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그래서요?”
송하나의 말에 이기수가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지금 제 말 못 알아들으셨나요?”
“아뇨, 잘 알아들었어요. 너무 잘 알아들어서 문제죠.”
“그럼 지금 이게 외부적인 요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잘 알 거 아니에요.”
이기수의 말에 송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솔직히 외부의 개입을 생각하긴 힘들어요. 세뇌? 계속 만나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고 한 번에 진하를 세뇌할 존재도 전 생각나지 않아요.”
“그거 어디까지나 당신 추측…….”
“무엇보다! 진하라고 그걸 모르진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적어도 지금은 이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진하의 성격을 생각해 봐요.”
진하의 성격, 솔직히 좋게 말하면 희생적인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한 성격이었다.
뱀파이어 전투와 게이트 폭주, 그리고 문방구를 물려받기 위한 시험 등 결과만 좋다면 본인이 망가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하였다.
그런 진하의 성격이 이기적이게 된다고 해서 안 좋은 걸까?
송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만약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진하의 성격이 변한 거라 할지라도 그는 현재의 목표를 잘 찾아가고 있었다.
“하는 방법만 바뀌었을 뿐이지 목표를 잃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끝내 바뀌지 않으면?”
“당신은 진하가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고 문제 삼을 건가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외부에 의해 성격이 바뀌어서 끝내 원래 목표도 잃고 바뀐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겁니다.”
단순히 막는 거라면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진하를 막을 수 있다.
대신 그들이 목표를 했던 것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을 없애려는 관리자도 차단할 수 없고 사람들을 지킬 수도 없게 된다.
“그게…… 꼭 나쁜가?”
“뭐?”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차라리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살면 어떨까 하고.”
어째서 진하가 그런 큰 짐을 지어야 하는지, 왜 진하가 상처를 입어 가면서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많은 걸 후회해요. 진하를 위한답시고 시험에서 그런 짓을 한 것도, 지금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도.”
차라리 안 될 거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내면 어떨까, 아니면 그가 부담을 받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나도 항상 고민하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진하를 냅두는 건 옳지 않아.”
“대신 마음은 편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뭐, 생각뿐이에요.”
어디까지나 짧은 망상일 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그런 상상을 해도 주변을 챙기는 진하의 성격상 그럴 일은 절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냥 지금은 잠시 두자는 거예요. 당장 할 일이 없기도 하고, 아직은 괜찮으니까요.”
당장 조급해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조급하지 않게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했다.
“무엇보다 그 생존자 그룹, 솔직히 없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생존을 위해 뭉친 그룹이라면 알만했다. 그런 그룹은 그냥 소모품으로 쓰는 게 나았다.
물론 그 속에서도 마이크라는 사람은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것 같긴 했지만 애초에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아마 전쟁 이후에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도 이만 호칭 정리 좀 하죠?”
“호칭 정리?”
“저번에 반말한 이후로 서로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건 인지하고 있죠?”
계속해서 서로에게 존대를 하고 있긴 하지만 둘 다 편하게 말하려고 할 때면 저도 모르게 반말이 나오곤 했다.
사실 말을 놓는 게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운 터라 이건 그녀도 이기수도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그냥 둘 다 말 놓죠? 괜히 애매하게 섞어 쓰지 말고.”
“뭐…… 그 건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이기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진지했다가, 감상에 젖었다가, 다시 편하게 얘기했다가, 몇 번이나 급작스럽게 분위기를 바꾸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도 진하처럼 은근히 표정에서 티 잘 나니까 얼굴 좀 관리하고.”
송하나의 지적에 이기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아차하는 표정과 함께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송하나는 그런 것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그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벌써 끝이네.”
“끝?”
“뭐가 됐든 슬라임 정도는 이겨 낼 테니 결국 마지막 게이트 보스를 잡고 신과의 한 판 승부만 남았으니 그게 끝이 아님 뭐겠어.”
“아니, 상황을 너무 낙관하는 거 아냐?”
“낙관이 아니라 팩트야. 적어도 너나 진하 둘만 있어도 솔직히 신을 제외하곤 이길 만한 사람 없을 걸?”
잠시 고민하던 이기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되든 끝은 다가오는데 뭘 해야 할지 하고.”
그녀의 말을 듣던 이기수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네가 계속 휙휙 바뀌어서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우리 조직 명단 같은 거만 아니면 다 대답해 줄게.”
“너 혹시 대자연의 날이야?”
송하나는 그대로 옆에 있는 쿠션을 이기수에게 던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넌 다 좋은데, 할 말 못 할 말 가려서 좀 해라. 항상 눈치가 없으니 솔로지.”
“뭐? 야!”
“난 다른 거 준비하러 갈 테니까. 넌 자료나 숙지해 놔. 미국 가려면.”
“뭐? 나 미국 가?”
송하나는 이기수의 말을 무시한 채 방을 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뭐가 됐든 이제는 다 끝이네.’
정말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일주일 후,
“준비는?”
“거의 다 됐습니다.”
“나랑은 따로 가는 거 알지? 제시간에 맞춰 올 수 있어?”
진하의 물음에 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만 들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딱히 어려울 게 없었다.
“저희야 괜찮은데 진하 씨야 말로 괜찮으십니까?”
진하는 이곳을 나가면 반드시 습격을 당할 것이다. 그럼 당연히 대규모 수준으로 전투가 벌어질 텐데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제 시간 안에 도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걱정 마. 어차피 가는 건 문제 없어. 오히려 너네가 문제지.”
진하의 말에 마이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며칠 전 일어났던 사건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야, 얘들 데려가라.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나한테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 놈들이지.
그나마 진하가 그들과 얘기는커녕 붙잡아서 마이크의 앞에다가 던져 주었기에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뒤통수를 맞았을 가능성이 컸다.
자칫 그들이 타국으로 넘어가다 잡히는 순간 이곳은 슬라임 밭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놈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모든 사람들을 모아서 가고 싶은 사람만 가고 아닌 사람은 기지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무르네.”
진하였으면 도망가려고 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아무리 목숨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진하를 이용해 이곳을 탈출하려고 했던 자들이다.
진하를 끌고 가려고 했으니 전력 유출에, 몰래 나가면서 음식물과 차량 등을 탈취하려고 했으니 도둑질, 그리고 그로 인한 사기 저하까지 생각하면 좋지 않았다.
“저희는 어차피 생존자들의 모임이니까요.”
확실히 그렇게 하면 기강은 잡힐지 몰라도 신뢰를 줄 수는 없었다.
마이크가 있는 곳은 한 명이 독재를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돕고 사는 걸 목표로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무르단 거야.”
“그게 제 성격이니까요.”
“그래서 그럼 전투에 참여하는 건 몇 명인데.”
“다행히 절반 이상은 참여합니다.”
그의 말에 진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만났던 쓰레기들 위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가 지원을 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조금 그런 것뿐이지 원래 다들 슬라임을 증오해요.”
가족을 뺏고 친구를 뺏은 존재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물론 그들처럼 생존이 1순위인 사람도 있지만 단순히 생존만을 바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쓰레기가 아니네.’
“그래서 작전은 모두 알고 있는 거야?”
“네. 도착 시간이랑 모두 정했어요.”
“그래? 그럼 이거 받아.”
진하가 마이크에게 쪽지를 넘겼다. 마이크는 이게 뭔가 싶어 진하를 바라봤다.
“혹시나 슬라임에게 누군가 잡아먹혀 비밀이 세어 나가면 2번째 방법으로 실행해. 거기에 적힌 건 그거야.”
“아…….”
확실히 작전이 세어 나갈 가능성이 있으니 이런 식으로 마련해 놓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럼 2번째도 들키면요?”
“도착하기만 해. 그럼 상관없어.”
작전이야 그때부터 바꾸면 되는 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시는 건가요?”
“응, 바로 출발해야지.”
진하는 배낭을 집어 들며 말했다. 쉬기는 푹 쉬었으니 괜히 늦게 가서 좋을 건 없었다.
“너도 준비하라고 시켜. 바로 출발해야지.”
“네, 그래야죠.”
마이크는 그 말을 하고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자리를 벗어났다.
“몇 명이나 살아남으려나.”
진하는 마이크가 멀어지는 자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이용하려고 한 건 자신이 맞기는 했지만 저렇게 해맑은 모습을 보니 참 마음이 그랬다.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살고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
* * *
“그럼 이틀 뒤에 보자.”
“네, 그러죠.”
진하와 마이크는 서로에게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며 인사를 나눴다.
“모태빠!”
바로 주작을 소환한 진하는 마이크가 가려는 쪽과 반대쪽으로 향했다.
“역시…….”
하늘 높이 날아온 진하는 저 멀리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는 슬라임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일주일간 진하를 잡기 위해 이 잡듯이 뒤졌을 텐데 안 들켰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미끼 역할은 좀 하겠지?”
마이크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역할은 사실 미끼의 역할이 주된 역할이었다. 전투에서의 동태 체크나 위치 전송 등을 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건 그렇게 크게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속이기 편하니 그렇게 말한 것뿐.
‘민간인들이 다 죽어야 편하게 싸울 텐데.’
애초에 이 작전에 민간인의 생존은 끼어 있지 않았다. 진하가 세운 작전은 민간인들을 제물로 바쳐 편하게 목적지로 가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생존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극소수의 민간인과 헌터들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돌아갈 곳도 없을 테고 분노에 가득차 있을 테니 다루기도 쉬울 거고 전투를 함에 있어 진하는 더 편해질 것이다.
툭,툭.
“모태빠, 고도 더 올려.”
진하는 저들이 미끼 역할을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고도를 좀 더 올릴 것을 명령했다.
“그나저나 슬라임 놈도 좀 악질이네.”
기껏 다 살려 두었다가 대충 쓸모를 다하니 저렇게 쓸어버리려고 미리 준비까지 해 놓을 줄이야…….
아마 오늘 기지에 남은 사람들 중 살아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그럼 지금 가는 곳이 함정이라는 사실은 맞다는 건데…….”
마이크나 내놨던 증거는 조작될 가능성이 현저하게 적었으니 함정은 함정이되 슬라임 역시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함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한 이유는…….
“관리자가 목표였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슬라임이 적으로 삼을 만한 건 관리자나 레이나 같은 존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존재들을 죽이기 위한 함정이 아니고서야 굳이 저런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뭐가 됐든 오늘이 슬라임의 제삿날이라는 건 딱히 다를 건 없지.”
뭐가 준비됐든 진하는 그걸 깨부술 준비가 되었다.
“속도 높여.”
끼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