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관리자의 말에 레이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위험해.’
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밖에 없었다. 여지껏 싸우면서 보자마자 필패라는 생각이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필패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레이나가 조심스레 관리자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관리자는 레이나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어딨냐고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잭의 말에 관리자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벽이 부서지며 사방이 확 트였다.
“거기 뒤에 있는 내 자식아, 말하거라.”
“창조주…….”
뒤에 있던 헤라클레스가 이를 갈며 관리자를 바라봤다. 그를 본 건 처음이었지만 헤라클레스의 본능이 그를 창조주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말에 잭과 레이나의 표정이 더더욱 굳어졌다.
그가 창조주라고 말할 만한 사람은 떠나기 전 진하가 말했던 신뿐이었으니까.
“진하 씨를 찾는 건가요?”
“흠, 이제야 알아듣는군.”
관리자의 눈이 스르륵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딨지?”
“그걸 말할 의무는 없지 않나요?”
레이나의 말에 관리자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리자마자…….
쾅!
“잭!”
헤라클레스가 관리자에게 주먹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잭은 헤라클레스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자마자 레이나의 귀걸이를 붙잡고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의 말과 동시에 사라지는 레이나, 잭은 쓴웃음을 지으며 헤라클레스의 주먹을 한 손으로 막은 관리자를 쳐다봤다.
관리자는 무덤덤하게 잭을 쳐다보다가 이내 주먹을 내뻗은 헤라클레스를 살짝 밀었다.
쿠당탕!
헤라클레스가 잭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다.
“흠, 위치는 한국인가? 그놈도 한국에 있겠군.”
관리자의 말에 잭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어디로 보냈는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알아낼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왜 남은 거냐?”
몸을 일으킨 헤라클레스가 잭에게 물었다. 그가 원했던 건 잭과 레이나 둘 다 이곳을 벗어나는 거였다.
“안타깝게도 그 아티팩트는 1인용이라서 말이야.”
누구나 만지면 사용할 수 있지만 이동하는 대상은 오직 착용자에 한하여 발동되는 아티팩트였다.
“후, 설마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줄이야. 그것도 너랑.”
“그러게 말이야.”
둘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한 편, 관리자는 그러든 말든 레이나가 이동한 곳을 근방으로 진하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 관리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다른 인간들과 달리 유독 진하의 흔적만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이번에 분신의 흔적을 따라 겨우 추적해 찾아왔건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가기 전에 이곳도 정리하고 가야겠군.”
어차피 놈은 독 안에 든 쥐였으니 이곳의 인간들을 정리하고 가도 상관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어차피 인과율도 부족했기에 채우고 갈 필요가 있었다.
“마침 좋은 먹이도 있고 말이야.”
관리자의 눈이 자신을 보며 긴장하는 헤라클레스에게로 향했다.
“자, 그럼 너의 몸을 바치거라.”
* * *
“왜 연락이 없었어!”
다녀왔다는 말에 이기수가 진하에게 뛰쳐나오며 말했다.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소식을 전달할 방법이 딱히 없었어.”
관리자로 인해 미국은 완전히 초토화됐기에 따로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가져왔던 편지 아티팩트도 다 썼기도 했고, 잘못 연락하다간 관리자에게 들킬 가능성도 높았다.
“그나저나 너한테 들을 게 있어.”
“나도 너한테 말할 거 많아.”
“중요한 거만 간추려 얘기해 봐.”
“하예진이 깨어났고, 현재 살아있는 생존자들이 모인 곳은 부산, 그리고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 전 관리자?”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아니 어디서?”
“아스트라페를 얻으러 갔을 때, 게이트 내에서.”
“그거 자세히 말해 봐.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
마침 진하가 이기수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도 헤라클레스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내가 아스트라페를 얻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만났었어.”
“헤라클레스와 같이?”
“아니, 혼자서 만났어. 거기서 그분이 그러더라. 헤라클레스를 살리라고.”
“이유는?”
“이유는 말하지 않으셨어. 그냥 살리라고만 했지.”
“그걸 그냥 받아들였다고?”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그때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를 만나고 이야기를 들은 후 그냥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추후에 서먹해진 레이나와의 오해를 푸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었다.
“이 부분은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겠네.”
진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할머니에게 직접 이유를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직 남아 있으려나?’
진하는 자신이 갔던 집이 남아 있을지 잠시 걱정했지만 이내 걱정을 털어 버렸다.
낡디낡은 문방구조차 수많은 건물들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살아남을 만큼 튼튼했는데 할머니가 머무는 곳이 안 멀쩡할 리 없었다.
“아, 그리고 이거 페널티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문방구 알바의 페널티가 생각났다.
솔직히 말해서 문방구 주인이 된 이후로 페널티와는 관계가 없어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아 맞다. 미안. 근데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해.”
문방구 주인이기는 했지만, 그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었다. 고작해야 페널티로 문방구에 머무는 시간을 0으로 만들어 주는 게 다였다.
“일단 머물러야 하는 시간은 0으로…….”
[김진하!]
그때, 문방구 너머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이름과 익숙한 목소리에 진하는 밖을 내다보았고 이내 밖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드르륵! 쾅!
다급히 문방구 밖으로 나온 진하는 하늘에서 미친 듯이 불을 뿜어내고 있는 레이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나?”
이곳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의 모습에 진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이기수에게 말했다.
“신호 좀 줄 수 있어?”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하늘을 향해 번개를 쏟아 냈다. 그러자 레이나가 이쪽을 훽 하고 돌아보더니 빠르게 그들에게 날아왔다.
“무슨 일…….”
“아티팩트! 텔레포트 아티팩트 내놔 봐!”
다급히 진하의 손을 붙잡고는 반지를 빼내는 레이나, 하지만 이미 사용한 아티팩트를 곧바로 사용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한국에 텔레포트 아티팩트 있죠! 당장 내놔 봐요!”
진하가 낀 아티팩트가 쓸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레이나가 다급히 이기수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기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녀의 말에 빠르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텔레포트 아티팩트는 부산에 있어요.”
이기수의 말에 레이나는 다급히 화염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쳤고 진하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거기까지 너무 멀어!”
부산까지 그녀가 못 날아갈 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부산으로 가는 정확한 길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날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따악!
그 순간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레이나가 멈춰 섰다.
“아해야. 그렇게 급하게 행동해서는 될 것도 안 된단다.”
진하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죠?”
갑작스런운 그녀의 변화에 원인이 할머니라는 것을 캐치한 진하가 다급히 물었다.
“별거 아냐. 그냥 흥분한 감정을 차분하게 만들어 줬을 뿐이다.”
그녀의 말대로 레이나는 그저 차분해지기만 한 건지 멍하니 있던 정신을 수습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당장 독일로 갈 방법이 필요해요. 지금 당장이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다급한 그녀의 행동에 진하가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은 할머니가 대신했다.
“관리자가 나타났어.”
관리자라는 말에 진하와 이기수가 놀랐다. 하지만 그들이 무언가를 더 묻기도 전에 할머니가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늦었어.”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레이나가 할머니를 노려보며 말했다. 할머니는 그런 레이나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모를 리가 있나. 내 후임인데 내가 가장 잘 알지.”
“후임?”
“아, 간단하게 말하면 신이라고 말하면 될까?”
할머니의 말에 레이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신이면! 신이면 당장 저를 독일로 보내 줄 수 있죠?”
“보내줄 수야 있지. 하지만 우선 진정 좀 하게.”
할머니의 말에 맞춰 다시 흥분하려던 레이나의 감정이 훅하고 식었다.
레이나가 다시 진정된 것을 확인한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가도 개죽음이야.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요?”
“그래. 자네가 가도 그곳에 있는 인간들의 죽음은 막을 수 없어.”
사형선고와 같은 말에 레이나가 스르륵 무너졌다.
사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관리자를 처음 봤을 때 그녀가 느꼈던 위압감은 제우스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녀가 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고 짧은 시간이 지났지만 벌써 잭과 헤라클레스가 당했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포기하지 못한 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우선 해야 할 건 게이트가 있던 곳으로 가 보거라.”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말에 셋의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관리자가 재밌는 짓을 한 것 같구나. 그리고 지금 가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누구를요?”
“잭이라는 아이였던가?”
할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레이나가 다급히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하와 이기수도 그녀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다급히 게이트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이게 무슨 일인 건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갑자기 관리자가 독일에 나타난 거 하며 할머니가 나타난 것까지 머리가 상황을 못 따라가고 있었다.
그건 이기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게이트 쪽으로 달려가는 그의 표정 역시 매우 복잡해 보였다.
“저깄다.”
한참을 달려 게이트가 있던 자리 근처로 도착하자마자 이기수가 저 멀리 보이는 레이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은 빠르게 레이나에게 달려갔고 이내 치료제를 뿌리고 있는 레이나와 그 아래 쓰러져 있는 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둘이 본 잭의 모습은 처참하다 못해 할 말을 잃을 수준이었다.
사지가 없는 것은 물론 살아있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온몸이 난자되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얼굴뿐이었으나 그건 관리자가 일부러 내버려 둔 듯싶었다.
“이런…….”
이기수가 다급히 자신의 파우치에서 홀리 포션을 꺼내 잭에게 뿌렸지만 포션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비켜 봐.”
진하는 잭의 앞에 앉은 후 빠르게 요요를 꺼냈다.
―강제 리턴.
곧바로 기술을 시전하자 처참했던 잭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레이나의 얼굴에 작게나마 화색이 돌았지만 곧이어 빛이 사그라들며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가려고 하자 다시 푸르죽죽하게 변해 버렸다.
“가망이 없어.”
기술을 시전한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강제 리턴 자체가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능력을 지녔는데 이것조차 안 된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봐야 했다.
“에휴…….”
따악!
그 순간 들려오는 한숨 소리와 손을 튕기는 소리.
딱 소리가 들리자마자 가망이 없었던 잭의 몸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며 난자됐던 몸이 급속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놈이 죽었다간 아예 얘기하기도 힘들겠구나. 쯧, 인과율을 이런 데 써야 하다니…….”
어느새 그들의 곁에 온 할머니가 한심하다는 듯 셋을 바라봤다.
“가, 감사합니다.”
“됐다. 그놈이나 들고 따라와라. 시간 없으니까.”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진하가 완전히 회복된 잭을 바라봤다. 여전히 사지가 찢겨져 있고 상처가 가득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출혈도 없고 혈색도 좋았다.
“참고로 사지를 붙여 줄 생각은 없다.”
진하의 생각을 알아챈 건지 할머니가 덧붙여 말했다. 그녀의 말에 진하는 순간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에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유치한 짓을 하는 건지.”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문방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자.”
진하는 둘에게 갈 것을 종용했으나 둘은 못 박힌 듯 가만히 잭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하는 그들을 따라 잭을 쳐다봤고 곧이어 엉겨 붙은 피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상처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배에 난 상처는 길게 이어져 마치 하나의 문구처럼 새겨져 있었다.
<곧 가마.>
관리자가 진하에게 남긴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