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89화 (189/202)

#189

―창조주가 강할 거라는 건 익히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강할 줄은 솔직히 몰랐어.

“헤, 바보네.”

―바보라기보단 너희들이 괴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슬라임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생물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함정을 준비했다.

물론, 그가 완전히 통합된 상태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임에도 창조주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지만.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관리자가 슬라임과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주변에 있던 슬라임들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까진 봤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슬라임들이 폭발하는 것까지.

하지만 뭐 때문에 슬라임들이 자폭한 건지는 진하도 몰랐다.

―그냥 관리자가 나를 잡아먹은 것뿐이야. 본체까지.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 미치는 거지.

설마 연결을 역으로 타고 들어와 본체에게 접근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럼 자폭으로 연결을 막은 거냐?”

―설마 그럴 리가.

고작 자폭으로 연결이 막힐 거였으면 슬라임들과의 연결을 끊어 냈을 때 이미 끊겼어야 했다.

티가 나지 않는 것뿐이지 도망치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잡아먹히고 있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우리 둘을 왜 살리는 건데.”

진하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생존이 최우선인 놈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진하와 이기수를 살리는 이유가 이상했다.

고작 복수를 위해서라고 말하기엔 뭔가 이상한 상황.

―쯧, 그야 네가 살아야 내가 사니까 하는 말이야.

“뭐?”

―아직까지 눈치를 못 챈 걸 보면 융화를 잘한 건지 아니면 네가 둔한 건지.

그의 말에 진하는 의아해하다가 겨우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지금 슬라임은 여태까지와 다르게 그의 머릿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놈한테 텔레파시 능력이 있던가?’

있을 수도 있지만 도망치는 와중에 굳이 능력까지 써가며 얘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텔레파시는 자신을 잡고 끌고 가는 슬라임에게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오는 곳은…… 나?’

―오, 드디어 눈치챘네.

슬라임의 말에 진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어.’

언제 슬라임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건지, 그리고 어떻게 들어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라고 말하면 처음부터라고 해 두지.

진하의 생각을 읽은 슬라임이 대답했다.

“처음?”

―어, 널 처음 본 순간, 네 안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느꼈거든. 꽤 커다란 존재가 있다가 나갔던 것 같던데?

슬라임의 말에 진하는 그게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애초에 그의 몸속에 깃들었다가 나간 존재라곤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까득!

‘뱀파이어 로드.’

―아무튼 그래서 그때부터 네 몸속으로 본체를 옮기는 작업을 실시한 거지.

슬라임의 말에 진하는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내 안에 네 본체가 들어 있다고?”

―정확히는 절반?

슬라임의 1순위 목표는 창조주에게서 벗어나는 거였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창조주에게 목줄이 잡혀 있는 걸 아는 그가 아무런 수도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뭐, 1 목표는 창조주를 죽이는 거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승산이 없으니 바로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가지.

그래서 본체가 관리자한테 잡아먹힐 위기를 느끼자마자 바로 도망친 것이다. 일단 진하를 살리면 그가 사는 거니까.

“그게 너, 아니 너희들 생각이었다고?”

―아니, 내 생각.

“너 생각?”

―어, 주 자아 중 리처드, 나만 몰래 행동한 거지.

본체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빈 껍질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질은 그냥 핵, 결국 그걸 가지고 다루는 것은 주 자아들이었다.

하지만 이 주 자아들은 서로 하나이기는 했지만 프라이버시가 각자 강했고,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리처드는 다른 주 자아들 몰래 그가 옮길 수 있을 만큼만의 본체를 진하에게 흡수시킨거고.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냐…….”

―뭐, 다른 자아들도 제 살길 찾아서 가겠지.

그것들도 바보는 아니니 아마 본체를 절단해 관리자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다만, 그게 성공하기는 힘들겠지만.

―덕분에 나는 편하고 말이야 그치?

“그럼 내가 이상하게 너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건 다 너 때문이냐?”

―당연한 거 아니냐? 애초에 적인 너와 내가 대화를 나눈 것부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애초에 적이었던 존재의 분신을 끝에 가서 죽이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건 진하의 몸에 몰래 숨어들어 가 있던 본체 덕분이었고.

“도대체 어떻게…….”

―너를 공격한 슬라임들에 섞어 놨지.

지금껏 진하를 공격한 슬라임은 수만 마리가 가뿐히 넘었고, 그 체액 또한 수없이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걸 통해 아주 조금씩 그의 몸에 스며든 것이고.

“하…….”

진하가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그런 방법으로 들어왔을 줄이야…….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지금 짜증 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짜증 난 이유는.

‘못 죽이겠어.’

정확히 말하자면 화는 났다. 짜증도 났고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죽이려 하면 그만큼 엄청나게 찝찝한 기분도 같이 들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간 거니까. 여기에 오기 직전에 했던 말 기억해?

슬라임의 말에 진하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이 도시로 들어오기 전에 슬라임이 그에게 했던 말이라면…….

“주 자아가 될 생각 없냐는 거였나?”

―그거야. 그거라 생각하면 편할 거야. 사실 그것도 다른 자아들은 제안하는 걸 거부했던 거거든.

“애초에 처음부터 설계를 해 둔 거네.”

이제야 이기수가 그를 이상하게 바라본 것도 이해가 됐다.

슬라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의 상태가 스스로도 조금 이상하다 생각되는데 완전히 3자인 이기수가 봤다면 이상할 만했다.

―좋게 생각하면 안 되냐? 어차피 나는 너에게 위해를 못 끼쳐.

본체를 넘긴다는 건 그런 소리였다. 진하가 죽으면 그도 죽는다는 소리, 이렇게 행동한 건 리처드 역시 거의 도박 수였다.

자칫 잘못해서 다른 주 자아들에게 들키는 순간 죽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아…… 말을 말자.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

―미국 협회.

* * *

“너 진하냐?”

미국 협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경계하는 이기수를 보며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리 설명을 해 놨지.

‘설명은 개뿔.’

진하는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가 뭐가 바뀌었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모습을 보여 주면 이기수가 그를 크게 경계할 게 뻔했다.

“그래 나야. 근데 내가 아니기도 하고.”

“뭐?”

“뱀파이어 로드 때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그냥 나라는 사람에 슬라임이 곁들여진 거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진하의 모습에 이기수는 한층 경계를 높였다.

사실 슬라임에게 끌려올 때만 해도 자신을 끌고 가는 슬라임을 죽이려 했지만 죽이지 않은 건 진하도 그렇게 했고, 진하의 뜻이라는 설득 때문이었다.

‘물론 살기가 없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믿는 건 아니었다. 그 역시 후퇴를 염두에 둔 상황이었기에 가만히 있던 거지 슬라임 자체를 믿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진하의 행태가 이상했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정신이 오염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진짜 멀쩡하니까 괜찮다고. 아니, 멀쩡한 건 아니지만.”

진하는 황당한 사실에 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설마 이따위 방법에 당할 거라곤 그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꾸물꾸물

그때 슬라임 한 마리가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둘 다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진하는 진하 그대로라고 보면 되고, 진하 너도 눈치 못 채는 게 당연하지.”

살의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흡수당하는 건데 그걸 눈치채면 그게 더 대단한 거였다.

애초에 세균들의 움직임을 인간들이 못 느끼듯, 거의 그 수준으로 흡수된 거였으니까.

“하…… 일단 이건 나중에 해결하고, 그래서 미국 협회는 왜 온 건데?”

“그거야 여기는 이제 위험하니까?”

사실 어딘들 안 위험하겠냐 만은 다른 주 자아들이 잡아먹히면 그다음은 리처드의 차례였다.

물론 연결을 끊고 진하에게 흡수된 상태라 어느 정도 괜찮기는 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을 벗어나는 거였다.

“따라와.”

리처드는 슬라임의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바로 앞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진하와 이기수 역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미국 협회에서 모은 아티팩트들 중, 중요한 아티팩트들을 모아 둔 공간이야.”

“뭘 하려는 건지 알겠네.”

리처드의 말에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협회에서 중요한 아티팩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면 당연히 그게 있을 만했다.

“설마 텔레포트?”

“어, 그거.”

협회에서 이곳을 벗어날 만한 도구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이곳에 온 이유는 설명되지 않으니까.

“너희 둘은 딱 두 명이니까 충분하지?”

텔레포트 아티팩트 자체가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는 못하지만 어차피 둘이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아니, 잠깐만.”

텔레포트 아티팩트를 꺼내 든 리처드를 보며 진하가 말했다. 그리고는 이기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야, 내가 뭐가 바뀌었는지 말해 봐.”

“일단 성격이 바뀌었지. 슬라임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문제고 원래보다 냉정하고 잔인하게 행동해.”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슬라임을 바라봤다.

“너 지금 당장 내 머릿속에서 빠져 봐.”

“뭐? 그게 가능할 리가…….”

“나 자살해?”

진하의 말에 리처드가 슬라임 몸을 부글부글 끓이다가 이내 진하의 머릿속에 침투해 있던 본체의 조각들을 아래쪽으로 옮겼다.

본체의 조각들이 뇌에서 빠져나오자 진하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 미친놈이…….”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행동에 한숨을 내쉰 진하는 협회에 있는 아티팩트를 휘저어 세 개의 상자를 찾아냈다.

<보호의 팔찌>

<정신력의 귀걸이>

<파마의 목걸이>

상자에 붙어있는 정보와 시스템을 이용해 정보를 확인한 진하는 재빠르게 3개의 물품을 모두 착용했다.

그러자 느껴지는 3개의 보호막.

“하나라도 깨지면 알지?”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진하가 정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언제 그도 모르게 리처드가 침투할지도 몰랐다.

‘일단 침투해도 완벽하게 정신 장악은 하지 못하는 것 같긴 한데…….’

그게 가능했으면 이미 했을 텐데 하지 않은 걸 보아하니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리처드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조금 정도란 거였지만 솔직히 진하는 그것도 싫었다.

“기수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났겠네.”

이기수가 계속 진하를 이상하게 보고 경계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불쾌감이나 이질감도 못 느꼈을 것이다.

사실 끌려오는 도중에 침투했다는 걸 알렸을 때조차 화가 나고 약간 불쾌하긴 했어도 그냥 그러려니 했으니까.

“된 거냐?”

이기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어느 정도 둘이 분리됐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어, 어느 정도는.”

“그럼 돌아가는 대로 바로 슬라임을 없애자.”

“그건 불가능해.”

문방구의 아티팩트를 이용하면 못 없앨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했다간 이미 몸속에 흡수된 리처드가 날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진하도 같이 죽을 게 가능성이 높았다.

“너 1순위 목표가 생존이었나?”

“뭐, 정확히는 창조주에게서 벗어나는 거지. 그건 이미 이뤘지만.”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진하의 몸속에 들어온 덕분인지 창조주의 목줄이 끊어진 상태였다.

남아있는 거라곤 그저 잔여물 정도?

“하아…….”

잠시 고민하던 진하는 리처드에게서 아티팩트를 빼앗아 이기수에게 쥐어 주었다.

“먼저 가라.”

“뭐?”

“나는 남아야 해. 할 일이 있어.”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남아서 할 일이라니 그게 도대체 뭐가 있단 거지?

“지금으로선 관리자를 못 이겨. 그건 알고 있지?”

잠깐 싸웠을 뿐이지만 그 잠깐 동안 그와 이기수는 죽을 위기에 빠졌었다. 이대로라면 도망간다고 한들 질 게 뻔했다.

“리처드, 너 너한테 할당된 슬라임 아직 많이 남아있지?”

“어? 많기야 하지.”

“너랑 나는 그걸 흡수한다.”

기분이 더럽긴 했지만 지금 당장 그가 강해질 방법은 기생충처럼 달라붙은 슬라임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잠깐만! 그렇게 되면 네 정신은…….”

“걱정 마. 나도 생각이 있어.”

진하는 이기수를 진정시킨 후 이기수에게 문방구 알바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문방구라면 아마 관리자도 못 찾아올 가능성이 커. 만약 숨을 일이 생기면 문방구에 숨어. 사용 방법은 도움말 부르면 나올 거고.”

“너…….”

“어서 가라.”

진하의 말에도 이기수는 아티팩트를 사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면 말했다.

“정말로 나한테 도움이 되고 싶으면 사용해. 지금은 그래야 해.”

진하의 말에 이기수는 입술을 짓이기다가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이기수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도망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지금의 나는 너를 말릴 방법이 없으니까. 뭐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창조주의 눈을 피해 목줄을 끊은 대신 얻은 페널티였다. 창조주에게서는 벗어났으나 진하에게 귀속되어 버린 상태.

이건 리처드도 어쩔 수 없는 거였다. 1순위 목표를 이루려다가 겪어 버린 부작용이었으니까.

“그러냐. 그럼 가자. 일단은 관리자의 눈부터 피해야겠어.”

“내가 안내할게.”

그리고 그 후로 반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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