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한 달 후, 미국 치와와 사막. 본래라면 잡풀들로 무성해야 할 사막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초록색 바다로 물들어 있었다.
꾸물, 꾸물, 꾸물
“아, 쫌!”
진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슬라임 한 마리를 벤 다음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난 만큼 슬라임들은 진하를 향해 달려들었고, 진하는 연신 칼을 휘두르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모태빠!”
끼악!
진하의 외침에 소환되어 주변을 향해 불과 전격을 내뿜는 모태빠, 진하는 빠르게 청소되는 슬라임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아, 아슬아슬했네.”
타이밍 좋게 재소환 대기 시간이 끝났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꽤 고생할 뻔했다. 뭐 고생이라고 해 봤자 목숨의 위협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진짜 질린다, 질려.”
진하는 빠르게 재가 되어 사라지는 슬라임들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숫자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로 도를 넘어선 숫자였다.
그 덕에 협회 폭격 이후로 약 한 달간 진하는 제대로 된 잠도 식사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렇게 버틸 수 있는 이유도 모태빠와 가져온 아티팩트 덕분이었다.
“천둥새가 왜 잡혔나 했더니…….”
하나하나의 무력은 저급한 슬라임이거나 높아 봐도 B등급 몬스터 정도였다. 다만 그 숫자가 수십만을 넘어간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치 1분 1초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달라붙는 슬라임들은 약할지는 몰라도 피로도 면에서는 그 어떤 몬스터들보다 끈질겼다.
“나도 슬슬 대책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이런 식으로 쫓겨 다니면서 슬라임들을 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몸이라고 해도 진하 역시 인간, 제대로 된 휴식이 없다면 결국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역시 전쟁이 답인데…….’
처음에는 슬라임의 본체를 찾으려 했으나 본체는커녕 아무런 것도 찾지 못했다.
돋보기를 이용해 흔적을 찾으려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 강력해 보이는 개체를 위주로 잡아 보았지만 역시나 실패, 솔직히 말하자면 한 달이나 지났지만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분명 본체가 존재하는 건 확실했지만 땅덩어리가 너무 넓었고, 본체와 분신 사이의 차이점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다른 나라는 지켜볼 뿐인 건가.”
이미 미국의 상태에 대해 송하나에게 편지를 이용해 정보를 전달한 지는 꽤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조차 하지 않는 건 다른 나라들은 절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보내온 마지막 편지에도 여전히 보류라는 말밖에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막막하네.”
이런 종류의 막막함은 또 처음이었다. 상대가 엄청 강한 건 아니지만 실체가 없는 적을 상대하는 기분이었으니까.
미국이란 땅에서 슬라임들을 상대하는 건 적과 아군을 알아볼 수 없는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끼아악!
주변에 있는 모든 슬라임들을 죽였는지 모태빠가 진하의 앞에 착륙했다. 진하는 자신에게 부리를 비비는 모태빠를 잠시 쓰다듬어 주고는 바로 등에 올라탔다.
“근처에 있는 마을로 가 줘.”
끼악!
진하의 명령에 날아오르는 모태빠, 진하는 모태빠의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계속해서 슬라임을 죽일 방법을 모색했다.
가장 좋은 건 무차별 폭격, 각 나라가 힘을 합쳐 미국에 모든 미사일을 퍼부으면 거의 괴멸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패스.’
아직도 협조에 대한 건 보류 상태인 걸 보면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했다.
두 번째는 본체를 찾는 것. 이것 역시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아주 불가능하진 않았다.
‘분명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
힘을 모으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는 했지만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강한 놈들 위주로 죽이고 다니면 언젠가는 잡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찌 됐든 저쪽에서도 물량으로 안 된다는 판단이 들면 그를 잡기 위해 최대한 강해질 게 뻔했고, 강한 놈들 중에 본체가 있을 테니까.
‘문제는 이것도 기약 없다는 게 문제지.’
사실 계획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희망적인 문장들만 나열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가장 필요한 지원은 다른 나라에 막혀서 보류 상태고, 다른 방법은 딱히 보이지 않으니까.
‘아니, 하나 더 있긴 하나…….’
잠시 생각하던 진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은 하지만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으니까.
펄럭!
어느새 마을에 도착한 건지 모태빠가 날갯짓을 하며 착륙을 했다. 등에서 내린 진하는 모태빠로 인해 놀라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게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았다.
‘적인가, 인간인가.’
겉으로 보기엔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안해하는 인간이지만 저 속에도 슬라임들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혹시 여기 마트 있나요?”
“Who are you? For what purpose did you come?”
“아, 효과 다 됐나.”
진하가 혀를 차며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배낭에서 통역 목걸이를 하나 더 꺼내 마법을 작동시켰다.
‘통역 목걸이도 마지막인가.’
“대답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경찰들이 권총을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런 걸로 안 된다는 거 알 텐데.’
“저는 그저 음식과 생필품을 사러 왔을 뿐입니다.”
진하의 말에 경찰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 그러던 중 경찰 한 명이 책임자로 보이는 경찰에게 속삭였다.
“저 동양인, 뉴스에 나온 그 테러리스트 헌터 아닙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장 지원을 부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경찰 한 명이 빠르게 경찰차에 있는 무전기로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하지만 어느새 그 경찰 앞에 도착한 진하는 무전을 하려는 그의 손을 붙잡아 멈췄다.
타탕!
갑작스런 진하의 등장에 놀란 경찰들이 재빨리 진하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진하는 날아온 총알은 무시한 채 그대로 말했다.
“진짜 음식만 사고 나갈 건데 안 될까요?”
“경찰은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손을 붙잡힌 경찰이 겁에 질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있는 권총으로 진하의 머리를 향해 총을 발포했다.
탕!
당연히 피해가 없을 걸 알기에 그대로 총에 맞아 준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결정하세요. 여기서 다 죽을래요. 아니면 잠깐 가만히 있다가 저 가면 신고할래요?”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퍼지는 농도 짙은 살기, 경찰들은 그 살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덜덜 떨거나 주저앉았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진하는 그 말과 함께 살기를 거뒀다. 하지만 그가 살기를 거뒀음에도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든 말든 진하는 자신에게 붙잡힌 경찰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인 후 빠르게 장소를 벗어나 마트로 향했다.
‘여기도 오래 못 있겠군.’
협박했다고 하여 경찰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면 결국 진하를 신고할 게 뻔했다.
하지만 어차피 진하에게 필요한 건 그 잠깐의 시간이었기에 그건 상관없었다.
딸랑!
마트에 들어선 진하는 빠르게 눈에 보이는 통조림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물품 따위 고를 시간은 없었다. 빠르게 사고 다시 사막으로 나가야 했다.
계산대로 다가가자 점원이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하는 그 모습이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게 근처에 있는 종이에 전화번호 하나를 적었다.
“여기로 제 이름 대고 청구하세요.”
종이를 계산에 위해 올린 진하는 통조림을 모조리 배낭에 쓸어 담고는 배낭을 들어 올렸다. 배낭이 조금 흔들흔들한 게 아무래도 이것 역시 수명이 거의 다한 듯싶었다.
볼일을 모두 마친 진하는 곧바로 마트 문을 붙잡았고, 그 모습에 점원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저기요!”
서걱!
부르는 목소리에 진하가 그대로 점원의 목을 칼로 그어 떨어뜨렸다. 그리고 땅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점원을 보며 혀를 찼다.
“여기도 일부는 먹힌 건가.”
현재 진하는 착륙한 지점에서 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도록 일정량의 살기를 계속해서 내뿜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말을 걸었다는 건 상태가 B급 이상의 헌터거나 몬스터라는 건데 그 정도의 헌터가 여기서 점원이나 하고 있을 리 없을 테니 몬스터였다.
“독이 들어있진 않겠지?”
아까 마을에서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들도 보였으니까 그래도 이곳은 모든 인간들이 먹힌 상태는 아닌 듯하니 독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번에 슬라임으로 이루어진 마을에 잘못 들어갔다가 독이 든 음식만 왕창 먹은 경험이 있는 진하로서는 약간 찝찝하긴 했다.
“에휴, 어서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때, 진하를 향해 돌멩이 하나가 빠르게 날아왔다. 진하는 얼굴을 향해 던져진 돌멩이를 받아 들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약해?’
적이 했다기엔 너무나 허술한 공격, 확인해 보니 돌멩이에 작은 쪽지 하나가 묶여 있었다.
진하는 뭐지 싶어 돌멩이를 버리고 그곳에 묶인 쪽지를 펼쳐 확인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지역.>
짧게 써진 쪽지, 뭔가 싶어 던진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차량을 타고 멀어지고 있었다.
‘뭐지?’
* * *
각 나라의 정상들이 모인 회담장. 그곳에는 송준하가 서 있었고 각 나라의 사람들이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일본은 거절합니다.”
“러시아도 거절하죠.”
둘을 시작으로 다른 나라의 국가들 역시 연신 거절을 표했다. 그나마 긍정을 내비친 나라는 독일을 비롯한 몇몇 국가뿐이었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애초에 미국이 몬스터한테 먹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러시아 대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송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떤 나라인데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쾅!
“증거라면 여기 잔뜩 드리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몇 번이나 보류를 하는 겁니까.”
송준하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손 아래에는 사막에서 찍힌 위성 사진은 물론, 각종 자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러시아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합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죠. 무엇보다 슬라임이라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그리고.”
러시아 대표가 송준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솔직히 말해 봅시다. 각자 미국에 스파이들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그런 그들이 뭐라고 보고했는지 아십니까?”
“그건 슬라임들에게 먹혀서 그런 겁니다.”
“우리 러시아 스파이들에게는 심장 박동이 멈추는 순간 신호가 오게끔 장치를 만들어 놨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신호가 오지 않았고 기계가 멈추지도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말에 송준하가 이를 갈았다. 다른 대표들 역시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이 미사일을 쏜 것을 이번에 넘어간 걸로 끝내죠. 언제까지 이 지루한 회의를 이어가야 하는 겁니까?”
“옳소. 우리 중국이 그리 시간이 많은 나라로 보이시오?”
“아무리 한국이라도 이건 좀 너무했소.”
머리에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차라리 진짜로 미국이 잡아먹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들 사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어.’
처음부터 현재 상황을 거의 다 오픈한 게 문제였다. 저들에게 기존의 SS급 헌터들이 슬라임의 숙주가 되었고 진하가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걸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저들은 미국이 먹혔든 아니든 SS급 헌터들이 사라진 상태니까 나중에 핵이나 여러 발 쏘면은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그때까지 잠시 버티면 한국의 또 다른 SS급 헌터로 추측되는 진하 역시 죽일 수 있을 테니 일거양득으로 보고 있는 상황.
‘머리 아프다.’
마음 같아선 저들은 냅두고 한국만이라도 미사일을 냅다 날리고 싶지만 미국 전체를 타격하기에는 한국만으론 화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간 다른 나라가 옳다구나 하고 승냥이처럼 물어뜯을 게 분명했고.
“더 할 말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로 하죠.”
중국 대표가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대표들도 연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괜찮나요?”
다른 이들 모두가 나가고 독일 대표로 참석한 레이나가 송준하를 보며 말했다. 그녀 역시 최대한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다른 나라가 움직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쉽게 설득될 거라고 생각도 안 했고요.”
“저들도 심각함을 알아야 할 텐데…….”
“저들 생각엔 고작 슬라임이라고 생각하겠죠. 재래식 무기가 안 통하는 S급 이상의 몬스터라면 모를까 슬라임이라면 다른 나라가 고생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였다. 고작 남의 나라 전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저렇게 담합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니까 그냥 세뇌하자니까?”
갑작스런 음성, 그 목소리에 돌아보니 그곳에는 송하나가 입구에 기댄 채 송준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