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솔직히 진하가 생존자들에게 바라는 건 큰 게 없긴 했다.
그저 슬라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내놓는 게 제1의 목표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각한데.’
고작 3개의 공간, 그렇다는 건 기껏해야 300~400여 명의 생존자들만 살아남았다는 소리다.
아니,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칭찬해 마땅한 일이긴 하다.
밖에는 아직 미국이 어떻게 된지 모르는 채 슬라임들에게 잡아먹힐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여긴 그래도 진실을 알고 저항하려는 자들의 모임이니까.
다만, 아직도 살아남은 게 문제라는 거였다.
“원래 수뇌부가 몇 명이었지?”
“총 7명이었습니다.”
총 7명, 그중 남아 있는 수뇌부는 1명. 과연 슬라임이 아무것도 몰라서 남아 있는 놈들을 내버려 둔 걸까?
진하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많이 생존해 있다면 슬라임도 생존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적게, 그것도 수뇌부도 거의 다 잡아먹혔다는 건 그냥 찾아낼 수 있음에도 찾지 않은 거라고 봐야 했다.
“3곳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어떻게 살아남았냐뇨?”
“수뇌부가 잡아먹혔어. 당연히 그에 대한 기억들도 읽혔겠지. 그런데도 아직까지 3곳이나 살아남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하의 말에 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원래 저만 아는 공간이었습니다. 다른 수뇌부들이 몇 개씩 나눠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저만 모든 곳을 알고 있죠. 그러니 이곳이 들키지 않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럼 슬라임들이 너네를 찾지 않는 건?”
“그거야 저희가 잘 숨었거나 위협이 되지 않아서 아니겠습니까?”
전혀 아니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슬라임에게는 매우 적이 많았다.
당장 진하만 해도 강대한 적이었고, 다른 나라와 레이나, 거기다가 관리자까지 수많은 존재들의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슬라임을 구분하고 약점도 안다고 말하는 놈들을 살려 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슬라임이 왜 이놈들을 살려 둔 거지?’
정보가 넘어갈 수 있음에도 살려 뒀다는 건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는 자신감 외에 추가적인 이득이 있다는 거였다.
예를 들면 거짓 정보라던가 아니면 함정이라든가…….
“너 인간 맞아?”
진하의 질문에 마이크가 예의 액체를 꺼내 자신의 손가락에 액체를 부었다.
치이익―
살짝 녹아들어 가는 손가락, 저것만 보면 정말 인간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저들의 주장, 진하는 한 번도 슬라임에 저 액체를 부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 액체 자체가 가짜던가, 아니면 이미 극복한 부분이던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저 액체만 믿고 세를 불리려는 사람들의 허점을 찌를 수 있으니까.
‘그것도 아니면 저들이 아는 본체가 있는 곳이 함정이겠지.’
아마도 본체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들어와도 죽일 수 있게 만든 함정만이 가득할 것이다.
“네가 진짜 인간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진하가 칼을 뽑아 마이크에게 겨눴다. 그 모습에 마이크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어떻게 확인해 보겠다는 거죠?”
“손맛.”
서걱!
진하의 칼이 깔끔하게 마이크의 손목을 베고 지나갔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 자신의 손이 잘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마이크는 뚝 떨어진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인간 맞네.”
“크윽…….”
마이크가 피가 흐르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강하다는 건 인지했지만 설마 S급인 그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라니…….
“이거 뿌리면 될 거야.”
진하가 홀리포션을 마이크에게 던져 줬다. 마이크는 재빨리 잘려 나간 손을 책상 위에 나란히 얹어놓고 홀리포션을 뿌려 손을 접합시켰다.
“깔끔하게 잘랐으니까 부작용은 없을 거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럼? 설마 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너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검사액을 뿌렸…….”
“그게 진짜라는 증거가 없잖아.”
진하의 말에 마이크가 이를 갈았다. 맞는 말이지만 상대가 너무 막무가내였다.
‘잘한 일이 맞나?’
워낙 끝까지 몰렸기에 한 선택이긴 했지만 진하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 잘못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인간인 건 맞으니까 결국 액이 문제거나 정보가 문제라는 건데…….”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 진하.
“일단 정보를 들어 봐야겠네. 네가 아는 거 다 말해봐.”
“그 전에 약속을 해 줘요.”
“안 해.”
“그렇다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선택해. 말하면 모두를 살려 주고, 아니면 여기에 있는 모두를 죽여 주지.”
“말 못 합니다.”
“모두를 죽는데도 슬라임에 대한 정보를 말하지 못한다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제가 굳이 당신에게 정보를 알려 줄 이유는 없죠.”
단호한 상대의 모습에 진하가 혀를 찼다. 저렇게까지 단호하면 그를 고문한다고 해도 정보를 얻기는 힘들었다.
‘한 명씩 본보기로 죽여 볼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진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의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지만 거기까지 가는 건 아니었다.
죽이는 것에 무감각해지는 것과 손쉽게 잔인해지는 것은 다른 거였으니까.
“하아…… 그렇게까지 전쟁을 막으려는 이유가 뭐야?”
어차피 슬라임을 박멸하지 않으면 미국내 모든 인간들이 잡아먹히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결국엔 본체를 죽여도 박멸이 안 된다면 슬라임을 구분해 내던가 미국 내 모든 인간을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상태.
도대체 뭐 때문에 전쟁을 막으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조국을 위한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네가 누군가처럼 무작정 인간을 지키려는 것도 아닐 거 아냐.”
“……자유.”
“자유?”
“여기는 자유의 나라 미국입니다. 저는 자유를 사랑하고 그걸 침해받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럼 너와 생존자들만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주면 되잖아.”
“달라! 단순히 내가 살던 곳에서 도망쳐서 살면 그게 무슨 자유야! 내가 아는 자유는 내가 스스로 싸워서 쟁취하는 거야. 단순히 도망치고 남들을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자유,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단어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항상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자유의 상징이라고!
이제는 죽어버린 휘젠도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런 놈이 막상 지 자유는 못 찾고 우리들을 위해 죽었지만…….
“다른데 같네.”
분명 마이크가 말하는 자유는 다를 것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게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휘젠이 입에 달고 살며 말하던 자유와는 다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자유라는 단어, 그리고 그걸 위해 싸운다는 건 확실히 아주 조금 휘젠과 비슷했다.
‘아니, 그냥 내가 그렇게 투영하고 싶은 걸지도…….’
그만큼 휘젠에 대한 죄책감에 진하에게 진하게 남아 있었다.
“후…… 좋아. 그럼 타협을 하자. 난 일단 전쟁을 안 한다는 약속은 못 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가 명령하지 않아도 이미 송하나나 송준하가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진하가 무언가 단서를 못 찾아낸다면 이후에는 그가 명령하지 않아도 전쟁을 시작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네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본다고는 약속할게. 최대한 미국 내 살아남은 사람들이 안전한 쪽으로 진행할게.”
진하의 말에 마이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보아하니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잘 선택해. 내가 너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건 어디까지나 배려야.”
“배려…….”
“난 이미 해결 방법을 알아, 다만 위험하기에 아직 하지 않은 것뿐이지. 그리고 나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네가 선택할 건 단 두 개야. 이대로 다 죽던가. 아니면 정보를 주고 실낱같은 희망에 목숨을 맡기던가.”
마이크가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힘이 없는 자는 선택권이 없고 그저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었다.
그건 진하도 많이 느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상적인 방법을 추구해 줄 수는 있지만 그걸 고수하기에는 진하도 힘이 약한 약자였다. 같은 약자끼리 해 줄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내에서의 배려가 끝이었다.
“정말로 노력해 줄 수 있나요?”
“최대한 피해가 안 가는 쪽으로 노력할게.”
“알겠습니다.”
마이크가 너무 세게 깨물어 터진 입술에서 피를 훔치며 말했다.
* * *
2시간 후.
“이게 다야?”
“네, 이게 다예요.”
마이크의 말에 진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가 너무나 형편없어서? 아니었다.
‘너무 정보의 질이 높아.’
고작 생존자들이 얻은 정보인 것치고 정보가 너무 높았다.
본체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장소부터 그에 따른 논리, 그리고 슬라임을 구분해내는 약과 일반인이 슬라임을 죽이는 방법까지.
정보의 질이 높다 못해 솔직히 이 정도면 전쟁까지 안 가도 되겠다 싶었다.
‘이건 절대로 슬라임이 가만둘 정보들은 아니란 말이지…….’
특히 슬라임 구분법이라던가 본체에 대한 정보는 너무 자세해서 가짜라고 판단하기도 애매했다.
아니, 이 정도까지 가짜라면 믿어줘도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본체가 있는 곳을 혼자 가서 죽이는 거겠지?”
“네.”
“그건 불가능해.”
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보안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냥 불가능했다. 이런 정보 속에서 슬라임이 노릴 만한 건 함정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본체로 미끼로 둔 함정이었다.
“전체적인 전쟁을 막을 게 하지만 이건 나 혼자 들어가지 못해.”
“어째서 그렇죠? 당신은 이미 혼자서 수만 마리의 슬라임도 죽였었잖아요.”
“숫자의 문제가 아니야. 그 이후의 문제지.”
혼자서 들어가 죽일 수 있냐고 묻는다면 가능했다. 가능했지만 그럼 그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 이후에 관리자와의 싸움에서 인간들이 너무나 극도로 불리해지게 된다.
“이건 어쩔 수 없어. 전쟁을 일으켜야 해.”
국지전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그게 맞는 순리였다.
“역시 안 되는 군요.”
“미안, 하지만 이게 효율적이야.”
“아닙니다. 일단 쉬실 곳을 마련해 드리죠.”
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진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가는 진하는 가슴의 한쪽이 뭔가 아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상하게도 불편한 이 느낌, 분명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어쩔 수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왜 이리 불편한 걸까…….
“쉬십시오.”
마이크가 공간 하나를 안내해 주고 돌아갔다. 작은 침대 하나만이 놓인 공간, 진하는 그곳에 앉아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두근, 두근
역시나 이상 없이 뛰고 있었다. 그냥 이 통증은 그가 내린 결론에 대한 불편함인 게 분명했다.
까득!
진하는 이를 갈았다. 마이크의 얘기를 들은 후부터 생긴 이상한 불편함. 그리고 그렇게 생긴 불편함이 점차 커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