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기범 이현우 (1) >
「오랜 전쟁을 겪으며 인류는 강해졌습니다. 더불어 괴수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일은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라 떼돈을 벌 수 있는 하나의 이벤트가 되었죠. 」
「예. 맞죠.」
「징그럽게 생긴 사체 내부에 박힌 마석과 마력이 듬뿍 담긴 핏물이 화석연료보다 훨씬 효율이 좋을 거라는 사실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마석과 괴수들의 부산물들은 이제 없어선 안 될 자원이 되었죠.」
「맞습니다. 기자들은 끔찍한 적이라고 평가했지만, 현재에 이르러선 누구도 괴수들의 침략이 멈추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뛰어난 헌터들과 용감한 군의 덕이 컸지요. 괴수들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그 침략자들에게 우리가 잡아먹혔을 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실제로 사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원을 이용할 생각은 커녕 균열을 틀어막는 것도 급급했으니까요. 무척 다행이었죠. 그 긴 시간 동안 인류와 다르게 괴수들은 조금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류가 찬란한 발전을 이루는 칠십 년 동안 괴수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덕에, 전문가들의 말대로 미개한 침략자들과의 방어전은 이제 전쟁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가 되었다.
모두 이 사태가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현 상황에서 괴수가 강해진다 하더라도 전황이 뒤집힐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그만큼 인류는 괴수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발전을 이루었다.
밤과 새벽 사이 각성자들의 눈앞에 일제히 떠오른 투명한 창, 그것에 적힌 내용이 실현되더라도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모두가 예측했다.
오히려 괴수로 인한 위험보단 각성자 사회에 야기될 혼란을 걱정하는 자들이 많았다.
「지원···지원 요청 바람!」
평소처럼 투입한 헌터팀이 균열 안에서 긴급 무전을 보내고,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까지도 크게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소한 사고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삼십 년이라는 평화는 위험 속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안전불감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류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한 건 한 시간 뒤였다.
"저게 뭔······."
'능력이 대폭 상향된 괴수'가 균열 속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기껏해야 최대 삼 미터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던 괴수는 그제서야 괴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화했다.
어림잡아도 이십 미터를 넘길 괴수는 한 번의 발길질로 인류가 세운 방어선을 날려버렸다.
그런 것이, 허공에 뻥 뚫린 구멍에서 수백 마리가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소원에 눈이 먼 각성자들이 사회에 야기할 혼란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인류의 종말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죄수들이 벌였던 난리는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났다.
탈출을 시도하려던 수용자 여섯이 교도관들에 의해 참담한 꼴로 제압된 후 그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중앙각성자교도소의 보안이 얼마나 철통같으며 교도관들의 전력이 웬만한 A급 인력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혹시 여길 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꿈깨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종합 검사는 물론이고 배정받을 때까지 얌전하던 사형수 유성연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어제부터 탈옥을 입에 담고 있었다.
이현우는 좁은 운동장 곳곳에 배치된 교도관들을 흘끗 바라보며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말 조심해요. 혹시 교도관들이 들으면 사형 집행 전까지 독방에 갇혀서 못 나올테니까. 유성연 씨는 그 정도로 요주 인물이라고요."
"그래도 나가야 하는데."
"저기요, 유성연 씨. 당신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을지 몰라도 여기선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요."
이현우는 성연의 손목을 가리켰다. 거기엔 녹색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녹색,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이유로 교도소 안의 물건은 대부분 이 색깔이다.
"유성연 씨가 죽여버린 김유현 헌터 기억하죠? 그 팔찌가 김유현 한 트럭 분량의 능력을 억제할 수 있는 구속구에요. 날고 긴다는 각성자들 데려와도 그거 채워진 순간 인간병기에서 민간인으로 변하는거라고요."
"······."
조금 과장된 면이 있었으나 사실이었다.
칠십 년간 이어진 각성자에 관한 연구는 그들의 능력에 대한 파훼법을 만들었다. 복잡한 장치 몇 가지를 다는 것으로 초인적인 힘을 밑바닥까지 억제할 수 있는 구속구.
"완전히 막아둘 순 없고 극소량의 능력은 사용할 수 있다지만···사실 저 까다로운 교도관들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답이 없죠."
"S급 헌터 한 트럭이라···."
"그러니까 꿈 깨요. 다행이라면 여기 밥은 잘 나오는 편이거든요. 여기서 오래 썩으실텐데 식사라도 맛있는 게 어딥니까······."
"거기! 모여있지 말고 떨어져!"
오 분이 넘도록 붙어서 대화를 나누는 두 죄수를 본 교도관이 호통쳤다. 현우는 고개를 숙이며 교도관의 비위를 맞췄다.
성연은 그가 떠나간 뒤에도 가만히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극소량의 능력이라···."
성연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한참이나 힘 없는 걸음으로 운동장을 배회하던 그는 운동 시간이 끝났다는 교도관의 말과 함께 좁은 방으로 돌아갔다.
***
난데없이 각성자들의 시야에 떠오른 정체불명의 창은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처음엔 믿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균열에서 쏟아지는 괴수들의 수준이 유례없이 강력해졌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전해진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중앙각성자교도소의 분위기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칠십 년만에 찾아온 파격적인 이벤트는 안타깝게도 죄수들에게 흥미는 심어주었지만 행동력까지 심어주진 못했다.
애초에 전세계의 각성자들과 경쟁해 소원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각오와 능력이 있었더라면, 갖가지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오는 일도 없었을테니까.
첫날엔 폭동을 일으키려는 무리까지 생겨날 정도였지만 사흘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교도소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충동적이며 끈기가 없고 체념이 빠른 건 범죄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평상시엔 비허가된 각성자용 제압 물품까지 꺼내올 각오를 했던 교도관들과 교도소장은 그 상황이 썩 마음에 들었다.
원래 공무원들은 가늘고 긴 흐름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런 전형적인 공무원 마인드를 가진 두 교도관은 출역 나가는 죄수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교도관이 질문했다.
"유성연 저 새끼 출역 왜 나가요? 사형수들 웬만하면 그냥 두잖아요."
"자기가 거부하면 안 보내는거지. 별말 없으면 내보는게 원칙이야. 다른 놈들에 비해 군말없이 고분고분하기도 하고."
"군말없다고요, 저 악질 새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 말에 선배 교도관이 대답했다.
"말 잘 들어. 존댓말도 꼬박꼬박하고."
"의외네요."
"사형수가 협조적으로 나오면 좋지. 잃을 거 없는 새끼가 작정하면 얼마나 골치 아픈 줄 아냐? 전에 들어온 그 여자 생각만 해도······."
떠올리기만 해도 질색이라는 듯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튼 방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나이 비슷해 보이는 놈이 친구처럼 딱 붙어있으니 안심이지."
"범죄자 둘이 친구 먹는 게 안심입니까? 뭐 꾸밀지도 모르는데."
"저 새끼는 그럴 놈 아냐."
"···예? 저놈이랑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개인적인 친분은 무슨. 이현우 저 새끼, 같은 죄목으로 벌써 여기 세 번이나 들어온 놈이야. 웬만한 교도관들은 다 알아."
"어떤 놈인데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새파란 신입 교도관을 보며 그가 뒤이어 말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될 일은 절대로 안 하는 녀석. 사기치는데 탁월한 능력을 타고났는데 배짱이 없어서 매번 잡혀 들어오는 새끼지. 전에 두 건은 확실한 증거도 없었는데, 몇 번 겁주니까 알아서 술술 실토했다던데."
"아···쫄보네요?"
"어, 쫄보."
이현우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려거든 말려들기 전에 도망치거나 교도관에게 고발해 버릴걸. 우린 저 녀석만 주시하고 있어도 유성연 관리까지 편해지는 거지."
***
"그러니까···협조 좀 합시다, 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사내가 말했다.
상황은 이러했다.
난데없이 덩치 큰 남자 넷이 나타나 성연과 이현우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포위하는 형태로 감쌌다. 그러곤 일방적으로 뭔가 제안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이현우가 듣기에 그 제안은 무척이나 일방적이며 불합리했다. 그는 억지로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저기 형님들. 왜 그러십니까? 이러지 말고 우리 평화적으로······."
"너는 닥치고 있어! 이 새끼야."
이 상황 속에서 이현우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망할, 이딴 사건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다···.
"시선만 좀 끌어주면 된다니까? 딱 3분 정도만. 그러면 우리가 경계 느슨해진 틈을 타가지고 나와서 교도관들 싹 쓸어버리고, 당신까지 도와주겠다고. 그게 힘들어?"
"······."
"어차피 당신 사형수잖아. 평생 여기서 썩어 뒈질텐데 이런 기회라도 잡는 게 좋을걸. 게다가 사형수가 날뛰면 교도관들 최소 열은 달려오는 게 원칙이라, 성공도 거의 확실하다니까······"
"그러니까 총알받이 좀 해달라 그겁니까?"
침묵하고 있던 성연의 말에 사내가 웃었다.
"잘 알아들었네. 가만있으면 뒈질 목숨이니까 좀 도와주는 거 어려운 일 아니잖아. 당신도 소원인가 뭔가 하는 거에 흥미있지 않아?"
"있죠."
"그럼 나가야겠네! 잘 생각해. 이 안에서 우리보다 강한 사람 얼마 없다. 그리고···무작정 하는 것도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사내가 은근슬쩍 바지춤에서 커터칼을 꺼냈다.
이현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 새끼들, 제대로 작정한 놈들이다.
"교도관들 눈만 피할 수 있으면 이 좆같은 팔찌 10초면 끊어버린다. 이것만 없으면 저 교도관 새끼들 나 혼자서도 다 쓸어버릴 수 있어."
"그래요? 그런데 아쉽게도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뭐? 이 씨발, 개새끼야. 지금 이게 너한테 선택권 있는 부탁인 줄 알아······."
공격적으로 변한 사내의 태도에도 성연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 사이에 낀 이현우는 미칠 것 같았다.
시종일관 얌전하던 사람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각성 능력이 봉인된 죄수들 사이에선 평균 신장이 195cm에 몸뚱아리가 죄다 근육으로 이루어진 저 새끼들이 가장 강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잔근육 하나 없는 멸치인 유성연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씨발, 역시 사형수들 중엔 정상인이 없어.'
커다란 사내 넷과 그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놈들은 맨손으로 사람 목을 뽑아버릴 수도 있는 족속들이다.
물론 성연은 동요하기는 커녕, 여전히 덤덤했다.
그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또렷하고도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 팔찌 차고도 여기 교도관들 죄다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
< ★★ 사기범 이현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