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81화 (181/202)

#181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진하는 간단한 목적이나 궁금한 점을 제외하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고 진하를 데리러 온 남자 역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맘이 없는 건지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약 3시간, 사람이 없는 곳 위주로 움직이던 차량은 이내 어느 돌기둥 앞에 정지했다.

“여기야?”

“아니.”

다 왔냐는 질문에 고개를 젓는 남자, 잠시 뒤, 누군가가 돌기둥에서 나와 남자에게 다가왔다.

“감시원이다. 여기서 인간인 걸 한 번 더 증명하고 가야 되지.”

남자는 차량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감시원은 남자의 손등에 액체 한 방울을 톡 하고 떨어뜨려 확인 후 진하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진하 역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어 검사를 받았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통과가 됐는지 남자는 차량을 다시 몰아 돌기둥 안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환상 마법인가.’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돌기둥이 있는 걸로 보아 마법 관련 헌터가 조치를 취한 듯했다.

“이제 내려라.”

차량에서 내린 진하는 벌써 내려서 앞서가는 남자를 재빨리 따라갔다. 생존자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뭔가 특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아무것도 없었다.

“너희 수뇌부는 언제 만나지?”

“잠시만 기다려.”

지하로 내려와 어느 방에 도착한 남자는 문에 있는 스크린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검게 물들어 있던 스크린이 밝게 펴지며 복면을 쓴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확인을.]

“네.”

남자는 문의 한쪽에 있는 구멍에 손을 넣었다.

치이익!

예의 손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246589]

말해 주는 번호를 문 한쪽에 있는 번호키에 입력하는 남자, 번호를 모두 입력하자 닫혀있던 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치료는 안 해?”

진하는 손 이곳저곳이 녹은 남자를 보며 물었다. 치료제만 뿌리면 어느 정도 치료가 될 텐데 남자는 치료할 생각이 없는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절차가 남았거든.”

남자는 그 말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또 하나 문. 남자는 아까와 같은 절차를 한 번 더 거치고 나서야 치료제를 꺼내 손에 부었다.

“손이 남아나질 않겠네.”

단순히 들어오는 데만 총 3번에 걸쳐 검사를 받았다. 보아하니 외부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같은 절차를 받는 것 같은데 아무리 한 방울이라지만 손이 녹아내리는 걸 참는 것도 대단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하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언제든지 슬라임이 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그런 공포가 있긴 했다.

“아무튼 잘 왔다. 이곳이 생존자들의 마을이다.”

남자는 주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지하에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과 그를 중심으로 작은 굴이 수십 개나 뚫려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개미굴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진하는 남자에게 질문했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꽤 크다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이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1, 200여 명 정도, 커다란 단체라고 말하기엔 애매했다.

“이게 끝은 아니거든. 우리 단체는 점조직 형태다.”

“들킬까 봐?”

“그래, 실제로 처음 만들어졌을 땐 50여 곳이었지만 지금은 20여 개밖에 남지 않았지.”

“처음에 50여 개나 만든 게 더 신기한데. 아직까지 안 들킨 것도 대단하고.”

“1년 전만 해도 슬라임보단 인간이 더 많았으니까. 그리고 수뇌부를 제외하곤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잘 모르거든.”

남자의 말에 진하는 어쩌면 남은 숫자가 더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의 위치를 모르는데 20여 개가 남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 사실은 아마도 수뇌부가 말해 줬을 텐데 느낌상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데리고 올 리 없겠지.’

진하가 슬라임에게 쫓기는 걸 알면서도 은거지에 데려왔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들킬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진하가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그들이 몰렸다는 걸테니까.

“이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남자는 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가 끝인 건지 그저 서서 한쪽을 가리키고만 있었다.

진하는 수고했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안쪽 굴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책상에서 일어나 진하에게 인사를 했다. 진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물었다.

“네가 수뇌부야?”

“네. 제가 생존자들의 수뇌부 중 하나입니다. 편하게 마이크라고 불러 주세요.”

“흠, 알았어. 그럼 바로 묻겠는데 생존자들은 총 몇 명이지?”

“비밀입니다.”

“그럼 굴의 숫자는?”

“비밀입니다.”

남자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경계를 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줄이야…….

“네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뭐야?”

“이곳에 대한 정보를 제외한 모든 것입니다.”

애매한 대답, 이곳에 대한 정보라는 뜻은 너무 포괄적이었다.

진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놓여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마이크 역시 자리에 앉아 진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럼 일단 여기는 원래 어떻게 구했지?”

이런 곳은 단순히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 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잠깐 둘러본 결과 이곳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흔적들이 존재했다.

즉, 애초에 그들이 만든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구했다는 소리였다.

“이것도 싫으면 말고.”

“아뇨, 그건 말해 줄 수 있겠네요. 이곳은 원래 미국 정부에서 오래전에 대피용 기지나 은신처로 사용하려고 만든 공간입니다.”

“그런 곳인데 용케도 슬라임들에게 안 들켰네?”

정부에서 만든 거면 당연히 자료가 있을 테고 슬라임들도 그걸 알 것이다. 그럼에도 들키지 않았다는 건 뭔가 수가 있다는 거였다.

“이곳에 대한 자료는 그 어떤 곳에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유일하게 모든 장소를 아는 건 저뿐이죠.”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제 능력은 영혼 교감이거든요.”

그의 능력은 영혼 교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과거의 사념을 읽는 능력이었다. 이 공간은 게이트가 발생하기 전, 100년도 훨씬 넘는 예전에 전쟁에 이용하려고 만든 공간이었다.

크고 작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굴은 총 50여 개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자료들은 모두 정부에서 폐기한 된 채로 입에서 입으로 미국 대통령들에게만 전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러한 구전은 끊기게 되었고, 이런 곳들은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 되버린 채로 방치되다가 게이트 발생 이후 능력을 가지게 된 마이크가 찾아내 쓰고 있는 거였다.

“유니크한 능력이네.”

“아마도 유일할 겁니다.”

수많은 능력이 있지만 영혼을 다루는 능력은 극소수, 그중에서도 사념을 읽는 능력은 마이크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운. 아니, 실력이네.’

단순히 이런 공간을 알게 됐다고 해도, 그 공간을 고치고 사용하여 생존자들의 공간을 만든 것 자체는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20여 개가 남은 이유는 초반에 공간을 만들다가 슬라임들에게 들켜서 죽은 걸 테고.

“그럼 슬라임을 구분하는 액체는 뭐야?”

“그건 비밀입니다.”

“이것도 비밀, 저것도 비밀, 아주 다 비밀이네.”

처음으로 뭔가 말해 주길래 이제 좀 대화의 물꼬가 트이나 싶었는데 또 비밀이었다. 이건 거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만 말할 뿐 대화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하아, 좋아. 그럼 내가 필요한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답변을 했다. 아마도 이 부분은 본 목적이기에 숨기는 게 없는 듯했다.

“단순히 전력 강화는 아닐 테고, 당연히 나한테 슬라임을 죽여 달라는 거겠지?”

“네.”

마이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한 것은 슬라임의 죽음, 그리고 그걸 해 낼 만한 존재는 진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뭘 믿고 이런 부탁을 하는 거지?”

“지난 한 달간 싸우는 걸 봤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자들은 슬라임의 동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그 덕에 진하가 협회를 부수고 지난 한 달간 셀 수 없을 만큼의 슬라임들을 잡은 것을 생존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마도 SS급, 아니 그 이상이라고 판단되는데, 아닌가요?”

“머리는 잘 돌아가네. 그런데 단순히 죽여주길 원하는 거라면 나는 당장은 못 해.”

“제가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의 말에 진하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난 한 달간 진하가 밝혀내지 못한 것을 그가 안다면 약간 말이 달라지기는 했다.

“죽이는 방법을 알아?”

“아뇨,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본체가 있을 만한 공간은 알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라도 들어 보자. 어딘데?”

“그전에 말씀해 주시죠. 저희를 도와 주실 건가요?”

“어차피 같은 처지 아닌가?”

“다르죠. 당신은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제야 진하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마이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슬라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피해로 슬라임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였다.

협회로 미사일이 떨어진 걸 알고 있을 테니 진하가 전쟁을 일으킬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그가 부탁하는 건 단 하나, 전쟁을 통해 아직 남아 있는 일반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나도 사람을 죽이는 건 좋아하진 않는데 말이야.”

“하지만 꺼려 하지도 않겠죠.”

“그건 맞아. 그리고 네 부탁은 거절하는 걸로 하지.”

진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본체에 대한 정보는 탐이 나긴 했지만, 마이크에게 진하는 그 어떤 것도 약속해 줄 순 없었다.

“잠시만요!”

마이크가 일어나려는 진하를 붙잡았다. 그는 진하가 움직이기 전에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슬라임의 약점, 본체의 위치, 현 상황 같은 게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시는 겁니까?”

“아니, 필요하지.”

“그런데 고작 작은 약속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요?”

그가 원하는 건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전쟁의 방지와 슬라임의 죽음.

슬라임의 죽음은 진하에게도 필요한 것이니 그가 약속할 것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슬라임을 죽인다. 고작 그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약속 하나 때문에 모든 정보를 포기하겠다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내가 포기하는 이유는 간단해. 첫째, 정보에 대한 신뢰가 없어. 둘째, 고작이 아닌 약속이기에 포기하는 거야. 셋째, 너희는 이미 날 속이고 있어.”

정보의 신뢰성, 이건 솔직히 뒤로 놔도 됐다. 마이크가 주는 정보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었다.

다만,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줄 순 없었다. 본체를 잡는다고 슬라임이 완전히 죽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확신에 가까운 추측,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살아 있을지 모르는 인간들을 위해서 진하는 위험을 부담하는 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미 속인 것, 마이크가 진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깨달은 것인데 이놈들 정말로 막다른 곳까지 몰린 상태였다.

“너희 20개나 달하는 생존자 그룹이 있는 건 맞아?”

20개, 한 굴당 단순히 100여 명이라고 따져도 총 2000여 명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외국을 나가는 좋은 방법도 있는데 단순히 숨어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당장 아래쪽으로만 내려가도 다른 나라가 나오는데 말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질문의 형태였지만 이미 진하가 확답을 내린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가 물었다.

“협상을 할 거면 제대로 속이던가. 어설프게 저자세로 나오니까 다 들키지.”

“그렇군요.”

“그리고 너네가 숫자를 부풀린다고 해서 협상에 유리해지는 것도 아니야.”

진하가 생각하기엔 이놈은 협상이나 이런 것에 전혀 능력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수뇌부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이런 머리 쓰는 역할이 아니었겠지.

그런데도 이놈이 나왔다. 그것도 엄청 중요해 보이는 자리에…….

“진짜 얼마나 남았어? 아니 수뇌부는 몇 명이나 남았지? 살고 싶다면 제대로 이야기해.”

진하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마이크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은 공간은 셋, 그리고 수뇌부는 저 혼자 남았습니다.”

“미쳤군.”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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