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생존자들의 은신처 내 한 동굴.
“정말 그렇게 하시기로 한 겁니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수뇌부도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인 거고요.”
마이크의 말에 그의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여기에 도망쳐 온 사람들 중에는 가족이나 친구를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온 사람도 있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때, 뭐라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분명 슬라임을 잡을 수 있다. 지금은 못 데려와도 나중에는 데려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키면 다 죽을 거 아닙니까.”
한 남자의 말에 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뭘 걱정하는지 알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전쟁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딱 한 개의 주에서만 나타나는 전투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확인해 봤는데 모든 은신처의 사람들을 확인한 결과 슬라임이 있는 주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저희가 왜 같이 전투에 나서야 하는 겁니까?”
“그거야 슬라임을 잡으려면…….”
“저희는 도망자입니다.”
마이크의 말을 끊은 남자는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싫은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무서운 존재로부터 어떻게 도망쳤는데 다시 싸움을 하라뇨. 그건 정말 아니에요.”
“우리가 할 건 보조입니다. 실제로 싸우는 게 아니라고요.”
“그래도 싫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싫어요. 저는 슬라임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온 거지 싸우려고 이곳으로 온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의 말에 동감하는 건지 미미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아…… 무슨 말인지 왜 모르겠습니까. 저도 알아요. 하지만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거 아닙니까.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요.”
마이크는 동의를 구하고자 다른 사람들을 봤지만 설득이 되지 않은 건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후, 일단 내일마저 이야기하죠. 그때까지 다시 한 번만 재고해 주세요.”
마이크는 그 말을 마친 후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자리를 벗어나고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없던 사람들은 서로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각자 생각에 빠졌다.
“후…… 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아요?”
앉아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시선을 끌어모으며 말했다. 그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을 한 번씩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그냥 죽기 싫은 거잖아요?”
“죽기 싫다기보단…….”
“씨발, 솔직히 아내나 친구 버리고 왔으면 말 끝났잖아요. 쫌! 다들 스스로를 그만 속입시다.”
남자의 말에 한 명이 발끈해서 일어나려 했지만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남아 있습니까? 저 수뇌부가 말하는 자유 때문에? 아니잖아요.”
그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슬라임, 이곳을 나가 타국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어 버렸다.
“지금 수뇌부들이 여유로운 건 각성자라서 그런 겁니다. 우리는 나중에 일이 생겨 빠져나가지 못해도 지들을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건 너무 억측이 아닐까요?”
“억측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무리 그들이 우리를 구해 줬다지만 우리가 전쟁에 동원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그들이 하는 거라곤, 위치 전송과 동태 파악 등 보조적인 일만 하면 되는 건 그들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하기 싫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직 많이 살아남은 거 맞나요?”
“그게 무슨 소리죠?”
남자의 말에 듣고 있던 여자가 의문을 표했다. 우리가 많이 살아남은 게 아니라면 적게 살아남았다는 소리인 건가?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만나 본 적 없잖아요. 우리가 최후의 생존자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아, 미친 거예요? 당신 지하에만 박혀 있어서 머리가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닌가요?”
여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한 말이야 그들도 죽기 싫고 살고 싶은 맘이 많았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 남자는 순간 아차 했다. 흥분해서 이 말 저 말 다 내뱉다 보니까 해 선 안될 말까지 해 버리고 말았다.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리 도망치자는 얘기에요.”
“어디로요? 타국으로? 아니면 슬라임들이 있을지 모르는 마을로?”
분위기가 완전히 싸늘해졌다. 말을 내뱉은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라면 자칫 잘못했다간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이 될 수도 있는 판이었다.
“도…… 망치는 걸 도와 달라고 하죠. 그 고위 각성자한테.”
그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가까스로 싸늘한 분위기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 진짜 강한 각성자 같은데 타국까지만 우리를 호위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전쟁을 벌인다는 사람이 그럴 것 같아요?”
“아니죠. 사실 전쟁이다 뭐다 다 각성자들이 필요한 거지 일반인이 필요하겠어요? 거추장스럽지. 그러니 우리를 신경 쓰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리고 우리는 타국으로 도망가면 되죠. 우리가 해야 할 건 우리가 불필요하다 못해 유해한 존재라는 걸 어필하는 겁니다.”
* * *
“하아…….”
진하가 한숨을 내쉬며 강화시켰던 청력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도저히 이 이상은 들어주기 힘든 말들이었다.
‘멍청한 건지 아님 그냥 머리가 돈 건지.’
마이크가 다른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해서 청력을 강화시켰던 건데 진짜로 쓸데없는 말만 잔뜩 들었다.
그가 도청을 통해 얻은 거라곤 그냥 이곳이 생각보다도 더 개판이라는 점, 그리고 저놈들이 얼마나 그를 만만하게 생각하는지도 알았다.
‘그냥 다 버리고 갈까.’
어차피 이미 들은 내용은 다 들었다.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곤 본체가 있는 곳을 타격할 때 위치를 전송하는 일과 함정의 유무를 파악하는 일뿐이었다.
만약 그곳이 함정이라면 거기에 들어가는 순간 다 죽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뒤늦게 그가 합류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도 저런 식이라면 그냥 혼자 움직이면서 폭격을 부탁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후…… 아니다.”
잠시 고민하던 진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사람이라는 미끼가 있는 게 함정의 파악에는 더 쉬웠으니 그냥 개소리하는 건 무시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그의 여벌 목숨이 되어 줄 존재들이니까.
“그나저나 다시 멀쩡해졌네.”
진하는 자신의 멀쩡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장 쪽이 조이는 느낌과 함께 불쾌한 기분으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그런 기분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냥 거부감인 건가?’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을 미끼로 쓰거나 소모품 취급한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약 그게 아까 전에 진하가 불편했던 이유라면 그건 너무나 웃긴 일이었다.
지금껏 진하가 외면한 사람만 해도 한 트럭이 넘었으니까.
“후, 잠이나 자자.”
불편함이 사라졌는데 굳이 그 원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건 미련한 짓이니까.
그냥 지금은 오랜만에 푹 쉬는 것에 감사하며 체력만 회복하면 되는 거였다.
* * *
“흠……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이기수가 읽고 있던 서류를 송하나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받아서 살펴본 송하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이상한 게 없는데.”
“진하 말이에요. 뭔가 성격이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이기수의 말에 송하나는 다시 한번 서류를 읽어 보았다. 하지만 서류에 적힌 내용은 고작해야 이번에 진하가 지금까지 있던 현황과 정보를 짧게 기술한 거라서 뭐가 바뀌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정보일 뿐인데 뭘 알아챘다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슬라임에 대한 정보는 넘겨 두고, 진하가 생존자들의 은신처에서 했던 행동을 봐요.”
“뭐가 이상한가요?”
“슬라임인 걸 확인하겠다고 멀쩡한 사람 팔을 자른다든가 사람들을 미끼로 함정인지 알아내자는 계획이 정상적이라고 봐요?”
“문제 될 건 없는데요?”
약간 과격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정상적인 계획이었다. 이기수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느낀 건 그의 성격 때문이지 절대로 진하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송하나의 생각을 알아챈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하가 여지껏 하나 씨한테 보냈던 편지들 죄다 가져와 봐요. 가장 초기부터.”
이기수의 말에 송하나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측근을 불러 자신의 편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이기수에게 물었다.
“도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진하 말이에요. 뭔가 인간미가 사라지고 있어요.”
“인간미?”
“사실 진하 성격이 저랑 하나 씨의 딱 중간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어요. 자신의 사람은 챙기지만 냉정할 땐 한없이 냉정해지려고 하는 성격이요.”
송하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기수를 바라봤다. 지금 그 소리는 자신이 한없이 냉정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 그 뜻은 아니고요. 아무튼 이놈 성격이 사실 냉정한 척 하는 거지 냉정은 아니란 말이에요. 스스로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도 않고요.”
그렇기에 진하라는 사람은 종잡을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도 하는 바보 같은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유럽에서 에뢰섬에 폭격을 날릴 때 외면했던 것과 같은 냉정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근데 이걸 보면 그냥 완전히 사람을 도구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 강해요.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요? 우리의 목표를 생각해 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건 성격이 너무 급격히 변한다는 느낌이 있다는 거예요.”
예전부터 천천히 그랬으면 상관없겠지만 미국에 간 이후부터 뭔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 님, 말씀하신 상자 가져왔습니다.”
“여기다 두고 가.”
때마침 측근이 편지들이 담긴 상자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이기수가 상자의 뚜껑을 열기 위해 손을 뻗으려 하자 송하나가 그 손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그 말과 함께 상자의 이곳저곳을 만진 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여는 송하나, 그녀는 상자 안에서 독침을 꺼내며 말했다.
“이제 됐어요.”
“그걸 왜…….”
편지에 들은 내용이라고 해 봤자 이미 대부분 서류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주 옛날의 것 같은 경우는 이제는 쓸모가 없는 정보가 다일 텐데…….
“그냥 보안장치라고 생각하세요.”
왠지 더 이상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기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편지를 꺼내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뒤, 몇 개의 편지를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은 이기수가 말했다.
“봐 봐요. 성격이 변했어요.”
가장 처음,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부터 유럽 때까지는 성격이 변한 건가 싶을 정도로 애매했다.
약간 말하는 게 냉정해졌다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래의 성격이 안 보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 간 이후 명령을 내릴 때부터는 조금씩 이상했다.
아무리 민간인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라고는 했지만 폭격을 날리라 한 것이나 슬라임을 구분하기 위해서 살기를 일정 이상 항상 내뿜는 것 같은 냉정이라는 수준을 떠나 무감각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서류로 정리해서 볼 때는 그런 느낌이 적었지만 이번에 보낸 편지를 보면 특히 잘 보이죠?”
정보만 적힌 서류와 다르게 편지는 송하나를 대상으로 쓴 글이었기에 특히 더 티가 났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예전 것과 두고 보면 확 바뀐 것을 느끼기 쉬웠다.
“확실해요. 이 녀석 뭔가 바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