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하예진?”
진하는 자신 앞에 서 있는 하예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게, 분명 하예진은 시한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그녀를 보기 위해 병실에 들렀는데 이렇게 일어나 있다니…….
“놀랐어?”
하예진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뭔가 오랜만에 본 진하가 어색한 건지 그녀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전혀 다가오질 못하고 있었다.
툭
“어울리지도 않는 순정만화 찍지 말고 어서 가 봐.”
뒤에서 다가온 송하나가 하예진의 등을 살짝 밀었다. 그러자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하예진.
“너도 뭐 하는 거야. 여자를 기다리게 할거야?”
송하나의 일침에 진하는 엉거주춤하게 하예진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주 가까워졌을 때 진하의 속에 있던 리처드가 답답하다는 듯 진하에게 말했다.
[뭐 해? 껴안아야지.]
리처드의 조언에 따라 하예진을 껴안는 진하, 그렇게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나가고 진하는 천천히 하예진을 껴안은 손을 풀었다.
‘뭔가…… 어색해.’
분명 하예진이랑은 거리낌없이 잘 말하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이런 짓을 시킨 리처드가 문제였다.
하예진도 평소와 다른 상황이 어색한 건지 뭔가 얼굴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그…… 몸은 어떻게 된거야?”
진하는 가만히 서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 분명 죽을 때까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일어난 것은 물론 너무나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야이 밥팅아! 여기서 그런 말을 할 때냐?]
머릿속에서 리처드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기는 했지만 진하는 그 말을 싹 무시했다.
“다 나았어.”
“나았다고?”
진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하예진의 몸은 질병이나 상처가 아니었기에 다 나았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하나가 도와줬어.”
그 말과 함께 뒤에 있는 송하나를 힐끗 바라보는 하예진, 진하는 재빨리 송하나를 쳐다보았다.
“별거 아냐. 그냥 내 수명의 반을 뚝 떼 준 거야.”
“뭐?”
수명을 나누어 줬다는 말, 그게 무슨 뜻인지 진하가 모를 리 없었다. 애초에 그도 하예진과 생명력을 공유한 적이 있었으니까.
“둘 다 살아 있어야 네가 살아올 생각을 하지. 무엇보다 이제는 조금 마음에 짐이 덜하지?”
“그건…….”
확실히 마음에 짐이 덜하긴 했다. 이미 죽을 것을 알고 담담히 받아들인 상태에서의 마음과 사랑하는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상태는 다르니까.
“그러니까 어이없게 뒤지지 말고 신인가 뭔가 죽이고 똑바로 돌아와.”
송하나는 그 말과 함께 진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빙긋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둘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진하에게 가까이 다가온 송하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는 하예진에게 말했다.
“기껏 만났는데 고작 포옹이 뭐니?”
“어? 아니…….”
“아, 맞다. 너 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딱 몇 분만 빌리자. 되지?”
“어? 어.”
순간 저도 모르게 수락을 해버린 하예진, 송하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진하의 멱살을 붙잡고 당겨 키스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아니, 정확히는 피하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피하지 못했다.
“앗! 아니…….”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는 하예진, 진하 역시 당황하면서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어느새 뒷목을 잡은 송하나 때문에 얼굴을 땔 수 없었다.
‘지금 벗어나면 죽을 줄 알아.’
눈을 뜬 상태로 눈빛으로 뜻을 전달하는 송하나, 그 모습에 진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눈을 감았다.
‘일부러 그랬구나.’
일부러 하예진에게 목숨이 빚졌다는 말을 꺼내고 수락까지 받아 냈다. 둘에게 일부러 그 사실을 강조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꼼수였다.
실제로 하예진도 아까 한 말이 있어서 그런 건지 이도 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잠시 후, 진한 키스를 끝낸 송하나가 입술을 때며 손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냈다.
“아무리 너가 본처라도 어영부영하면 내가 잡아먹는다?”
당당한 그녀의 말에 하예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진하와 송하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송하나는 진하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근데 키스 실력 죽었다? 왜 이리 수동적이야?”
송하나의 말에 하예진이 눈을 부릅뜨고 진하를 쳐다보았다. 진하는 그 모습에 당황하며 손을 허공에 가로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아냐, 뭘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아냐.”
하지만 이미 하예진의 눈은 도끼눈이 되었고 송하나는 그런 모습에 쿡쿡 웃으며 하예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밤에도 꽤 다르다?”
“야이 바람둥이야!”
그 말을 기점으로 하예진이 진하를 팔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약간의 살기가 담긴 주먹, 진하는 저도 모르게 피하기 위해 몸을 움찔했다.
[지금 움직이면 배로 맞는다.]
그 순간 들려오는 리처드의 조언, 진하는 피하려던 몸을 억지로 멈추고 타격지점인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퍽!
진한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타격감, 하지만 타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퍽! 퍽!
“뭐? 밤에 뭐?! 도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아니, 난 아무것도 안 했…….”
“아, 밤말고 낮에도 꽤 뜨거웠지.”
송하나가 불난집에 부채질을 하듯 한마디를 더 보탰고 하예진은 그녀의 말에 더더욱 진하를 두드려 팼다.
진하는 하예진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억울한 표정으로 송하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송하나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일이었으니까.
베~
송하나가 자신을 쳐다보는 진하를 보며 통쾌하다는 듯 혀를 내밀었다.
* * *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상황이 정리된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빙 둘러 앉았다.
처음의 어색함은 아까의 일로 이미 날아간지 오래였다.
“자, 이제 일 얘기 좀 해 볼까?”
송하나가 둘을 보며 말했다.
그녀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기는 했지만 반대로 이렇게 마주 볼 시간을 만들어 주고 어색함도 풀어 주었기에 뭐라할 수도 없었다.
“이기수한테 들었어. 이제 곧이라며.”
송하나의 말에 진하는 빠르게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야. 그게 내일이 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오늘일 가능성은?”
“없어. 그랬다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겠지.”
만약 오늘이었다면 잭을 이용해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위치는 아마 게이트가 있던 자리 근처일 거야.”
정확히는 진하가 있는 곳을 찾아서 올 게 뻔했다. 그의 제1 순위 목표는 어디까지나 진하였으니까.
“방법은 봉인, 해야할 작전은 유인인가…….”
“그럼 아예 문방구 근처에 있으면 안 돼?”
하예진의 질문에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처음에는 그 방법을 생각했지만 그건 되지 않을 것이다.
“내일 오후부터는 나에 대한 추적이 가능해질 거야. 근데 문방구 바로 앞에 있으면 당연히 함정인 걸 알겠지.”
관리자가 전 관리자의 작품인 문방구를 모를 리 없었다.
처음부터 그곳 근처에 서성이고 있으면 당연히 문방구에 무언가가 있다는 의심을 할 게 분명했다.
“아마 위치는 게이트가 있는 곳 근처로 해야겠네.”
송하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들키지 않는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관리자를 죽일 듯이 행동하고 나중에 후퇴하듯 유인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문제는 들키지 않게 유인하는 건데…….”
“목숨을 걸어야지.”
어설픈 방법으로 유인될 리 없었다. 실제로 관리자를 죽일 듯 싸우고 도망가야만 그나마 유인이 될 듯싶었다.
‘적어도 팔, 다리 하나는 내주고 도망가야지.’
그래야 관리자가 의심하지 않고 진하를 쫓아올 테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하예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만약 쫓아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진하가 추적 1순위라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만 봐도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올 수 있는데 일부러 오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즉, 실제로 둘이 마주쳤을 때 관리자가 진하를 쫓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야.”
몸 한두개를 걸긴 해야했지만 그 정도로는 살짝 부족했다. 더욱 속는 게 아니라고 믿게 할 방법, 그건 관리자의 목숨을 위협하는 거였다.
그래야 관리자도 진하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테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게?”
송하나의 질문에 진하는 고민하던 말을 꺼냈다.
“부산의 절반을 포기해야지.”
“부산의 절반을?”
진하에게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에 하예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결국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관리자, 아니 신이야.”
할머니에게 들은바, 몬스터는 결국 점차 수가 줄게 된다.
게이트가 사라지고 관리자 또한 직책에서 내려왔기에 따로 인과율을 소모하지 않는 한 늘어나진 않을 텐데 그가 몬스터들을 흡수해 인과율을 얻으려 하면 얻으려 했지 쓰지는 않을 거라 했다.
“그러니까 지킬 곳을 줄이고 헌터들을 동원해야 해.”
“남은 시민들은?”
“대피소를 이용해야지.”
진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대피소를 이용한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대피소가 사람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헌터들이 모두 죽어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어설프게 소수만을 모아 공격하는 건 개죽음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리자를 죽인 후 땅을 회복시킬 중요한 헌터 전력을 제외한 다른 모든 헌터를 동원해 그를 조금이라도 방해해야 했다.
“좋은 작전이네.”
송하나가 진하의 작전에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이하의 헌터가 어차피 관리자에게는 똑같다면 저급 헌터도 시선을 끌며 싸우는 게 제일 좋긴 했다.
고급 헌터는 나중을 위해 남겨 놓고.
“주 타격을 주는 건 이기수랑 레이나, 그리고 너지?”
“응, 그래야지.”
관리자에게 타격을 줄 만한 존재는 그렇게 3명밖에 없었다.
“예진아 너는 그 셋만 치료를 전담해.”
“뭐?”
“다른 사람들 치료하느라 힘 빼지 말라고.”
다른 헌터야 어차피 다른 회복계열 각성자들이 치료하면 됐다. 아니, 솔직히 한 방에 죽을 테니 상관없었다.
그러니 가장 능력치가 높은 하예진은 3명을 제외하고는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난 못해.”
하예진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참여하고 치료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살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무시하고 3명만 마크하라는 건 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진하가 죽어도?”
송하나의 말에 하예진이 순간 움찔 했다.
“잘 들어. 3명을 보조하는 게 사람들을 더 많이 살리는 길이야.”
“…….”
“참고로 송준하 씨도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단순히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헌터들에게 3명을 중심으로 행동하라고 전달했을 것이다.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잘 생각해.”
말을 마친 송하나가 하예진의 어깨를 토닥인 후 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송준하 씨는 헌터 말고 어떤 걸 또 지원하겠데?”
“어? 아니, 아직 안 만났는데?”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송준하를 만나지 않았는데 하예진이 있는 곳을 진하가 알 리 없었으니까.
“그럼 여기는 어떻게 안 거야?”
“아, 그게 할머니한테 물었지.”
“할머니?”
모든 걸 거의 다 아는 사람을 두고 굳이 송준하에게 물으러 갈 필요는 없었기에 대화가 끝난 후 진하는 할머니에게 위치를 물어봤었다.
당연히 위치를 알고 있는 할머니는 간단하게 대답해 줬었고 진하는 곧바로 이곳에 찾아온 거였다.
“하아……. 준비해. 곧바로 송준하 씨에게 가게.”
이미 송준하와 어느정도 이야기를 끝내고 정보를 전달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 이 이야기 자체가 완전히 진하 혼자서만 결론을 냈다는 거였다.
‘송준하를 설득시키려면 조금 힘들겠네.’
* * *
다음 날 오전, 송하나의 아티팩트를 이용해 문방구로 돌아온 진하는 이미 준비를 마친 일행을 쳐다보았다.
“준비는 다 됐어?”
“어느 정도?”
진하의 질문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 봐야 별 거 없었기에 뭘 할 것도 없었다.
“다른 헌터들은?”
“오늘 12시 전에는 도착할 거야.”
어제 늦은 저녁에 출발했으니 하루면 충분히 도착한다고 했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을 때도 경기도로 진입하고 있다고 했으니 시간상으로는 충분했다.
“아마 바로 오겠지?”
이기수의 질문에 진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위치가 특정되자마자 바로 올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짤랑!
“이거 받으세요.”
레이나가 진하에게 재사용 대기시간이 끝난 텔레포트 귀걸이를 넘겨주었다.
진하는 귀걸이를 받아 귀에 착용하며 물었다.
“근데 잭은요?”
진하의 물음에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작은 방을 바라봤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나오는 잭, 그의 모습에 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뭐냐?”
얼음으로 만든 팔다리를 이용해 나온 잭의 모습은 전투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환자가 할 복장은 아니었다.
“나도 싸우려고. 어차피 몸은 다 나았거든.”
“너 아직 환자야.”
물론 할머니를 통해 몸이 다 났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사지가 잘린 환자였다. 아무리 얼음을 이용해 움직이며 싸운다 한들 그리 강력한 힘을 발휘하긴 어려웠다.
“C급 헌터까지 모조리 동원해 놓고 그 말이 통할 것 같아?”
“그래도 너는…….”
“어차피 시간 끌기가 필요한 거라면 내가 더 낫지. 나는 적어도 모기 정도는 될 테니까.”
확실히 아예 아무것도 안 먹히는 헌터들과 달리 잭 정도면 적어도 신경을 건드릴 수준은 되니 없는 것보단 낫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이기수를 보니 그 역시 설득에 실패했는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하아……. 네 맘대로 해라.”
시간도 없는데 설득할 자신이 없는 진하는 백기를 들었다. 애초에 잭의 말에서 틀린 점이 하나도 없기도 했으니까.
“네가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잭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나왔고 그 모습에 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