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오셨습니까.”
송준하가 송하나를 보며 작게 인사했다. 항상 회의가 끝날 때마다 왔기에 이번에도 올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한국이랑 독일만으로 전쟁을 하던 저놈들 세뇌시키든 뭐든 해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습니까. 기다려주시면 꼭 설득하겠습니다.”
지금 저들의 상태로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한국만 먼저 나선다면 견제가 들어올 거고 세뇌를 시켜서 여기서 안건을 통과시킨다 한들 자신의 국가로 돌아가면 세뇌가 풀려서 오히려 역효과가 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이들은 대표였지만 최종결정권자라고 하기엔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것도 설득이 될 만한 놈들이 있을 때나 하는 말이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언제? 진하가 죽은 뒤에?”
송하나의 날카로운 말에 송준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가 강하긴 했지만 언제까지 버틸 거라고는 얘기하기 힘들었다.
송준하도 그런 그녀의 걱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얼마나 날카로워졌으면 어느 순간부터 차가울지언정 존대는 했던 그녀가 말까지 놓으며 쏘아붙이겠는가.
“다른 국가들도 몇 달씩이나 버티진 못할 겁니다. 다른 나라로 퍼지면 큰일 날 테니까요.”
사실 이미 외국에도 퍼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부분은 추측의 영역이었다. 진하의 정보에 의하면 집어삼켜 인간 행세를 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 추측이 설사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미국조차 모조리 삼키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은 고작해야 조금이겠지.
“그러니까 지금 저 새끼들이 더 뻣뻣하게 구는 거잖아.”
송하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그 사실을 송준하가 밝히지 말아야 했다.
그 한계라는 걸 알기에 저렇게 정치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을 그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어째서 말한 건지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달칵!
“시험해 볼까…….”
“워, 잠시만요. 저 진짜 인간 맞아요. 한국 밖으로 거의 나간 적도 없지 않습니까.”
“쯧!”
단검을 꺼냈던 송하나가 도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녀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그만큼 답답하다는 걸 표현한 거였지.
“제가 다 미숙해서 그런 겁니다. 설마 몬스터와 관련된 상황에서도 저럴 줄은 몰랐어요.”
지금 이 사태는 지난번 게이트 폭주 때와는 다른 경우였다.
게이트 때와는 다르게 피해가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었고 적은 찾기도 힘들었다. 그렇기에 협력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가 멍청했었다.
“그러고 보니 유럽 협회는 미국으로 원정 갔던 인원들 검사 완료됐나요?”
“진하씨가 말해준 특징으로 검사했는데 인간으로 나와요. 물론 이 사실도 애매하긴 하지만 일단은 인간으로 봐야겠죠. 아마도 일부로 감염시키지 않았던가 게이트 폭주 전후로 생긴 일이라서 걸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이네요.”
“거부를 표한 국가들도 그건 불안한지 모두 검사를 진행하고 있더군요.”
검사 결과만 보면 참 좋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각 나라들이 더욱 기세등등했을 걸 생각하니 참 씁쓸했다.
어떻게 적나라하게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잘 뭉치면서, 조금이라도 스스로 해결 가능한 상황에서는 흩어지는 건지…….
‘아니, 이것도 뭉친 거긴 한가?’
지난 모든 사건에서 한국이 너무 강한 모습을 보여 준 게 문제였던 것 같았다. 같은 3강인 독일조차 힘겨워 하던 것들을 모두 수월하게 막은 것이 문제였었다.
본래 한국은 같은 3강이지만 그중 최약체로 평가됐었다. 타국에 비해 헌터들의 평균 랭크가 높아 잠재력은 매우 높지만 S급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애매한 국가라는 포지션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게이트가 서울에 있기에 플러스 된 점도 있던 거 였지만.
그런데 그런 국가가 반전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니 얼마나 더 많은 걸 숨겼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동안의 정책이 잘못된 게 너무 컸어.’
애초에 지난 협회가 게이트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한 짓들이 너무 많았다. 높은 관세는 물론 타국의 헌터들을 한국으로 귀화시키기까지 했으니까.
국가 간의 전쟁 방지 조약을 빌미로 더욱 패악을 부렸던 게 가장 문제였고.
“그래서 역시 한 달 이상 걸린다는 거 맞지?”
“예, 그렇죠.”
송준하의 말에 송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송준하의 얼굴이 급속히 굳어졌다.
평소에 이런 걸 할 리가 없는 인물이 송하나였기에 순간 왠지 불안했다.
“미국에 있는 조직원들에게 각 나라로 퍼지라고 말해뒀다.”
“네? 하지만 연락이 안 되신다고…….”
“답장이 안 오는 거지. 지령 자체는 불가능하지는 않거든.”
그녀가 한 일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존에 연락이 끊긴 인원들에게 각 나라로 퍼지라고 지시한 것과 한국에서 조직원을 선발해 미국에 가서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후 여러 나라로 퍼지라는 것.
“그리고 외국에 나가 있는 조직원들한테 보고가 왔어. 여기서 보낸 인물 모두 임무 완료, 그리고 일부지만 연락이 끊긴 조직원들도 왜인지 모르지만 입국 확인. 아, 독일 등 우리를 지지한 나라는 뺐어.”
송하나의 말에 송준하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지금 다른 나라로 폭탄을 돌렸다는 소리니까.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왜?”
“시간을 들이면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첫날과 비교하면 지지하는 나라들도 늘었고요. 근데 그걸 모두 수포로 되돌려 놓으면 어떡합니까!”
송준하의 말에는 깊은 분노가 담겨있었다. 지금 그녀가 한 일은 그가 여지껏 고개를 숙이며 해 왔던 모든 일들을 무시하고 뒤엎는 행위였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그나마 모았던 찬성표 역시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너는 누구 편이야?”
“네?”
“잘 들어. 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게 목표일지 모르겠지만 내 목표는 오직 진하를 살리는 게 목표야.”
그걸 위해서라면 다른 놈들 따위는 어떻게 되든 그건 알 바 아니었다. 김진하, 오직 그만이 그녀의 목적이자 이유였다.
“그럼 더 기다리셨어야죠! 이렇게 되면 더 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 그래, 네 방법이 맞을지도 몰라. 확실히 좋은 방법이지.”
적을 최대한 만들지 않고 적들조차 끌어들여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이건 확실히 적도 만들지 않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런 이상과도 같은 방법을 실행해 낼 수 있는 송준하는 분명 대단했고 높은 능력을 가진 게 맞았다.
“근데 우리가 지금 필요한 건 단결력이 아니라 시간이야.”
모든 국가들이 힘을 모은다고 해도 진하가 없으면 의미가 없었다.
지금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고작 슬라임 따위가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 눈앞에 위험에 단결하기 위해서 진하를 희생한다면 그건 말짱 도루묵이었다.
물론 송준하 역시 그걸 알 테고 진하가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이런 방법은 사용한 거겠지만 그녀의 기준으로 송준하의 방법은 이미 아웃이나 마찬가지 였다.
“당장 다른 국가들 다시 불러들여. 이유는 몬스터의 침입이라고 하면 되겠지.”
다른 나라들이 참전하기 싫다면 억지로 참전하게 만들면 되는 거였다.
* * *
치와와 사막 한가운데 그곳에 도착한 진하는 아무런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쯤인데.”
쪽지의 내용 대로라면 이쯤에 무언가가 나타나야 했다. 그건 적인 슬라임일 수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존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런 존재가 그에게 아무런 살기가 없이 쪽지를 보냈다는 건 분명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거겠지.
“함정만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함정만 아니라면 그게 무엇이 되든 상관은 없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이용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잠시 뒤, 미지의 상대 역시 진하가 도착한 것을 확인했는지 저 멀리서 차량 한 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끼익!
차량이 진하의 앞에 멈춰서고 차량에서 내린 남자 한 명이 진하를 보고 말했다.
“네가 슬라임들에게 쫓기는 놈인가?”
“흠, 적은 아니네.”
진하는 상대를 보고 짧게 평했다. 일단 슬라임의 존재를 아는 것도 신기했지만 말하는 투로 보아 확실히 슬라임들의 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를 왜 부른 건데?”
“그 전에 확인 하나만 하지. 손을 내밀어라.”
“내가? 왜?”
“네가 슬라임인지를 확인해야 하니까.”
그 말에 진하는 흥미가 동하는 걸 느꼈다. 슬라임인지를 확인하는 법, 그건 진하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겉으로는 전혀 구별되지 않았으며 죽인 뒤에도 인간의 모습 그대로 죽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즉, 살기라는 불안정한 방법 외에는 전혀 구분이 안 되는 게 슬라임이었다.
“이건 슬라임을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액체다. 손가락 하나면 된다.”
이상한 시약병 하나를 꺼낸 남자가 시약에 대해 짧게 설명을 하고는 어서 손을 내밀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진하는 그런 남자에게 순순히 검지 하나를 내밀었다.
똑!
치이이익!
갑작스런 통증에 진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연기를 내면서 액체가 그의 손가락을 녹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진하의 몸이 워낙 질겨서 겉 피부만 살짝 태우고 끝났지만.
“으음…….”
남자는 진하의 손가락을 보며 약간의 침음성을 흘렸다. 눈동자가 떨리는 게 뭔가 예측한 대로 되지 않는 듯싶었다.
“뭐가 잘못됐나?”
“아니, 슬라임이 아닌 건 확인했다. 다만 조금 의외군. 원래라면 깊은 상처가 날 텐데.”
보아하니 상처가 깊지 않아서 저런 표정을 지는 것 같았다.
하기야 뭔지는 몰라도 몸에 피해를 주는 종류라면 이런 걸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등급이 높을수록 모든 것에 대한 저항성이 커지는데 S급 이상은 만나기는커녕 보기도 힘들테니까.
“그럼 너도 확인해야지?”
“뭐?”
“뭔진 몰라도 슬라임을 확인하는 거라며 너도 해 봐.”
진하의 말에 남자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가락에 액체를 한 방울 떨궜다. 그러자 액체는 하얀 연기와 함께 남자의 손가락을 일부 녹였다.
“됐나?”
“반쯤은.”
애초에 액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니 완벽하게 믿을 순 없었다. 다만 진짜라면 인간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보이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 타라. 여기 있으면 쉽게 노출된다.”
“뭐 그러지.”
진하는 남자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량에 탑승했다. 만약 이게 함정이라 해도 딱히 위험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부르릉!
차량이 출발하고 사막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차량을 보며 진하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그 액체 뭐로 만들어진 거지?”
“그건 나도 모른다. 일부 수뇌부만 알지. 다만 슬라임에게 닿으면 펑하고 폭발한다.”
“그래?”
인간에게는 녹아내리고 슬라임에게 닿으면 폭발하는 액체라…… 뭔지는 몰라도 진짜라면 어떻게든 꼭 조합식을 알아내야 했다.
슬라임을 구분할 좋은 무기를 얻는 것일 테니까.
“그럼 그건 넘어가고 하나만 더 질문하지. 너희는 누구고 나는 왜 찾는 거지?”
진하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침묵을 했다. 아마도 해 줄 수 있는 말인지 골라내는 듯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골라낸 건지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저 생존자라고 알아 두면 된다. 그리고 목적은 전력 강화라고 해 두지.”
“흐음…….”
전력 강화와 생존자, 직관적이면서도 두루뭉술한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무력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진짜로 슬라임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생존자라면 무력을 제외하고 얻을 것은 생각보다 많을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아.’
막혔던 돌파구에 희망이 조금 생기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