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크로맨서가 너무 강함-55화 (55/111)

< 언데드 김유현 (2) >

네크로맨서 연합과 이현우의 대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단순히 공적인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 예고한 바, 연합장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걱정한 몇 인원들이 접선 장소로 도착했다. 그리고 몰려온 이들 전부가 이 사기 전과 화려한 동양인의 언변에 빠져들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신자들처럼 그들이 홀린 듯 자기네들 이야기를 털어놓는 가운데, 어느덧 시간이 늦었음을 알아챈 누군가가 말했다.

"저희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리."

"괜찮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그 여유로운 대답에 연합장 나탈리가 말했다.

"벌써 밤이 되었나요? 이런······빨리 돌아가시죠. 묵을만한 호텔은 잡으셨나요? 혹시 사정이 여의치 않으시면 저희가 준비해드릴까요?"

"저는 밤새도록 대화해도 괜찮은데 뭔가 시간이 늦으면 문제라도 생기나요?"

"그게 사실 저희 연합······적이 많습니다. 원래라면 대부분 입만 산 잔챙이들인데 오늘 우리 싸그리 소탕하겠다고 협회에서 인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전해받았습니다. 그래서 만남은 짧게 가지고 헤어질 예정이었거든요."

"협회? 협회가 직접 움직였습니까?"

이현우가 혀를 찼다. 지금까지 성연과 그의 무리가 협회와 부딪힐 일이 없었던 이유는 하나다. 협회가 그 대단한 사형수 네크로맨서나 언데드 군단이 두려워서가 아닌, 여전히 대처 불가능하다 평가되는 대한민국의 마운틴을 겁낸 까닭이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멸망한 그 나라가 아니라 영국에서라면 협회는 손을 쓸 수 있다. 꺼릴 것 없이 얼마든지.

'위험한데.'

이곳에 있는 전력만으로 협회와 맞서는 것은 무리다.

S급 헌터를 둘 묶어서 저승길로 보낸 적 있으며, 조심성 많은 탓에 이 머나먼 타국까지 언데드 군단을 은밀히 끌고 온 그 감방동기라면 모를까.

일개 사기범과 비교적 평범한 네크로맨서 집단이 감당하기엔 협회 각성자 군단은 지나치게 강력하다.

나탈리가 말했다.

"저희가 안전한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이 주변은 꽉 잡고 있는 편이니······."

그때였다. 저 먼 곳에서 여러 남녀의 무리가 등장했다.

가슴께에 협회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을 달고 있는 이들.

"······각성자 군단."

정의라는 명목으로 여러 집행을 내리는 강력한 전투원들. 그 등장을 지켜보며 나탈리를 비롯한 네크로맨서 연합원들이 침음을 삼켰다.

네크로맨서 연합이란 수면 아래에서 나름 알아주는 무력 집단이다. 그러나 그 무력이란 협회와 비교하는 순간 한없이 초라하게 추락한다. 저들은 격변 이전부터 세계를 주름잡던 괴물들이다. 괴수는 물론이요, 사람 잡는 것에도 능숙한 전문가들.

늦은 시간에 다소 사람들은 모여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네크로맨서 연합이 고용한 '눈가리개' 인파였다. 각성자 군단의 선두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대한민국의 사형수를 지지하는 세력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네크로맨서 연합에 관해 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협조 부탁드립니다."

냉큼 나서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다수가 네크로맨서 연합에게 고용된 인물이거나,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거리에 나온 사람들뿐이었다. 이 비협조적인 상황이 각성자 군단은 기껍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협조'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군단에 포함된 한 여인이 영국인 중 하나의 목덜미를 붙잡고 무어라 속삭였다. 눈에 초점이 사라진 영국인은 기계적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협회장 나탈리. 이 주변에서 한국 네크로맨서 측 인물과 접선한다고······보수 넉넉히 줄테니 철수 명령 내릴 때까지 주변 거리 돌면서 혼잡하게 하라는······."

"협조 감사합니다."

쓸만한 정보를 토해낸 직후 영국인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곧 독수리 문양을 단 무리의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그 시선 중간에 나탈리와 이현우가 걸렸다.

곧, 누군가 말했다.

"다크서클 짙은 여자가 연합장 나탈리. 옆에 앉은 남자는 제임스입니다."

"둘 다 위험인물로 규정된 놈들이군."

"동양인은 이현우라는 이름인데······별 볼일 없는 사기전과범입니다."

"그 사형수가 수감중에 만났겠지. 대충 협상 자리 내보내는 용도로 쓰는 장기말······."

각성자 군단 측이 그들의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할 때, 이현우도 각성자 군단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 백과사전이 그 인물들의 기억이며 능력 따위를 읽어내고 있었다.

상식을 초월한 힘을 가진 초인. 그리고 그 초인이 정의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과거부터 저질러온 끔찍한 살육들을······.

"거기. 잠깐 조사에 응해주시겠습니까?"

각성자 군단의 선두에 선 남성이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때, 이현우가 나탈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떡합니까?"

"도망쳐야죠. 가까이 붙으면 답도 없어요. 안전한 곳에 숨어서 언데드 일으키고, 주의 분산하면서 죽어라 뛰는 거밖엔······."

"날벌레. 날벌레 죽여서 언데드로 일으킨 다음에 암살하는 건 안 됩니까? 제가 보니까 그거 각성자들한테 의외로 잘 통하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파브르가 환생해서 네크로맨서 된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해요? 그러려면 각 곤충들 몸 구조에 관해 빠삭하게 알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재구성 방식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해요. 만약 그게 가능하면, 네크로맨서계 노벨상이라도 받을 업적······."

이현우가 제시한 의견은 결국 과거 자신의 감방 동기가 얼마나 우월한 인물인지 깨닫게 해줄 뿐이었다. 그런 터무니 없는 일이 가능한 초월적인 네크로맨서란 이 자리에 없다.

능력의 활용 방식은 A급이나 B급이라는 단순한 수치로 결정되지 않는다. 뼈에 사무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부모를 잃고 그 복수심에 불타 모든 시간을 자기발전에 쏟아부은 네크로맨서도 이 자리에 없다.

그렇다면 역시 도망치는 것밖엔 답이······.

"우리 쪽에서 관심 돌릴 거에요. 신호 주면 다 같이 뒤로 달려요."

"관심 돌린다고요?"

"네. 여기 어그로 끄는데 최고인 좀비 하나 있거든요. 제임스?"

"제 여친이 남자들 눈 돌아가게 만들긴 하죠."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제임스가 쓰다듬는 여성형 좀비의 몸에서 증기가 뿜어졌다. 이현우는 그 여성형 좀비가 시속 900Km로 달릴 수 있다는 사실 따위는 몰랐다. 그리하여 초고속 좀비가 육상 선수가 으레 취하는 준비 자세를 거의 완성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미친놈이······?"

나탈리가 눈살을 찌푸리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휘파람은 뒤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뒤에서만 들려온 것이 아니다. 미묘한 멜로디를 내는 휘파람 소리는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서양인들과 달리, 그 자리의 유일한 동양인인 이현우는 이 멜로디를 기억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위인이 즐겨 부르는 멜로디. 역사적인 영웅을 상징하는 음악이자, 이제는 죽어 장례까지 치루었기에 추모곡으로나 쓰이던······.

"이게 무슨 노래야?"

각성자 군단에 속한 인원들도 의문을 표하는 가운데 쿵하고 굉음이 울렸다. 뒤이어 웅장한 떨림이 바닥을 타고 일대에 퍼졌다. 그 강렬한 진동이 어떤 존재의 발걸음에 의해 발생한 것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수십 미터의 괴수가 이동하면서 그 무거운 중량에 의해 울리는 발자국 소리?

아니다. 이건 그런 식으로 발생하는 진동이 아니다.

그제서야 협회 각성자 군단은 이런 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는 인간을 하나 떠올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처참하고 끔찍하게 살해당한 바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각성자 군단은 곧 자신들이 영국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어떤 대단한 네크로맨서를 지지하는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서 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초월적인 네크로맨서와 싸우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지금 각성자 군단이 머리속에 떠올리는 인물을 살해한 살인마가 바로 그 네크로맨서다. 사형수 유성연.

"다들 전투 준비······."

그리고 네크로맨서는 자신이 죽인 것이라면 언데드로 일으킬 수 있다. 무엇이든지.

추측하건데, 아마 과거의 영웅이었던 김유현 헌터도······.

서늘한 밤공기에 여전히 퍼지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살점이 썩은 좀비 하나가 나타났다. 예상은 과연 빗나가지 않았다.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다들 총 버려! 절대 쏘지마. 그럼 우리 다 죽는······!"

각성자 군단에 소속된 한 남자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일대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은밀히 속삭이던 목소리들은 물론이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던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그 순간 모두 과거의 장면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균열이 벌어지며 쏟아졌던 괴수들을 일순간에 전멸시킨 힘.

전장에 등장하는 순간, 모든 적을 침묵시키고 통제하는 위대한 초인.

모두의 칭송을 받았던 영웅이란 어느 네크로맨서에 의해 영원한 안식에서 다시 깨어났다.

모자를 깊숙히 눌러쓴 초라한 인간 좀비가 고개를 들었다.

다섯 번째 S급 헌터, 역사상 두 번째로 언데드가 된 S급 헌터.

김유현.

전장의 마에스트로.

***

각성자 군단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단순했다.

김유현이란 초인의 주변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 소리가 아주 미세하고 작더라도 그렇다. 공포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한층 강화하는 건 일대에 내려앉은 침묵이었다. 요란한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을 흘리는 이들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아 호흡을 멈춘 가운데 세상은 일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어 있다.

뛰어난 육체나 비상한 머리 없이, 오직 타고난 능력만으로 인류가 매겨놓은 기준에서 최고점을 받은 초인이란 존재만으로 이런 현상을 벌일 수 있다.

그 능력이란 가히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다. 정확히 살상력과 다수를 상대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어떤 S급 헌터보다도 강력하다.

공개되기로 '주변의 소리를 느끼며 지배한다'라 간단하게 소개된 이 능력은 아주 폭넓게 활용할 수 있었다. 단순히 소리를 지배하는 능력은 슈퍼맨의 99.8%에 달하는 능력 총량과 조합되는 순간 괴랄한 위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증폭하여 그 음파를 퍼뜨리고 반경 수 킬로미터 내 모든 것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더하여, 대상이 내는 소리들을 놀라울 정도로 증폭시켜 강력한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능력엔 약점이 존재한다. 소리를 발생시킬 수 없으면 공격할 수 없다는 것.

안타깝게도 김유현의 힘은 상대의 심장 박동을 매개체로 하여 가슴을 박살내진 못했다. 몸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없었다.

그 약점은 아주 간단히 커버되었다. 김유현은 악기를 다루는 것에 나름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을 살려 거금을 지불하고 특수한 무기를 제작했다.

괴수의 마석을 다루는 기술로 만들어진, 상황에 맞춰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총 27종의 악기로 매순간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김유현 전용의 무기.

더하여 그 무기란 김유현의 능력이 가해져도 줄이 끊어지지 않게 특수 설계되었으며, 통상의 악기보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곳까지 소리를 퍼뜨릴 수 있었다.

괴수들이 즐비한 전장에서 악기를 드는 특이한 전투방식 덕에 '마에스트로'라는 별명이 붙은 초인은 이제 좀비가 되어 다시 악기를 들었다.

바이올린은 든 좀비가 활을 들었고, 바이올린 형태가 된 무기의 현에 갖다대었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동작을 시작했을 때가 되서야 각성자 군단이 움직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기부터 빼앗- !"

성대가 진동하며 발생한 목소리가 곧 커다랗게 증폭되어 충격파가 되었다. 입 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 남자의 머리가 성대하게 폭발했다. 피와 뇌수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가운데 바이올린이 내는 선율이 벽과 바닥에 퉁기며 넓게 퍼졌다. 그 음파는 적으로 규정한 것들에게 닿는 순간 정확히 충격파가 되었다.

막는 것이 불가능한 공격이다. 몸뚱이에 닿은 음파란 그 몸 전체를 타고 떨린다. 그러니까, 한 번 시작된 김유현의 공격은 모든 방향에서 가해진다. 투명한 거인의 손아귀에 붙들려 쥐어짜지듯 한 여인의 몸이 찌그러졌다. 그 광경에 기겁한 누군가 총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호흡을 할 수 있게 개조된 김유현 좀비는 외부 충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남의 심장 박동은 이용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심장 박동, 더불어 자기 신체의 모든 소리를 이용할 수 있는 초인은 완벽한 자기방어 수단을 가지고 있다. 김유현의 심장 박동에서 비롯된 음파는 빈틈 없이 촘촘하게 전신을 감싸는 방어막이다. 그리고 호흡을 멈추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반영구적으로 유지된단 말이다.

물컹거리는 무언가와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탄환이 뭉개져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천둥과 같은 총성은 또 다른 충격파가 되었다. 주변에 섰던 모든 각성자들이 형태 없는 충격파에 휘말려 가루가 되었다. 김유현의 공격은 소리와 같은 속도로 이루어지며, 마하로 달릴 수 있는 초인은 일본의 소아성애자를 제외하고는 한 명뿐이다.

이 마에스트로에게서 저항하는 것은 물론이요,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원소를 다루어 일시적인 진공 상태를 만들 수 있는 레베카나 마하로 달릴 수 있는 초인······그러니까, 같은 S급이 아니면 누구도 김유현을 상대할 수 없다.

S급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S급 뿐이다. 여기에 위치한 인물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게다가 그 네크로맨서가 기용한 언데드란 김유현뿐만이 아니다.

"어억-"

옅은 바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빛살이 일었다. 센치미터 단위로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두르고 찌르는 언데드. 그 언데드는 이 전투 속에서 실력을 키우기 위한 연습을 하는 게 아니었다. 허공만 베어대는 검격들은 정확히 적들에게 맞닿았다.

소아성애자 언데드는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김유현 좀비를 도와 적들의 숨통을 끊는다. 과거 크게 다투었던 두 초월적인 초인의 협력이란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다.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뭔가 작전을 짜서 의견을 나눌 수도 없다. 기습을 하려고 들면 특유의 초감각이 발동해 가장 위험한 요소부터 제거한다.

호흡이 지속되어야만 소리를 다룰 수 있기에 잠깐 동안 존재하는 빈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미세한 찰나는 김유현의 유일한 약점이다. 그 약점은 일본인 언데드가 존재하는 한 완전히 커버되었다. 저 두 초월적인 언데드의 조합은 무적에 가까웠다.

현대 군인들을 유린하고 격변 이전부터 세계를 주름잡던 이들은 한 명이 국가에 맞먹는 전력이 둘이나 합쳐진 조합을 당해낼 수 없다. 절대로.

전투가 아니라 일종의 사냥을 하는듯한 학살이 벌어졌다. 영국 거리에 쏟아지는 핏방울들을 보며 나탈리와 제임스, 그 아래의 네크로맨서 연합원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 마이, 갓······."

그들의 눈에 비치는 이 학살의 현장이란 예술적인 광경에 가까웠다.

충성을 넘어 기꺼이 신앙심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각성자 군단은 생존자 하나 없이 싸그리 전멸케 되었다. 영국 거리에서 대놓고 벌어진 이 학살극에 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갔다.

유성연을 지지하겠다 밝혔던 다른 집단들은 물론이요, 레베카 블런트를 설득해 협회로 끌어들이려 영국에 함께 방문했던 로버트 데이비스의 귀에도.

"······오늘 자리는 여기까지 해야겠군. 레베카. 내 제안은 잘 생각해 보도록."

"어디 가는데?"

슈퍼맨은 보기 드물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레베카는 이 분노한 미국인 앞에서 차마 비꼬는 말을 뱉거나, 깔깔댈 수 없었다.

화가 난 협회장이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이 두려운 인물로 변한다. 정말이지 아주.

"심판을 하러."

이 세상엔 늙은 슈퍼맨을 괴롭힐 수 있는 크립토나이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로버트 데이비스는 숨을 몰아쉬며 밖으로 나섰다.

정문이 아니라, 4층 높이의 창문으로.

***

유성연에게 던진 질문을 역으로 받아들인 후, 왕웨이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다.

답을 찾아내지 못한 까닭이다.

과연 수십 년 간 방관자의 자리에 앉아있던 자신은 로버트 데이비스와 무엇이 다른가?

최강자의 반열에 들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란 곧 죄가 아닌가?

모르겠다.

늙은 중국인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그 집단에 머무르고 있다. 하루의 절반을 담배 태우는데 사용하며, 나머지 절반은 힘겹게 살아가고 남을 돕는 이들을 보며 쓰게 웃는다.

왕웨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형편없는 능력을 가졌으며 나약한 자들이 자신보다 더 약자거나, 곧 죽을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해낸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다.

이 집단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여럿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자들은 어쩌면 누구보다 고귀하고 대단한 인물들일지도 모른다. 그때 안혜지가 말했다.

"담배 좀 그만 펴요. 괴수한테 뒈지기보다 폐암 걸려서 돌아가시겠어요."

"다 늙은 몸뚱이, 몸관리해서 뭐하나? 그냥 마음이 복잡하면 피는거지."

그 말에 안혜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살아있을 땐 몸관리 잘 하고 열심히 사는 거에요. 그럼 저 사람들은 뭐가 돼요? 어차피 죽을건데 왜 죽도록 노력해요."

"······그것도 그렇군. 그래, 늙었다는 건 핑계지. 복잡하고 생각도 많은데, 마음 편해지려고 버릇처럼 물고 있는 것뿐이지. 이거라도 태우면 개운해지니까."

"대체 뭐가 복잡하다는 건데요?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시나."

왕웨이는 쓸쓸하게 웃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죄인가?"

"그건 자기 자유죠."

"힘이 있는데도 방관했다면, 죄인과 다르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죄인이에요? 죄 저지른 건 나쁜 새끼고, 아무것도 안한 사람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 뿐이죠."

"아무것도 아닌 사람······그럼 그런 사람은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물을 자격 따위는 없겠군. 시험하거나 조언할 자격도 당연히 없겠고."

"왜요? 자식들이 아무것도 안 하면서 지랄하지 말래요?"

"그런 건 아닌데······모르겠군. 움직이려고 생각하니 이젠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 지켜보기만 한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서 나서는 방법도 잊어버린 것 같군."

"그럼 계속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요."

"그건 싫다."

"뭐예요? 그게."

안혜지가 픽 웃었다. 그러곤 뒤이어 말했다.

"싫으면 뭐라도 해야죠. 거창한 건 못하더라도 사소한 것부터 해나가야죠."

"사소한 것?"

"그 담배 태울 시간에 다른 걸 해요. 그쪽이 제일 잘하는 것, 예전에 가장 잘했던 것들······."

그 말에 왕웨이는 다시금 태우려던 연초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생각했다. 이 늙은 중국인이 가장 잘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제압하는 것.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

그게 과연 자신이 원하는 목적인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제압하며 힘으로 찍어누르고 있는 인물.

로버트 데이비스.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들 중에 그 미국인 차별주의자를 없애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왕웨이는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가장 잘했던 것,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잘할 터인 사람을 죽이는 일.

그 재주는 누군가의 목적을 저지하는데에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

이를테면, 수십 년 가까이 독재자로 군림하며 신인류들로 구성된 낙원을 만들겠다는 그 미치광이의 목적을.

오랫동안 웅크렸다가 정처 없이 떠돌던 초인은 제 할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초인은 여전히 최강자들의 반열에 속해있다.

***

「이름: 김유현」

「판정 등급: S」

「각성능력: 지휘자」

「호흡하는 동안 주변의 모든 소리를 느끼며 지배한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 '소리'와 음파를 다룰 수 있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실수록 능력의 영향력 범위가 넓어진다. 한계치까지 끌어올릴 경우 9초 동안 레베카를 넘어서는 반경을 커버할 수 있다 알려짐.」

「특이사항」

「양아치 출신. 어릴적 소년원을 들락날락하며 폭행이나 절도 전과 다수.」

「S급 판정을 받은 이후로 별다른 활약이 없음에도 낭비벽이 심해 빚이 있었음.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김유현의 구역에서 매달마다 균열 발생에 의한 실종자들 다수 발생.」

「살인사건 피해자. 사망.」

< 언데드 김유현 (2) > 끝

작가의 말

오늘은 분량이 조금 많아용. 읽다가 지치시겠네요 ㅠㅡㅠ

스마트폰 앱으로 대여해서 타는 전동 킥보드를 타다 크게 넘어졌는데 상처가 꽤 심하네요. 사각지대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참 위험한 거 같습니다. 만약 타는 분들이 있다면 조심조심 타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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