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93화 (193/202)

#193

“휴…… 더럽게 힘드네.”

하루 종일 성벽 외곽을 돌고 온 잭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거의 매일 도시를 한 바퀴 도는 게 힘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한곳이 뚫릴뻔했었으니까.

“고생했어. 그래도 네 덕분에 도시가 유지되고 있는 거야.”

잭의 푸념 어린 소리를 들은 레이나가 짧게 잭을 칭찬해 줬다. 만약 잭이 아니었다면 도시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소리 듣고 싶어서 한 말 아니야. 그리고 힘든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잭이야 이 도시 한 곳만 돌면 됐지만 레이나는 이곳 말고도 근처에 인접한 도시 두 곳을 매일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른 일까지 병행하는 바람에 잠도 하루에 2시간 잘까 말까 하는 걸 옆에서 보다 보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을 말릴 수도 없었다.

그녀가 빠지면 다른 도시들이 많이 위태로워지니까.

“그나저나 다른 나라들은 어때?”

“다른 나라들도 대부분 무너졌어. 우리처럼 도시 형태로 남은 곳도 거의 없고.”

“완전히 재난이네.”

지금이야 아직 괜찮지만 시간이 지나면 식량도 부족해질 것이다. 아니, 당장만 해도 식량이 줄어들어 위험해지고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이놈의 몬스터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어요.”

게이트 안에서 몇 년에 걸쳐 잡아도 다 못 잡은 게 몬스터들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 몬스터가 넓게 퍼졌으면 적어도 습격이라도 뜸해야 하는 거 아닌가?

“땅이 넓어서 이 정도인 거야. 그걸 다행으로 알아.”

게이트가 없는 아프리카 대륙 쪽은 아직 몬스터의 습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버티고 있는 거였다.

만약 그곳조차 무너졌다면 그곳에서 식량을 조달하지도 못하고 여지껏 버텼던 반년은커녕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하아, 알긴 하지만 끝이 안 보이니까 하는 말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사실상 게이트에서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하고는 다른 아시아 대륙은 거의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 이대로면 앞으로 1년을 버티기도 힘들었다.

“잔소리 말고, 준비나 해.”

“준비? 설마 교섭에 성공한 거야?”

잭의 질문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걸 내줘야 했지만 어찌저찌 교섭에는 성공했다.

“이집트 쪽의 땅을 받기로 했어. 최전선에서 몬스터가 몰려오는 걸 막아 주는 게 조건이야.”

“거길 막는다고 다 막는 건 아닐 텐데?”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들어가는 육로는 확실히 이집트밖에 없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곳만 막는다고 모든 몬스터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모로코 쪽만 해도 바다로 막혀 있다고는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까지 고작 40여Km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정도 거리는 비행 몬스터만 해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쪽이 알아서 막겠지. 거기라도 각성자들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우리로서는 적어도 이곳을 벗어나는 것 자체로 감사한 일이야.”

유럽은 현재 몬스터로 괴멸에 가깝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각 나라가 겨우 도시 한두 개만 살려서 버티고 있는 형식이니까.

똑똑!

갑작스런 노크에 둘의 대화가 끊어졌다. 레이나는 문 쪽을 보며 짧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레이나의 허락에 열리는 문, 직원 한 명이 들어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내가 중요한 일 아니면 다 거절하라고 했지 않았나요?”

“그게 중요한 손님 같긴 해서요.”

직원도 이게 중요한지 아닌지 헷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그 직원 뒤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진하, 그 모습에 레이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가 보셔도 돼요.”

진하는 직원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에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도 좋다는 표시를 했고, 직원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미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레이나는 빈 소파에 앉은 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마지막 소식은 분명 미국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아직 남아있거나 한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유럽에 있었을 줄이야…….

“미국에 있던 거 맞아요. 유럽으로 넘어온 거지.”

진하의 말에 레이나는 어떻게 넘어왔냐라고 물어보려다가 진하의 소환수를 생각해 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대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미국 쪽은 어떻게 됐죠?”

그날 미사일을 날리기로 약속했던 모든 나라들이 결국 미사일을 날리지 못했다. 미사일을 날리려 했을 때 게이트가 터져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미국도 게이트가 터졌을 게 분명한데 연락이 끊겨 아무런 정보도 없어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전멸.”

“네?”

“살아남은 사람 없다고요.”

지난 반년간 진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사람의 흔적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남은 인간을 봐도 얼마 되지 않아 관리자가 모조리 그들을 없애 버렸다.

물론 모든 아메리카 대륙을 모두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진하의 추측 상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했다.

‘몬스터도 없겠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고, 요청할 게 하나 있어요.”

“거절하죠.”

진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나가 즉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진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게 무슨 제안이든 도와줄 여유가 없어요.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건 맞아. 우리도 여유가 없긴 해.”

레이나의 말에 잭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진하가 그들에게 은혜를 준 인물이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해 줄 수 없다.

“그리고 진하도 어서 한국으로 가는 게 어때? 거기도 상태 안 좋다던데.”

실시간으로 연락을 받지는 못하지만 다른 나라의 소식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한국은 그 어떤 곳보다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당장 살아남은 도시만 해도 부산이 다였으니까.

“한국으로는 갈 거야. 다만 레이나 씨를 데리고.”

진하의 말에 레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진하가 꺼낸 말은 설득이 아니라 확답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이미 거절했음에도 그녀가 갈 거라는 걸 확신한다는 거였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확신이라기보단 갈 수밖에 없는 거죠. 모두 다 멸망하기 싫으면.”

진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레이나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이내 부릅떴다.

“설마…….”

“네, 신이 내려왔어요.”

진하가 짧게 답했다. 사실 신이라기보단 관리자지만 그렇게 해서는 못 알아 들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제가 가야 하죠?”

“안 가면 독일은 물론 다 죽을 테니까? 아메리카 대륙에 왜 사람이 모두 없어졌을 것 같아요?”

진하의 질문에 레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메리카 대륙이 전멸했다고 하는 이유, 신 때문이었다.

“신이 많이 약해졌어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되죠.”

“왜 하필 지금이죠? 아니, 그 전에 왜 한국이죠?”

“그거야 한국에 방법이 있으니까.”

진하의 대답에 레이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 잭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저기 신이면 그 그리스 로마에 나오는 신들 말하는 거야?”

“비슷해. 그냥 정확히 몬스터들의 신이라 생각하면 편해. 잡으면 이 모든 사태가 해결될 거고.”

잭에게는 딱히 제대로 된 설명을 한 적도 없고 할 필요성도 못 느낀 진하가 대충 에둘러 대답했다.

“그럼 그 신을 잡으면 몬스터들이 사라지는 건가?”

“더 이상 생겨나지는 않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지 못하는 잭, 그 모습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런데 왜 물어?”

“아니, 가야 되면 나도 가야 하나 싶어서. 중요한 일인 것 같으니까.”

레이나가 저리 고민할 정도면 확실히 중요한 문제인 것 같기는 했다. 그렇기에 잭은 혹여나 자신도 가야 되는 건가 싶어 물은 거였다.

“아니, 너는 안 와도 돼.”

사실 그가 오면 좋기는 했지만 그까지 데려가려고 했다간 레이나가 아예 갈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SS급이 높기는 해도 신을 잡는데 그리 효용성이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신이 그렇게 강해? 그럼 오히려 대규모로 나서야 하는 거 아냐?”

“그것도 먹힐때나 가능한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나 정도가 최저선이야.”

지금 진하의 머릿속에 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만한 존재는 레이나와 이기수, 그리고 자신까지 셋뿐이었다.

그 외에는 솔직히 숫자를 채워 시선을 끄는 용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거라면 굳이 데려갈 필요는 없지.’

어차피 너도 나도 시선끄는 용도라면 그건 한국 헌터들로도 충분했다.

특히, SS급은 만약 관리자를 죽이고도 몬스터가 남아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할테니까.

“그래서 결정은 했어요?”

진하의 질문에 레이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당장 가기 힘들 것 같네요”

예상외의 대답에 진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녀에게 조국보다 소중한게 없다는 건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결국엔 그 조국을 지키는 방법이 신을 죽이는 거였다. 그런데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다니….

“물론 아예 가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분명 시간이 남았죠?”

시간이 남지 않았다면 진하가 이렇게 여유롭게 그녀에게 물으며 대답을 기다릴리 없었다.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니고요.”

남은 시간은 어디까지나 관리자가 정하는 거였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없앴으니 아마도 관리자가 올 곳은 유럽 아니면 한국일텐데 어느쪽이든 그리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다.

“딱 이틀만 시간을 주세요. 적어도 독일 국민을 옮겨야 갈 수 있습니다.”

“이틀?”

“네, 독일 국민이 안전하다면 그때 움직이겠습니다.”

“이틀도 부족할 텐데요?”

어디로 이들을 움직이는 지는 몰라도 이곳 도시만해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고작 이틀만으로 어디론가 모두를 수송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쪽으로 모두를 옮길겁니다.”

독일에서 살아남은 도시는 총 세곳, 룸셈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였다.

당연히 이들을 모두 이틀안에 이집트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했다.

‘두 곳 중 한 곳만 옮겨도 돼.’

3개의 도시라면 잭 혼자 지킬 수 없지만 2개라면 잭만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다른 도시에 있던 인력들이 충원되기도 할테니까.

그 이후라면 알아서 1개의 도시로 모일 수 있을 테고 이집트로 가는 것도 충분히 다른 헌터들끼리 가능할 것이다.

“지금 제가 빠지면 독일은 완전히 무너져요.”

바로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신을 잡는다 해도 독일이 사라지니 그녀에게 의미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독일이 우선이었다.

“하아…….”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 이상을 설득한다고 해서 뭐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알았어. 이틀, 이틀 뒤에는 한국으로 올 수 있는 거죠?”

“네. 그리고 진하 씨 먼저 가시면 됩니다.”

“저요?”

“텔레포트 아티팩트,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닌가요?”

단순히 그녀만을 데리러 오려고 왔을 리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바로 진하의 소환수에는 딱히 유지 시간이 없었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태평양을 건너 바로 한국으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그녀를 설득할 겸 혹여나 텔레포트 아티팩트가 있으면 사용하려고 온 것은 맞았다. 모태빠 만으로 한국으로 가는 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하지만 아티팩트는 하나 아닌가요?”

진하가 쓰면 레이나가 쓸 수 없었다. 진하가 다시 유럽으로 왔다 갔다 해도 되지만 그럴 거라면 그냥 이틀을 기다렸다가 같이 가는 게 나았다.

“독일은 텔레포트 아티팩트가 두 개에요.”

“뭐? 하지만 하나라고…….”

분명 독일에 등록된 국가 아티팩트 중 텔레포트가 가능한 아티팩트는 하나였다. 그런데 두 개라는 건…….

“개수를 속였구나.”

“그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거였지 않아요?”

레이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멀쩡한 시기에는 그게 당연한 거이긴 했다.

서로 속고 속이는 게 국가 관계였으니까.

“그럼 그렇게 알고…….”

벌컥!

“다녀왔다.”

이야기가 마무리됐다는 걸 느끼고 진하가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문이 열리며 헤라클레스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보며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가 여기 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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