멕시코인은 섬뜩함을 느끼고 '예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전남친 같은 거 아냐. 알지? 옛날에 겉멋 들어서 이상한 양아치랑 어울리고 그런거."
"······."
"어차피 로버트 그 꼰대가 통제해서 교도소 밖으로 못 나온 탓에 신체 접촉은 한 적 없거든?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니까? 게다가 그 짐승 같은 새끼가 마지막에 나한테 했던 말 생각하면······!"
"어, 그래. 해명할 필요 없어."
난처한 표정을 지은 성연은 곧 멕시코인에게 대답했다. 정의감 따위로 한 나라의 생계를 망칠 생각은 없었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두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급히 달려나간 이들이 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마약 거래 자리에 갔던 모든 이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받았다.
범인은 특정되지 않았고, 거기 있던 이들 모두 각성 능력에 의해 당한 것이 아니라 총상으로 사망한 것이 밝혀졌다. 거래판이 망가지자 돈을 들려준 채 사람을 보냈던 곳들에서 강력하게 항의해왔다.
다행히도 두 배로 보상하겠다는 말에 대부분의 국가가 물러났으나, 마지막까지도 진상을 부리는 놈이 있었다. 멕시코보다 훨씬 커다란 세력. 남부의 대부분을 집어삼킨 거물의 밑에서 일하는 행동대장.
레베카 블런트의 전 남친, 에릭 스미스가 멕시코에 찾아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곤 이런 말도 했다.
"우리가 만만한가? 약속했던 물량의 다섯 배를 넘기지 못하면 멕시코는 남부의 왕이 얼마나 강력한 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린 전쟁을 피할 생각이 없다······."
멕시코에 초월적으로 강력한 전 여친과 네크로맨서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워후!"
네크로맨서는 목숨은 부지하게 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드넓은 국토를 쉬지 않고 맨발로 달리던 안드레아 구스만은 결국 땅에 널브러진 채 죽었다. 멕시코인들은 그 시체를 걸어놓고 축제를 벌였다.
이경민은 그 축제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술잔을 기울이고 환호성을 내지르며 좋아하는 가운데, 비각성자들은 축제 분위기를 즐기지 못한다.
술과 음식을 나르는 것은 물론이요, 기쁨에 취한 멕시코인들의 성처리를 도맡고 잡일을 하는 것은 모두 비각성자들이다. 이경민은 권총을 다시금 쥐었다.
"이런 일에 약이 빠질 수 없지. 안 그래?"
"당연한 소릴!"
"내일 브로커들에게 넘길 신품들 몇 개만 슬쩍하자고. 어차피 눈치 못챌테니······."
세 번째 이벤트가 시작된 후, 같은 진영에 속한 이들은 서로를 상처입힐 수 없다.
한국인 이민자인 이경민은 멕시코 진영 소속이므로 이들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외부에서 거래를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라면 다르다. 그러니까, 여기서 유통되는 마약들을 구입하기 위해 일정한 텀을 두고 찾아오는 유럽인들이라면 말이다.
이경민은 그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그 장소와 시간마저도 자세하게.
그리고 술을 나른 대가로 한쪽 다리를 절뚝이는 비각성자에게 주어진 대가는 차갑게 식은 음식물 쓰레기이다. 토사물과 뒤섞여 악취를 풍기는 찌꺼기를 삼키며 배를 채운 이경민은 잠을 청했다. 그러곤 다음날 거래의 장소로 향했다.
"물건은 확실하겠지?"
"우리 사이끼리 뭘 묻고 그러나?"
"그래. 혹시 샘플 몇 개 있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는데 좀 즐기고 싶어서······."
벽 뒤에 숨어있던 이경민은 낄낄대며 웃는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강자에 속할 각성자들이 마약에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 눈에 뵈는 것 없고 정신이 나가버린 그 각성자들에게 이경민이 접근했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조준했다.
'그 네크로맨서는 뽑기운 좋아서 얻은 강한 힘으로 순식간에 나라 하나 집어삼켰지······나라고 못할 이유가 뭐야?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그 싸이코패스 새끼한테도 대단한 능력 줬으니 당연히 나도 선택받을 수 있을거야. 그리고 선택받은 힘으로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들 다 구하고······지들이 귀족이라도 되는 양 까부는 것들, 다 죽여버릴거야. 남김없이, 싹 다······.'
총성이 울렸다. 사격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초탄이 빗나갔다.
자세가 어설퍼 반동을 견디지 못해 손목에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약에 취한 이들은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고, 축제에서 폭죽이라도 터진 양 즐겁게 웃었다.
이경민은 빗나가지 않도록 더 접근했다. 그러곤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댄 뒤 방아쇠를 당겼다.
"흐, 으아. 으······."
쏟아지는 핏물과 뇌수에 이경민이 경악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러나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손이 땀으로 젖어 미끌거렸으나 두 번째 사격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다음도 당연히 실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약을 판매하기 위해 이 자리를 찾은 이들의 머리에 하나씩 구멍이 뚫렸다.
시체만이 남게 된 가운데 이경민은 숨을 몰아쉬며 권총을 내려놓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비각성자에서 각성자로 승급 성공······.』
게임 인터페이스에서나 보일법한 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그 창엔 이경민이 새로이 얻게 된 능력과 협회의 기준으로 매겨진 등급이 적혀있다. 더하여, 각성자들을 죽인 덕에 그에게 들어온 대량의 포인트도······.
이경민은 그게 어느 정도의 수치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몸에서 흘러넘치는 힘으로 하여금 자신이 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체감할 뿐이다. 이경민은 도망치듯 그 살인현장에서 빠져나왔다.
숨이 벅차게 뛰다 멈춘 그는 곧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게 되었다.
"곰팡이 난 빵도 좋다고? 그래? 그럼 다리 사이 기면서 짖어봐. 그럴듯하게 짖으면 한 조각 내어줄테니······."
격변 이후 남의 위에 올라서는 우월감에 찌들어 사는 이들은 아주 많게 되었다.
비각성자들을 가축이나 노예 취급하는 저 장면은 무척 흔한 것에 속한다. 그리고 지금 잔뜩 흥분한 이경민은 이제 당연하게 벌어지는 저 차별을 참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뭐야? 너. 이 미친······."
멕시코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코앞까지 접근한 이경민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멈추었다.
권총은 살인현장에 버리고 왔으며,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더라도 같은 진영끼리는 상처 입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 폭언이나 욕설 따위로 이 양아치를 쫓아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살인과 함께 이경민이 각성한 능력은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정신을 자극하는 부류의 능력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꺼져. 그리고 돌아가선 음식은 물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말도록······."
이경민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메아리치듯 여러 번 울렸다. 그 멕시코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이후, 그는 입을 작게 벌린 채 힘 없이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이경민은 사라진 멕시코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홀로 남아 여전히 엎드리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하루 살아남는 것도 벅찬 비각성자를.
"일어나요."
"아······."
"같이 갑시다. 그리고 저 인간도 아닌 짐승들 치우고,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되찾읍시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인권을······."
***
「이름: 이경민」
「판정 등급: A」
「3단계 능력 강화」
「각성능력: 언령」
「음성으로 뱉는 모든 언어에 강력한 힘이 실린다.」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특정 자연 현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시 그 현상을 현실에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
「특이사항」
「비각성자에서 각성자가 된 최초의 인물.」
< 비각성자 이경민 (3) > 끝
"뭐야? 너. 이 미친······."
멕시코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코앞까지 접근한 이경민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멈추었다.
권총은 살인현장에 버리고 왔으며,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더라도 같은 진영끼리는 상처 입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 폭언이나 욕설 따위로 이 양아치를 쫓아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살인과 함께 이경민이 각성한 능력은 물리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정신을 자극하는 부류의 능력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꺼져. 그리고 돌아가선 음식은 물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말도록······."
이경민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메아리치듯 여러 번 울렸다. 그 멕시코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이후, 그는 입을 작게 벌린 채 힘 없이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이경민은 사라진 멕시코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홀로 남아 여전히 엎드리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하루 살아남는 것도 벅찬 비각성자를.
"일어나요."
"아······."
"같이 갑시다. 그리고 저 인간도 아닌 짐승들 치우고,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되찾읍시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인권을······."
***
「이름: 이경민」
「판정 등급: A」
「3단계 능력 강화」
「각성능력: 언령」
「음성으로 뱉는 모든 언어에 강력한 힘이 실린다.」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특정 자연 현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시 그 현상을 현실에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
「특이사항」
「비각성자에서 각성자가 된 최초의 인물.」
< 비각성자 이경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