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둘은 순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신지하가 진하를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슉! 피빅!
[이 개자식이!]
날카로운 송곳을 쏟아 내며 진하를 공격하는 신지하, 하지만 진하는 쉽게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남은 놈이 너였다니…….”
리처드를 제외한 슬라임 4개체 중 진하가 만난 것은 총 2개체였다. 그리고 관리자가 한 명을 집어삼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하는 가장 먼저 잡아먹힌 개체가 신지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신지하가 주 자아들 중 가장 약한 개체였으니까.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리처드에게 들은바 원래 슬라임들을 통제할 때 주 자아들이 서로 나눠서 관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개체 내에서 주 자아가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서로 달랐고 그 중 리처드가 50%로 가장 높았으며 신지하가 한 자리 숫자를 담당할 정도로 약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지하가 가장 먼저 관리자에게 잡혀야 하는 게 맞았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중간에 잡혔어야 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남은 건 신지하였다.
“흠…… 뭐, 저놈은 원래부터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기는 했지.”
뒤에서 둘의 전투를 바라보던 리처드가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진하는 날아오는 송곳을 쳐내며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우선 저놈부터 제압해야 하지 않을까?”
리처드의 말에 진하가 혀를 차며 몸을 움직였다. 쏘아진 송곳들을 모두 쳐내며 빠르게 신지하에게 접근한 진하는 그대로 신지하를 내리쳤다.
철퍽!
진하의 손놀림에 사방으로 흩어진 신지하, 하지만 슬라임답게 신지하는 곧바로 흩어졌던 몸체를 빠르게 복구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일부로 약하게 한 거 알지?”
딱 죽지 않고 적당히 충격을 받을 정도로만 내리쳤다. 몸체가 흩어지긴 했지만 애초에 슬라임이라 그건 상관없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다음은 진심으로 죽인다.”
진하의 말에 몸을 복구한 신지하가 가만히 있었다. 신지하가 가만히 있는 것을 확인한 진하는 고개를 돌려 리처드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너 예상이랑 많이 다른데?”
리처드가 예상하기론 원래대로라면 마지막에 남아 있어야 하는 놈은 리처드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에키드라는 존재여야 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에키드의 성격이랑 신지하의 성격을 생각하지 못했네.”
“성격?”
“어, 에키드는 호승심이 넘치거든. 아마 억지로 슬라임들을 통합시킨 뒤에 관리자하고 붙으려다가 제일 먼저 잡혔을 거야.”
“그럼 이놈은?”
“정 반대, 본인을 포함해서 자기 지배하에 있는 슬라임들을 모조리 땅속으로 동면시킨 것 같아. 어쩐지 기척이 더럽게 약하더라.”
그의 말에 진하는 어째서 신지하가 마주치자마자 놀란 뒤 느리게 반응을 했던 건지 이해했다. 동면 중이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근데 그러면 결국엔 잡혀 죽는 거 아냐?”
아무리 신지하가 동면을 잘했다 해도 결국에는 리처드의 감지에 걸렸다. 그렇다면 관리자 역시 오래 걸려도 결국에는 관리자의 감지망에 걸리게 될 건 안 봐도 뻔했다.
“그러니까 머리가 좋다는 거야. 이 자식 우리를 이용하려 했어.”
“뭐?”
“힘은 제일 적으니 굳이 시간 낭비를 안 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신지하의 지분율은 한자리 숫자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겨우 5%였다.
즉, 관리자로서는 찾는 데 오래 걸리고 흡수를 해도 도움이 크게 되는 게 아닌 가성비가 나쁜 식품이란 거였다.
“그리고 아마, 너나 다른 인간들이랑 싸우는 동안 세를 넓히려고 했을 거야. 주변을 봐.”
리처드의 말에 진하는 그제야 어두컴컴한 동굴을 제대로 살펴봤다. 건물이 무너져 생긴 공간에 사방으로 쳐진 거미줄…….
“거미줄이 아니네?”
진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미줄치고는 너무 굵었다. 사방에 걸려있다는 점에서는 거미줄 같기는 했지만 굵기는 검지만 했기에 절대 거미줄일 수는 없었다.
“동면하고 있는 슬라임들과 연결을 하고 있던 거야. 정확히는 본체를 쪼개고 있는 거지.”
“본체를 쪼개?”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슬라임들에게 자신의 인격을 복제시켜서 모두가 본체화되는 거야.”
신지하의 방법대로 모두를 본체화 시키면 장점이 꽤 많았다.
일단 모든 슬라임들이 죽기 전에는 죽는 게 아니었으며 각자 자율적으로 같은 목표를 삼고 있기에 세를 불리기도 생각보다 쉬웠다.
하지만 리처드가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통합을 할 때 극심한 힘의 손실이 일어나고, 두 번째로 자칫 잘못하다간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 벗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뭐, 그런 단점을 제외한다면 생존에 있어서는 최고긴 하지.”
리처드의 말에 진하는 가만히 있는 신지하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아는 것 치고 매우 얌전한 태도.
“설마 벌써 그 쪼갠다는 거 완료된 거야?”
“적어도 절반 이상은 했을걸?”
리처드의 말에 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제압했다고는 했지만 너무 얌전하다 싶었는데 목숨에 큰 지장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거였다.
[흥, 창조주랑 싸우기나 할 것이지 나는 왜 찾은 거야?]
신지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아무도 찾지 않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굳이 너를 찾을 생각은 없었어.”
진하가 혀를 차며 말했다. 리처드의 말대로라면 신지하를 흡수한다고 해도 그리 크게 강해지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도 일단 흡수는 할 거지?”
리처드의 물음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찾았으니 흡수를 하는 게 이득이긴 했다.
[하, 리처드의 설명을 들었으면서 흡수를 한다고?]
신지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를 흡수해 봤자 결국 흡수되는 건 일부일 뿐이었다.
이미 인격이 복제된 다른 존재들은 흡수당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건 일반적으로 흡수했을 때고. 리처드.”
진하의 말에 리처드가 통통 다가와 신지하와 접촉했다. 그 모습에 신지하는 순간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되겠어?”
“충분해.”
진하의 질문에 리처드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신지하는 리처드의 말에 순간 불안함을 느꼈고 그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투둑, 툭.
순식간에 연결망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하는 리처드.
쪼개졌던 본체들이 리처드의 행동에 놀라 다급히 연결망을 끊었지만 리처드는 끊어진 흔적을 억지로 다시 이어 붙여 장악하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너와 내가 한 몸이었다는 걸 잊었어?”
리처드가 신지하를 비웃듯 말했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원래 한 몸이었던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저쪽에서 상대가 연결을 끊든 말든 억지로 연결을 이을 수 있었다.
심지어 본래라면 억지로 이어 붙인 반작용으로 출력이 부족해져 장악하지는 못했겠지만 지금 그는 진하와 거의 한 몸이었기에 끌어다 쓸 힘은 얼마든지 넘쳤다.
잠시 후, 모든 연결점을 장악한 리처드는 진하를 보며 말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제 흡수만 하면 돼.”
그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하가 리처드를 살려 놓은 두 번째 이유는 이렇게 흡수가 쉬워지기 때문도 있었다.
진하 스스로 힘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게 아니었기에 리처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흡수를 진행하는 거였다.
“하…… 이놈이랑도 질긴 인연이었지.”
진하는 완전히 제압돼 인격이 억눌려 있는 신지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악연으로 엮이기는 했지만 이놈 덕분에 이신혜를 만나기도 했기에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드는 놈이었다.
“그래서 이제 바로 한국으로 갈 거야?”
리처드의 물음에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기는 할 건데. 뭐 좀 하나 확인하려고.”
“뭘?”
“관리자를 확인해야겠어.”
진하의 말에 리처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모두 흡수하더라도 관리자를 만나면 필패가 분명했으니까.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어. 그리고 이걸 확인하면 이길 수 있는 가닥이 잡힐 것 같기도 하거든.”
* * *
삐익―삑―
송하나는 자신 앞에 누워 있는 하예진을 바라봤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하예진, 송하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아직 시간 많이 남은 거 잘 알아.”
송하나의 말에 하예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넌, 그걸 일일이 다 체크해?”
몸을 일으키며 말하는 하예진, 송하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었다.
“하, 말을 놓는 게 아니었는데.”
“뭐 어때, 어차피 너나 나나 공동 운명체잖아.”
발랄하게 말하는 하예진을 보며 송하나는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후 말을 이어갔다.
“너 또 나갔지.”
“어? 아니?”
“미안하지만 내 조직원들이 있는 곳이 부산인 거 몰라?”
“하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그녀의 말에 송하나는 어떻게 해야 이 말괄량이를 말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깨어나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이가 안 좋은 그녀에게는 더욱 그랬다.
‘뭐, 예상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하예진의 입장에서는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 나름대로 활기차게 보이려고 하는 거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송하나에게 빚지고 있다는 티를 내기 싫어서 그럴 가능성이 제일 컸다.
“됐고, 손이나 내밀어.”
송하나의 명령에 잠시 망설이던 하예진이 이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예진이 내민 손을 붙잡은 송하나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붙잡고 작게 읊조렸다.
“생명력 전이.”
그녀의 말과 함께 맞잡은 손에서 피어나는 빛, 하예진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생명력을 느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쯧,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나.’
강한 빛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하예진의 표정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예진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모든 과정이 끝나고 송하나는 하예진에게 말했다.
“다음은 한 달 뒤라는 거 알지? 그리고 제발 나가지 좀 마. 능력을 안 사용한다고 해서 나가도 된다는 건 아니라고.”
“알았어. 최대한 노력할게.”
하예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송하나는 조직원들을 이용해 경계를 좀 더 강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진하 소식은 아직 없지?”
“없어.”
“언제쯤 돌아올까?”
“나도 모르지.”
“고마워.”
뜬금없는 말에 송하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예진은 그녀를 보며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하예진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송하나가 떠난 뒤였다.
그 이후로 달마다 그녀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나 현재의 상황, 진하에 대한 일 같은 것만 말했지 정작 고맙다는 말은 전달하지 못했다.
“하아, 고마워 하지 마. 네가 죽으면 진하가 슬퍼하니까 그런 것뿐이야.”
“그래도 고마워. 생명력을 나눠 준다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걸 알면 그냥 좀 쉬어.”
송하나의 말에 하예진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저은 송하나는 몸을 돌렸다.
“난 이제 간다.”
“벌써 가?”
“송준하 씨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송하나는 그 말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어느 정도 멀어진 그녀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좀 와라…….”
짧게 읊조리는 그녀의 망막에는 작은 메시지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전달률: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