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문방구에 도착한 일행은 서로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묻고 싶은게 많았지만, 문방구로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묻기에는 할머니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으니까.
“뭐 하냐. 손님 대접 안 하고.”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재빨리 문방구의 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열린 문으로 들어갔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드르륵, 탁! 탁!
진하는 재빨리 사람들이 앉을 의자를 가져와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했고 이기수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잭을 눕혀 놓았다.
“이곳도 많이 바뀌었네.”
의자에 앉은 할머니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에 맞게 써야 하니까요.”
진하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회귀 당시 그가 들어갔던 문방구와 지금의 문방구는 그만큼 많은게 바뀌어 있었다.
우선 문방구를 가득 채우던 물품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할 만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중간에 존재했던 가판대도 진하가 치운 지 오래였다.
양쪽 벽에 앙상하게 남아 있는 선반과 냉장고를 제외하고는 문방구는 예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보다 넓어져서 둘러앉기에는 좋구나.”
“가판대를 안 치웠으면 이만큼 사람이 들어오기도 힘들죠.”
“뭐 그렇다고 맘에 들었다는 건 아니야.”
할머니의 타박에 진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이제 저희에게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잭을 눕혀 놓고 나온 이기수가 빈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말 못 할 분위기로 문방구까지 그들을 끌고 왔으니 이제 말해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응? 누가 들으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알려 줬다고 생각하겠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이곳까지 오면서 아무런 질문도 하지 못하게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할머니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녀의 말에 이기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할머니는 문방구로 오는 동안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긴 했다.
그저 무거운 분위기로 문방구를 향해 계속 걷기에 셋 모두 아무런 말도 못 꺼낸 거지.
“난 너희들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말라고 한 적 없단다, 흘흘.”
할머니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이기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은 그만 치시고,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진하가 자세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그에게 모든 걸 맡긴 게 할머니였다. 그가 찾아가면 모를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 찾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뭐, 별거는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이제 곧 결판이 날듯하니 온 거지.”
“조언을 해 주러?”
진하의 말에 할머니가 빙긋 웃었다. 진하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급해 보이긴 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현재 관리자의 상태랑 이기는 법이에요.”
“관리자의 상태는 네가 예상하는 거 맞다.”
“진짜로 본체로 내려왔다고요?”
“그래, 나도 그 부분은 참 놀랐어.”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체가 내려왔다는 말은 솔직히 말해서 좋다고 말하기엔 애매했다.
“아바타보다는 당연히 쌔겠죠?”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
고작 분신보다 본체가 약할 리 없었다. 물론 관리자라는 자리를 박차고 내려왔기에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체는 본체였다.
아무리 강해졌다지만 인간이 버틸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마 승률로만 보자면 한 1 프로는 되겠구나.”
“그럼 그 승률을 높이는 방법은요?”
“없다.”
관리자를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면 이미 그녀가 처리했을 것이다.
지금 관리자는 단순히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선을 넘어 버린 상태였으니까.
“그럼 왜 오신 건데요?”
진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가 단순히 진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앞으로 있을 관리자와의 전투에서 뭔가 조언할 게 있으니 온 것이겠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서 왔지. 뭐부터 들을 테냐?”
“음…… 좋은 소식?”
“그놈이 관리자를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새 관리자가 생길 거다. 그전에는 다른 존재가 대신 맡을 거고.”
“좋은……건가요?”
“우선 대타로 온 관리자가 그놈을 가만두지 않겠지?”
그 말은 시간만 지나도 자연스레 관리자가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건 좋은 소식을 넘어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진하는 마음을 풀지 않고 곧바로 다음 얘기를 꺼냈다.
“나쁜 소식은요?”
“나쁜 소식은 대타가 오는 데만 해도 약 100여 년이 걸릴 거란 거다.”
할머니의 말에 진하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100년, 그 정도의 시간이면 진하가 죽고 난 이후의 시간이었다.
아니, 관리자가 인류를 멸망시키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그에게 하등 도움이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소식이었다.
지금 당장 관리자와 싸워야 하는 데 100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흘흘, 설마 내가 이유 없이 이걸 알려 줬으리라 생각하느냐?”
“그럼…… 100년을 버틸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나의 질문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죠?”
이기수가 다급히 일어나며 물었다. 할머니는 그런 이기수에게 손가락을 까딱해 순식간에 강제로 진정시킨 후 말을 이어 갔다.
“간단해. 봉인하는 거지.”
“봉인이요?”
“신이라는 존재는 봉인이 가능한 건가요?”
할머니의 말에 둘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이 가능하다. 다만, 그냥은 안돼. 조건이 필요하지.”
“그 조건이란 게 뭐죠? 아니 봉인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죠?”
“봉인은 여기다 할거란다.”
할머니는 제자리에서 작게 발을 굴렀다.
그 모습에 진하는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봉인이 가능하다면 왜 애초에 알려 주지 않았죠?”
진하에게 얘기해 줄 기회는 얼마든지 넘쳤었다.
처음 관리자의 존재에 대해 알려 줄 때 알려 줄 수도 있었고, 문방구를 물려받을 때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할머니와 사서는 관리자의 아바타를 죽이라고만 할 뿐 봉인하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었다.
“그거야. 그놈이 관리자를 때려치워서 그렇지.”
“그것만으로도 많은 게 바뀌는 건가요?”
“암, 많은 게 바뀌지.”
관리자란 이 차원을 관리하는 자, 당연히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차원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원한다면 알 수 있었고, 시간이 걸릴지언정 원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창조하거나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문방구를 이용해 봉인한다고 한들 오래 유지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놈은 이제 그냥 자격을 가진 존재일 뿐이야. 그러니 가능하다.”
“조건은요?”
“당연하게도 어느 정도 힘을 빼야겠지. 봉인에는 시간이 걸리니까.”
“요컨대 봉인이 완료되는 동안 못 움직이게 해야 한다?”
“정확히는 이곳에서 못 나가게 해야지. 그럼 봉인되서 저 작은 방에 갇힐 거야.”
관리자를 이곳까지 끌어들이고,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점, 확실히 미친 듯한 난이도를 가진 조건이었다.
당장 전투 자체도 성립이 어려운 수준인데 이곳에 넣어야 했으니까.
“뭐, 그래도 죽이는 것보단 낫네요.”
결국, 안에만 넣고 잠시 동안 나가지만 못하게 하면 된다는 소리였다.
죽이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더 나은 조건이긴 했다.
“근데 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이기수가 손을 들며 말했다.
“뭐냐?”
“관리자를 그만둘 수 있는데 왜 그놈은 그렇게 인간을 못 죽여서 안달인 거예요?”
진하한테 설명을 들었을 때나 직접 마주쳤을 때 분명 관리자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인간을 죽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관리자를 때려치울 수 있다면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 새로운 관리자가 임명되면 기존 관리자는 죽으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살아있잖아요.”
할머니 역시 전 관리자였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 자리에 그녀가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보통은 유예 시간을 주지. 바로 죽진 않고 100년에 걸쳐 천천히 죽는단다. 일종의 전관예우지.”
새로운 관리자가 임명되면 보통 전 관리자는 100년 뒤에 알아서 죽는다.
전관 예우이기도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새 관리자가 혹여나 모르는 부분을 전 관리자가 도와주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시간이기도 했다.
“그럼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10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정말로 관리자를 하기 싫었다면 벗어던지고 100년만 행복하게 살다 죽으면 되는 거 아닌가?
“100년은 인간들에게나 긴 시간이야.”
아무리 못해도 수만 년 이상을 살아가는 게 관리자였다. 당연히 100년은 매우 짧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관리자를 넘겨주고 나서는 무언가를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딱 평범한 인간 수준만 허락됐다.
“생각해 봐라. 너한테 남은 수명이 1년도 안 되고 그 기간 동안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면 선택할 것 같으냐?”
극단적인 페널티였다. 정신은 인간들이 말하는 신에 가까운데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일일 뿐이었다.
이기수의 질문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진하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이해가 안 되는 게 두 개가 있어요.”
“100년이랑 내가 힘쓰는 거?”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하, 할머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 첫째로 100년이란 건 관리자가 임명되고 나서다. 이곳으로 100년 뒤에 오는 건 임시 관리자고.”
한마디로 대타가 온다고 해서 지금의 관리자가 죽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편법을 썼지.”
그녀가 관리자를 역임한 것만 수십만 년이 넘어갔다.
관리자의 평균 수명이 10만 년 내외인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긴 시간이기도 했고 그 기간 동안 그녀가 퇴임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은근히 창조신이 만든 규칙은 허술한 면이 많아서 잘만 이용하면 편법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으마. 그리고 아해야.”
할머니의 부름에 레이나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봤다.
“많이 혼란스럽더냐?”
“네…….”
진하나 이기수에게 아예 아무런 말도 듣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은 건 처음이었다.
이기수나 진하가 설명했을 당시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이 쏙쏙 이해가 되는 한편 정리가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너는 대부분의 기억을 잃을 거다.”
“네?”
“정확히는 네가 뭘 해야 하는지는 기억해도 왜 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할 거야.”
이것이 자격이 없는 사람의 비애였다. 아무리 바로 옆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어도 그 이후로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 당시의 기억을 아주 오래전 뿌연 추억처럼 뭔가 있어다만 기억할 뿐 아무것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내 특별히 네 기억을 남겨 주마.”
레이나 정도의 수준이면 적어도 자격을 얻기 직전의 상태였다. 여기서 아주 조금만 손을 쓰면 기억이 날아가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 주랴?”
“네, 해 주세요.”
사실 지금 머릿속이 하나도 정리가 안 되긴 하지만 레이나는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았다.
복수를 하는데 자신이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을 테니까.
“알았다. 그나저나 이제 얘기할 것도 다 했구먼.”
할머니는 허리를 두드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하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가시게요?”
“그럼 가야 되지 않겠냐.”
“어디로요?”
“이번에 부산에 좋은 터 하나를 마련했어.”
“그럼 가시는 길에 저도 같이 좀 데려가 주시죠? 부산에도 들려야 하는데.”
텔레포트를 쓰려면 며칠이 걸릴지도 몰랐고 당장 송준하와 송하나도 만나야 했다.
물론 전화를 통해 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직접 만나는 게 좋았다.
“부산으로 가게?”
“어, 거기에서도 해야 할 게 있어서. 너는 잭 좀 보살피고.”
그와 동시에 레이나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이기수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면 내 손이나 얼른 잡거라.”
할머니의 재촉에 진하는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붙잡자마자 장소가 빠르게 변했다.
<부산역>
“성격 급하시네요.”
“데려다줘도 뭐라 하는구나.”
할머니의 핀잔에 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할 말이 뭐예요?”
“뭐? 무슨 소리냐?”
“할 말이 있으니까 저를 데려오신 거 아니에요.”
그가 아는 할머니는 이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얘기하는 도중에도 애매한 설명이 많아서 분명 따로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아무튼, 눈치만 빨라졌구나. 근처 카페나 안내하거라. 거기서 얘기나 나누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