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마법사 레베카 (1) >
성연을 필두로 한 공략대가 던전을 내려가는 속도는 전에 비하여 월등히 신속해졌다. 시체들이 즐비한 가운데서 군주의 사체를 연구한 성과가 드러난 덕이었다.
성연은 말하는 괴수, 중간 보스 '칼'의 발성 기관에서 아주 쓸만한 기능을 발견했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강렬한 전투 함성으로 적을 위축시키거나, 음파를 증폭시켜 포효만으로 괴수들의 몸뚱이를 터뜨려 죽이는 거창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했다.
성연은 던전 괴수들 사이에 나름의 의사소통 방식이 있음을 알아냈다. 인간은 들을 수 없는 주파수로 간단한 의사를 나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연구를 끝마쳤을 때, 이 소리를 이용해 놈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통상 괴수들에겐 먹히지 않지만, 던전 괴수들에겐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던전 공략이 완전히 종결된다면 쓸모없어질 능력이나 지금은 아주 유용했다. 괴수의 목소리로 엉뚱한 의사를 전달해 움직임을 방해하고 따로 놀게 만들었다.
던전 괴수들은 이제 일제히 돌격하거나 한몸처럼 행동하지 못했다. 놈들은 제각각 행동하며 때로는 행동이 어긋나 서로를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작은 변화로 공략 속도는 현저하게 빨라졌다.
"이 새끼들, 진짜 멍청해졌는데······."
누군가 감탄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이 네크로맨서는 사체를 쓸만하게 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전투의 흐름을 바꿀 줄 알았다. 그것은 대단한 재능이다. 아주 대단한······.
그리하여 사흘이 지났을 때 공략대는 무려 27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계 기록을 실시간으로 갱신하는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공략대 중 누구도 기쁨에 젖거나 파티 따위를 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만큼이나 빠르게 던전을 내려오고 있으며, 바로 뒤까지 바짝 쫓아온 존재가 있었던 까닭이다.
"방금 비슷한 상황 있었죠? 다른 공략대 입구로 진입하려는······."
"아니, 협회 공략대 새끼들은 대체 어떻게 이리 빠르게······."
그 신속해진 속도에 맞추어 협회 공략대도 따라붙었다.
열 명의 공략대보다 네 배 많은, 총 마흔 명으로 이루어진 엘리트 집단은 빨랐다. 숫자의 차이부터가 역력했으므로 간격이 서서히 좁혀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젠 거의 닿을 듯 좁혀진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성연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배낭에 식량, 물 같은 거 잔뜩 챙겨요. 이러다간 따라잡힙니다. 입구로 귀환하지 말고 30층까지 다이렉트로 공략하죠. 제가 보기엔 저쪽도 귀환 없이, 던전 안에서 휴식하고 정비하면서 단숨에 뚫는 거 같은데······."
"가능할까요?"
"될 거라고 봅니다. 충분히."
그 판단에 반박하는 이나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투덜대는 인원은 없었다. 정말 열 명의 인원으로 세계 최초로 던전 최후까지 공략하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다. 머릿수 채우기로 합류했던 이들은 이제 나름의 의욕을 가진 상태였다. 그들도 이 공략대가 우승하길 열렬하게 원했다. 하루 먹고 사는 것에 감사하던 이들은 새로운 목표를 얻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불가능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 만한 듯 보였다······.
"저는 찬성! 우리 버스 기사님 믿어요!"
안혜지가 소리쳤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말에 다른 공략대원들도 곧 동의했다. 그리하여 27층까지 박살내고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온 이들은 최후의 모험을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하고 정비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성연은 방금 전 거의 따라붙었던 협회 공략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뭔가 이상했어.'
27층에 따라 진입한 녀석들의 태도는 괴수들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달랐다. 그 진형과 자세는 괴수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는 종류의 것이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게다가 모두 괴수의 위치를 살피는 게 아니라 일제히 공략대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던전의 괴수들을 상대하기 위하여 따라온 게 아닌, 그들을 잡으러 온 것처럼······.
심지어 꽤나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마흔에 달했던 숫자는 스물 아홉으로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귀중한 인력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 급하게 내려올 이유가 있나?
30층까지 뚫을 생각이라면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으로 생각해야 할텐데······.
'아.'
생각을 거듭하던 성연은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전력을 아끼며 긴 여정을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괴수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이유······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했다.
협회 공략대가 정확히 1층 앞서가는 그들을 앞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무척 빠른 속도로 그들을 제치는 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있었다.
번거롭지 않고, 아주 손쉬운 방법.
15층 이후의 던전은 열 명 이상이 되어야만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성연을 필두로 한 공략대의 인원은 정확하게 열 명이다.
그러니까, 협회 공략대는 힘겹게 괴수를 죽여 앞지를 필요가 없다. 그보다 훨씬 죽이기 쉬운 한국인 열 명 중 하나의 숨통만 끊어도 대한민국 공략대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 절대로.
놈들의 목표는 자부심 높은 공략대가 사형수 포함된 출신 없는 집단을 제치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최소 인원 제한을 맞추지 못하도록 넘어뜨리고 짓밟는 것이다.
'어찌 되든 우리는 한 명만 죽으면 그대로 게임 끝······이건 꽤 핵심을 찔러오는 작전인데······정의를 수호한다는 협회와는 정말이지 안 어울리는 악랄한······.'
***
협회 공략대가 떠올린 작전은 과연 성연이 추측한 것과 같았다. 그들의 목적은 엘리트 출신답게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앞지르는 것이 아니다. 열 명 중 하나를 죽여, 던전을 내려갈 수 있는 필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위험도 별 네 개로 평가된 바 있는 사형수와 다르게 나머지 아홉 명의 각성자들은 소위 떨거지나 다름없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무리엔 괴수 상대로는 물론이며 인간을 상대할 때도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인물이 있었다.
인류가 정해놓은 기준에서 최고점을 받은, 협회가 꺼내든 비장의 카드, S급 헌터.
영국의 대마법사, 레베카 블런트.
고풍스러운 로브를 걸쳤고 낡은 고깔 모자를 눌러 썼다. 온라인 게임 캐릭터나 입을법한 복장은 이 금발의 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현실에 마녀가 존재한다면 분명 이런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느낌이리라······.
"뭘 봐?"
"아, 죄송······."
"정신 놓지 말고 빨리 가라고! 느려터진 게 이거 완전 머글 같은 새끼······."
물론 레베카의 성격과 사상은 그 외모와 어울리지 않았다. 환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각성자 우월주의자들 중 하나였다.
해리X터라는 소설을 무척 사랑한다고 밝혔으며 거기서 감명을 받아, 비각성자들을 머글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짜증나, 진짜······."
협회 공략대는 굉장히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탱커와 서포터, 딜러의 비율을 비슷한 비율로 맞추는 게 보통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공략대는 탱커 수가 지나치게 많았으며 서포터의 수도 많았다. 그 까닭은 단순했다. 적 섬멸을 담당한 딜러가 하나뿐이니까.
"저기, 저쪽에서 옵니다······."
"나도 알아!"
모든 탱커들이 방패를 들고 레베카를 호위했다. 모여드는 괴수들의 숫자는 많았다. 정말이지 아주 많았다. 마법사 하나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러나 공략대 중 누구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불."
짧게 내뱉은 한음절이 곧 시동어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나를 연료로 하여 생성된 불은 정상적인 화염 마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박수한이 포인트를 때려박아 그 화력으로 밀어붙인다면, 레베카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무식하게 껍질을 태우고 안쪽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대신 정확한 지점에 불길을 일으켰다. 던전 괴수 안구 안쪽에서 일순간 치솟은 고열은 순간적으로 두개골 내부의 뇌를 녹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육체 전체를 박살낼 것 없이 단순한 불길 한 번으로 괴수 하나가 죽었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놈이 넘어져 바닥을 요란하게 뒹굴었다.
구성할 마법을 결정하고 위치점을 정하고, 마법을 발현하기까지 총 0.02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이 반복되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일만큼 시간이 지났을 땐, 더 이상 주변에 살아있는 괴수가 한 마리도 없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누군가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레베카는 그 칭찬이 조금도 기껍지 않았다.
억지 텐션으로 오바하는 그 모습이 꼴보기 싫었을 뿐이다.
"난리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짜증 섞인 그 외침에 모두 기겁하며 명령을 따랐다. 그 재미없는 반응을 보며 레베카는 뒤따라 걸었다.
던전. 원래는 오기 싫었던 곳이다. 서재에서 편하게 책 읽는 것이 낙인데, 뭐하러 이런 냄새나고 귀찮은 지하까지 내려와야 하나? 그녀는 특별히 원하는 소원도 없었다. 어차피 이루고자 하는 건 뭐든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재력, 인맥도 있었다······.
구태여 이 머저리 새끼들과 지하 미궁을 탐험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협회장이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이 공략대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빨리. 뒤쳐지는 건 못 참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러나 지금으로썬 던전 공략에 협조하는 이유가 바뀌었다. 협회장의 부탁 때문에 최선을 다해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인물이 이 던전을 공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형수 유성연.
'D급 출신 주제에······킴을 죽인놈······궁금해, 아주 궁금해.'
무려 협회보다 앞서가는······비공식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세우고 있는 공략대. 거기에 킴,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김유현을 죽인 그 사형수가 있단 말을 들었다.
개인적인 원한 따위는 없었다. 원래 레베카는 그 건방진 동양인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로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S급 헌터를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S급 헌터뿐이다.
그 외엔 어떤 초인도 이 영역에 범접할 수 없다. 과연 인류가 정해놓은 기준에서 가장 최저점을 받은 D급 일반인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였단 말인가······.
레베카는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
"빨리!"
***
공략대의 열의가 전보다 훨씬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던전 공략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했다. 평소 몇 번씩 실수로 불덩이를 빗맞추던 박수한은 9할에 가까운 명중률을 발휘했으며, 김윤기 또한 그 소환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현우도 아주 열심히 총기를 쏴 갈기며 아군을 지원했다.
괴수들이 잔뜩 죽어나갔다.
공략은 무척 순조로웠고 분위기는 좋았다.
괴수들과 한창 싸우던 순간에 성연이 난데없이 후방으로 시선을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왔습니다. 놈들."
"무슨 더 빨라졌어······."
"얼마 안 남았습니다. 확실하게 뚫읍시다. 확실히······."
그리 말하면서도 성연은 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쪽의 목표가 공략대 중 하나를 죽이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주거나 도망만 칠 마음도 없었다.
성연은 괴수들을 죽이고 언데드를 일으키며 생각했다.
'저쪽 숫자가 이젠 스물 여섯까지 줄었다······생존자가 열 이하가 되면 층을 넘어가지 못하는 건 협회 측도 마찬가지다. 그럼 내가 열 일곱을 죽여서 아홉으로 만들면, 결국 저놈들도 층 못 넘어간다······.'
S급 헌터를 상대로 아무도 떠올리지 않을 과감하고도 파격적인 생각이다.
누군가 들었더라면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웃었을테지만, 성연은 이 작전이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소를 먼저 선점하고 자리 잡고 싸운다면 지쳐있는 협회 헌터들 몇 잡아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저분하게 싸우게 되면, 네크로맨서는 유리해진다. 정말이지 아주 많이 유리해진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 대마법사 레베카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