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그로부터 24시간 후.
“지져!”
끼악!
화르르륵!
진하의 명령에 따라 슬라임을 향해 화염을 내뱉는 모태빠.
모태빠가 내뱉는 화염에 맞은 슬라임들은 녹아내렸고 설사 직격 되지 않더라도 화염의 잔열과 그 안에 섞여 있는 전격으로 인해 모두 죽어 버렸다.
“끈질긴 개자식들.”
진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거기다가.
피슈웅, 철퍽!
서로가 서로를 날려 하늘 위에 있는 모태빠를 향해서 슬라임을 던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한 마당에 계속 붙잡혀 있다간 도착할 때쯤 힘이 빠지겠다는 생각에 진하는 하는 수 없이 품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타임스톱: 자신보다 격이 낮은 모든 것을 30분간 멈춰 세운다.>
<사용제한: 사용 후 카드류 아티팩트 12시간 동안 사용 불가.>
사용 즉시 진하의 주변이 모조리 회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한이 적은 만큼 유효거리는 역시 좁네.”
그래도 엄청 좁은 건 아니라서 그에게로 몰려든 모든 슬라임들이 멈춰 서긴 했다.
“가자.”
이 타이밍을 놓치면 또 나아가는 데 한세월이 걸릴 게 뻔했기에 빠르게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벌써 모태빠를 소환한 지 1시간이 다 되어 갔다. 다음 소환을 생각하면 빠르게 소환을 풀어야 했다.
진하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날아가는 모태빠. 이 녀석도 소환 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달았는지 필사적으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5분을 더 날아 목적지 근처에 도착한 것을 깨달은 진하는 모태빠의 소환을 풀고 근처에 보이는 돌기둥들 틈 사이로 들어갔다.
“재소환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 정도인가…….”
아끼고 아꼈음에도 내일 정도는 되야 소환이 가능할 듯싶었다.
“생각보다 비좁은 곳을 좋아하네요.”
돌기둥 안쪽 공간으로 들어온 진하는 자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슬라임, 아니, 리처드의 모습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귀신같이도 찾아네네.”
“예. 뭐, 당연하죠? 여긴 제 앞마당이니까요.”
하기야 아무리 높은 하늘이라지만 모태빠 같은 커다란 새가 지나가는데 모를 리 없었다. 설사 구름 위로 올라간다 할지라도 그림자는 감추기 힘들었으니까.
“내가 이곳으로 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뭔가 참 여유롭네?”
“슬라임들을 보냈는데요?”
“겨우 그것만 보냈으니까 하는 말이지.”
이 녀석이 슬라임만 다룰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거였다면 인간으로 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즉, 지금까지 완전히 바닥인 놈들만 보내고 있었다는 거였다.
“수를 생각하시면 그렇게 생각 안 하실 텐데 말이에요.”
“퍽이나,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거지? 나한테 죽고 싶어서?”
눈대중으로 리처드의 수준을 확인해 보았다. 전보다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못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하, 사실 SSS급 정도인 줄 알고 그에 맞춰서 몸을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더 강하시네요?”
그가 모을 수 있는 최대치로 모아 왔건만 아직도 모자라단 걸 깨달은 리처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다른 동료들은 안 궁금하세요?”
“동료?”
“은신처에 있는 생존자들 말이에요.”
“딱히 궁금하진 않은데?”
진하의 말에 리처드가 김이 팟 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살아는 있어요. 애초에 거기 간 슬라임은 10%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리처드의 말에 진하가 혀를 찼다. 더 쓸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10%라니…….
“아무튼 왔으면 죽어야지?”
“잠시만요. 우리 얘기 좀 더하죠?”
“너랑 더 할 이야기 없어.”
“전 있거든요. 보나 마나 본체를 노리고 여기에 온 거 맞으시죠? 잘 오셨어요. 여기에 본체가 있거든요.”
웃으며 말하는 리처드. 그 모습에 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저러는게 블러핑인지 아닌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진짜랍니다.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으니 알려드리는 거예요, 는 장난이고, 예전에 한 제안에 대답해 주시겠어요?”
“하! 그거라면 이미 거절하지 않았어?”
“아, 그럼 내용을 바꿔 보죠. 저한테 흡수당하는 게 아니라 제 본체가 되어 주실래요?”
“뭐?”
순간 진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리처드를 바라봤다.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제가 아래로 들어가겠다는 거죠.”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 아니, 그전에 말을 바꾼 이유가 뭐지?”
“저는 말이에요. 원래 평범한 슬라임이었답니다.”
진하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가는 리처드, 리처드는 아예 공격할 마음이 없는 건지 근처에 있는 돌덩이에 앉아 말을 이어갔다.
“그저 잡아먹기만 하던 나날 중에 어느 날, 저는 한 몬스터를 만났어요.”
“진짜 얘기하고 싶은 거면 본론만 말해.”
“쯧, 낭만이 없군요.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성이 생기고 몬스터들을 잡아먹으면서 저는 이렇게 성장했답니다. 물론 창조주의 허락하에요.”
“관리자도 너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구나.”
“당연히 알고 있죠.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는데 그걸 모르면 관리자가 아니죠. 다만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서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뿐이지.”
그 우선순위가 자신이라 걸 깨달은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자신으로 인해 저런 존재가 태어났을 줄이야…….
“뭐, 그 이후는 별거 없어요. 잡아먹고 잡아먹어서 여기까지 왔답니다. 끝!”
“그래서 왜 내 밑으로 오려는 건지는 안 말했는데?”
“아! 맞다. 그건 사실 얼마 전에 관리자가 이상한 존재랑 싸우더니 어디론가 도망갔거든요.”
리처드가 말한 것은 사서와 관리자의 싸움이었다. 그때 관리자가 다쳐서 한동안 못 움직인다고 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 틈을 이용해 그동안 퍼뜨린 주 자아를 하나둘 흡수하려 했답니다. 모든 슬라임들을 흡수하기 위한 주춧돌을 만드는 거죠.”
“넌 관리자가 싸웠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간단해요. 관리자는 제어를 위해 자신과 연결점을 만들어 놓거든요. 그걸 역으로 타고 가면 간단한 건 알 수 있답니다.”
“관리자도 바보네.”
“뭐, 아무튼 사라졌던 관리자의 눈도 다시 저를 주시하는 걸 보고 이대론 죽겠다 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란 듯 말하는 마지막 말, 하지만 그건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관리자가 다시 나타났다고?”
“그것까진 모르는데 저를 다시 감시하더라고요?”
리처드의 말에 진하가 이를 갈았다. 한동안은 잠잠할 거라던 사서의 말이 또 틀렸으니까.
도대체 이놈의 말은 맞는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제 주인, 아니, 숙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
“예상한 것보다 창조주가 너무 빨리 돌아왔거든요. 주춧돌이 필요해요.”
지금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최소 1년은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슬라임들의 주 자아의 통합을 시작했는데 벌써 창조주가 돌아온다는 건 시간 내에 통합을 완료하지 못할 거란 소리였다.
‘그렇게 되면 난 죽겠지.’
이미 창조주가 정한 선을 넘은 거나 다름없었다. 벗어나려는 시도가 보이는 몬스터를 창조주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으니 끝이었다.
“싫어.”
슬라임의 얘기를 곰곰이 듣던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요.”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너도 적이야. 그리고 정말 설득이었으면 이 세뇌 능력 좀 멈추지?”
두통이 오는 건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하는 진하, 그 모습에 리처드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안 통하네요?”
“무슨 말을 할 거면 진정성 좀 담아라.”
“그래도 창조주 이야기는 사실이랍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어딜 가려고.”
말하는 투로 보아하니 지금 눈앞에 있는 개체는 꽤 만들기 힘든 종류의 슬라임 같은데 진하가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SSS급이라니, 얼마나 맛있는 먹이인지 몰랐다.
“저 잡으시려면 힘 좀 빼실 텐데?”
아무리 진하보다 약하다고 하더라도 SSS급이었다. 지난번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그건 네 생각이고.”
빠르게 리처드를 향해 뛰어든 진하가 주먹을 내질렀다. 그 모습에 리처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진하의 주먹을 쉽게 받아 냈다.
“슬라임의 특징을 잊으셨나 보네요?”
둔기류 같은 타격에 내성이 높은 게 슬라임이었다. 물론 격차가 많이 나면 그런 내성은 쓸모가 없어지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주먹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안 잊었어.”
―무력화.
진하의 말과 함께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슬라임, 진하는 그 틈을 이용해 반대 손으로 슬라임의 목을 베었다.
“이건…… 정보에 없는 스킬이었는데 말이죠.”
슬라임이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가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애초에 진하가 이 스킬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내가 설마 방심하겠냐?”
“아뇨, 방심하시지는 않겠죠. 그건 저도 잘 안답니다.”
웃으며 말하는 리처드, 그의 모습에 진하가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듯 빛나기 시작하는 몸통, 그 모습에 진하가 재빨리 몸통을 3등분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콰앙!
콰르르르!
커다란 폭발과 함께 무너지는 돌기둥, 진하가 있던 공간은 빠르게 커다란 돌들로 메워졌다.
들썩! 들썩!
“파하!”
돌무더기를 뚫고 나온 진하는 모래 섞인 침을 뱉어 내며 짜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설마 마지막 순간에 자폭을 할 줄이야…….
“도대체 자폭은 왜 한 거야?”
파괴력이 크기는 했지만 이 정도 파괴력으로는 진하를 상처 입히기 힘들었다. 물론 잔 상처는 났지만 이 정도는 몇십 분이면 다 낫는 걸 생각하면 그리 큰 의미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 * *
작전 시간 30분 전.
이기수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송하나를 보며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어머? 미국 가고 싶다고 해서 보내 주는데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이기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튼튼하게 만든 우주복을 입고 미사일에 붙어 있는 건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 미국에 비행기라도 타고 들어갈 줄 알았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간 곧바로 슬라임들에게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지금 상태로 미국은 정상적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미국으로 들어가려면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써야 했다.
“이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이기수를 미사일에 묶어서 보내는 방법, 무식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한 방법이었다.
애초에 초인이라 미사일과 같이 폭사한다고 해도 크게 다치지도 않는 몸이었고 터지기 직전에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이기수였다.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멋진 작전인가?
“아니, 그래도 초음속 제트기라든지 그런 거 있잖아.”
“넌 그 초음속 제트기가 뉘 집 개 이름 같니?”
이기수 한 명 보내자고 사람 목숨 하나랑 돈을 날리느니 그냥 미사일 하나로 퉁치는 게 나았다.
어차피 미사일은 쏘아 보내야 하는 거였으니까.
“너 이거 저번의 복수지?”
“아무튼 이 미사일은 거의 마지막으로 가니까 괜히 멍 때리다 제때 탈출 못 하지 말고. 진하 잘 도와주고 그래.”
“야 씹냐?”
“우리나라에서 쏘는 미사일 폭격을 기점으로 다른 나라들도 폭격을 하기로 했어.”
비록 전쟁까지는 얻어 내지 못했지만 정예 각성자들을 지원받았으니 슬라임을 상대함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중에서 제일 진하한테 먼저 도착하는 게 너일 거야. 그러니까 알지?”
송하나의 말에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니까 걱정 마.”
“그래? 그럼 수고해.”
쿨하게 돌아서 마사일 발사대를 달려 나가는 송하나, 이기수는 너무 빠르게 벗어나는 송하나를 보며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쿠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 미사일이 점화가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릴 때는 알려준다며어어!”
이기수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가 소리를 질렀을 때에는 이미 미사일이 하늘을 날아오르고 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