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뭐?”
진하가 황당한 표정으로 천둥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둥새는 아까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말 그대로다. 어차피 이리 죽나, 저리 죽나 같다면 너와 같이 죽을 거다.]
“하……!”
[둘 다 사는 방법은 네가 나와 계약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 되는 협박,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거절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진하는 천둥새의 다급함에 뭔가 있음을 깨달았다. 고작 게이트 보스가 죽음이 무서워서 저러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거지? 고작 죽음 때문에 이러진 않을 거 아냐.”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죽음만큼 두려운 건 없다.]
“아냐, 고작 그런 거로 자존심을 버릴 거라면 관리자가 만들지도 않았겠지. 사실대로 말해 봐, 뭐가 그리 두려운 거지?”
진하의 말에 잠시 침묵하는 천둥새, 그는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숨겼던 사실을 털어놨다.
[저렇게 될까 무서운 거다.]
“슬라임?”
천둥새가 가리키는 방향을 똑같이 가리키며 되묻는 진하, 천둥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저것들을 뭐라고 생각하지? 설마 그냥 일반적인 슬라임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 아니냐.]
“글쎄, 관리자가 만든 이상한 몬스터가 아닐까 하는데.”
[미안하지만 이것들은 내 창조주가 만든 게 아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맞긴 하겠군.]
“그게 무슨 소리지?”
[저것들은 한때 창조주가 만들었던 몬스터들이었다. 이제는 모두 슬라임이 되어 버렸지만.]
천둥새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위 몬스터가 하급 몬스터인 슬라임이 되었다.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급 슬라임이 고위급 몬스터를 잡는 것도 말이 안 되는 판에 고위 몬스터가 하위 슬라임으로 변환된다는 건 더욱 믿기 힘들었다.
[진실이다. 저 슬라임들에게 잡아먹힌 몬스터는 모두 슬라임이 되었지.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다른 몬스터가 없던 게 이상하지 않았나?]
“모두 슬라임이 됐다고 말하는 거야? 고작 슬라임에게 잡혀서?”
[그래, 말이 안 되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저것들에게 잡아먹혀서 저런 모습이 되기 싫은 거고.]
“그래 봤자 죽는 거 아냐?”
[다르다! 만약 그저 싸워서 패배해 죽는다면 나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양분이 돼서 저런 저급한 놈들이 되는 것은 나에게 불명예란 말이다!]
천둥새의 말에 진하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놈도 결국에는 복제품일 텐데 명예라니, 세뇌돼서 사람을 죽이는 놈들치고는 웃긴 얘기였다.
‘그래도 의문 하나는 풀렸네.’
슬라임마다 개체별 강함이 모두 달라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몬스터를 잡아먹고 몬스터가 변한 거라면 각기 다른 강함을 가진 이유가 이해는 됐다.
그리고 몬스터가 없는 이유도 아마 2층부터 16층까지의 슬라임이 모든 몬스터를 잡아먹어서겠지.
“계약 내용이 뭔데? 어차피 계약을 해도 넌 못 벗어나는 거 아냐?”
[계약을 하겠다는 건가?]
“일단 들어나 보고.”
[간단하다 나와 계약을 하면 나는 너에게 힘을 빌려줄 수 있게 된다.]
“네가 가져가는 건?”
[너의 체력, 지금 필요한 건 그거니까.]
지나치게 진하에게 유리한 조건, 천둥새는 그 기색을 알아챘는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체력만 가져가진 않는다. 이후 너와 내가 힘을 주고받는 형태로 서로의 힘을 빌리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난 너와 계약하면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게이트 밖이라…… 그렇게 나가고 싶은 건가?”
[여기 있으면 언제 그 이상한 슬라임에게 습격받을지 모르니까.]
잠시 고민하던 진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천둥새는 기뻐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럼 당장 계약 준비를 하도록 하지.]
“아, 잠깐만.”
잠시 천둥새를 멈춘 진하는 배낭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모습에 천둥새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뭐지?]
“별거 아냐. 그냥 안전장치랄까?”
[흠, 뭐 상관없겠지.]
천둥새는 진하의 말에 신경을 껐다. 무슨 안전장치인지는 몰라도 고작해야 카드, 그것도 꺼내서 이리저리 만진 게 다였다.
[그럼 계약을 이행하지.]
천둥새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깃털 하나를 꺼내 진하의 앞에 떨궜다. 진하는 자신 앞에 떨어진 깃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천둥새는 그런 진하에게 부리로 깃털을 밀었다.
[집어라. 그럼 계약이 완료된다.]
“집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래.]
천둥새의 말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깃털을 집어 드는 진하, 깃털을 집어 들자 천둥새는 진하와 정신적으로 연결된 것을 느꼈고, 이내 커다랗게 웃었다.
[하하! 역시나 멍청한 인간이야.]
“뭐?”
[하아, 설마 이런 협박과 얘기에 넘어갈 줄이야. 너무나 멍청하구나.]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낀 진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천둥새는 그 표정을 즐겁게 바라보며 말했다.
[쯧, 고작 인간의 체력을 일부 빌려 간 걸로 내 체력을 모두 회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아무리 그와 비슷하거나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종이 달랐기에 체력에 차이가 심하게 났다.
둘의 계약은 천둥새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대신 힘을 일부 빌려주는 것, 체력을 완벽히 회복시키기 위해서 진하가 바쳐야 하는 것은 목숨이었다.
[자아, 너의 목숨은 내가 잘 사용하도록 하마.]
천둥새는 그 말과 함께 연결된 계약을 통해 진하의 체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쓰러지는 진하, 천둥새는 계약을 통해 흡수되는 체력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슬라임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군.]
“흐음…… 이런 계약이었구나.”
그 순간 천둥새의 귓가에 들리는 진하의 목소리,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천둥새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진하의 멀쩡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부리가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어떻게 살아있냐고?”
진하는 놀란 모습을 하는 천둥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애초에 그가 이렇게 쉽게 계약을 맺을 리 없었다.
“자, 이제 잠에서 깨야지.”
와장창창!
그 말과 동시에 천둥새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꽉 채우던 체력은 모래가 흩어지듯 스르륵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휴, 그럼 그렇지. 어떻게 너희들은 항상 똑같냐.”
혀를 차는 진하는 손에 들린 카드를 털어냈다. 그러자 푸스스 사라지는 카드 한 장.
[사쿠라 카드: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정령들이 갇힌 카드. 사용하면 잠시 정령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 제한: 각 카드마다 사용 제한이 붙음. 사용 후 소멸.]
진하가 여지껏 써온 아티팩트 중 가장 아쉬웠던 것은 카드였었다.
효과는 좋았으나 카드 장수가 적었으며 카드마다 효과가 천차만별에 랜덤성과, 페널티까지 온갖 제한이 걸린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덕에 반쯤 잊은채로 금고에 박아 뒀다가 문방구를 물려받으면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이후 인터넷을 이용해 같은 카드나 그와 비슷한 카드를 찾았었다.
그렇게 찾은 카드가 바로 사쿠라 카드, 예전에 사용했던 카드와 달리 다양성이나 위력은 떨어질지언정 제한은 극단적으로 없애버린 카드였다.
물론 사념이 부족해서 52장 중 절반밖에 아티팩트화 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드림: 상대방이 원하는 꿈을 잠시 보여 준다. 단, 상대방이 카드의 정체를 몰라야 하고 비슷한 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진하가 천둥새에게 사용한 카드가 바로 드림 카드였다.
같은 격을 가진 존재에 한해서 원하는 꿈을 보여주는 카드. 이것 덕에 진하는 천둥새와 계약을 하지 않고도 그 속내를 편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꿈에 빠진 존재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까지 해버리니까.
“자, 그럼 널 이제 어떻게 한다.”
속내를 알아낸 것까진 좋았으나 여전히 상황은 애매했다. 천둥새를 버리고 탈출하자니 슬라임이 걸렸고, 그렇다고 현상 유지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천둥새와 슬라임, 둘 다 처리해야하는 상황에 놓여버린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여유로운 진하의 모습에 천둥새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이제는 어떻게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자존심이 건드려진 이상 천둥새의 머릿속에 남은 건 무조건 저 죽일 인간을 없애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파지직!
천둥새가 날개짓하자 결계가 얇아지면서 천둥새의 주변으로 전격이 모이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공격을 취하는 자세. 진하는 그 모습에 카드 한 장을 빠르게 꺼내들었다.
“족쇄.”
촤라라락!
순식간에 카드에서 두꺼운 쇠사슬이 튀어나오며 천둥새를 옭아매기 시작했고 진하를 공격하려던 전격 역시 빠르게 흩어졌다.
[이게, 뭐냐!]
“뭐긴 뭐야 족쇄지.”
<족쇄: 그 어떤 상대든 묶어서 공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단, 시전자도 공격할 수 없다.>
진하는 자신 또한 함께 옭아매는 쇠사슬을 보며 혀를 찼다. 이걸로 천둥새가 뻘짓을 하는 건 막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파직, 파지직!
다행히 결계는 공격이 아니라서 족쇄의 효과에서 벗어나 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결계가 약해지고 있었다.
즉, 시간이 끌리면 천둥새와 진하가 슬라임의 먹이가 된다는 소리였다.
‘아니, 솔직히 난 상관없긴 하지.’
팔 하나 정도만 잃어버릴 각오를 하면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앞으로 뭐가 있을지 모르기에 함부로 다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에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물론, 주된 원인은 천둥새를 본 시점부터 생각한 계획을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일단 빠르게 진행하자고.”
진하는 싱긋 웃으며 천둥새를 향해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 * *
“하아, 미치겠네.”
신지하는 헌터들을 대동한 채로 게이트를 내려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갑작스럽게 끊긴 신호 때문이었다.
‘도대체 뭔 일이지?’
게이트라는 특성상 깊은 층일수록 실시간으로 신호가 오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기엔 며칠째 신호가 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신호는 천둥새와 진하를 포위했다는 것.
그렇다는 건 그 이후 슬라임들이 모두 죽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짓을 할 만한 놈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런 변수는 별로 좋지 않은데 말이야.”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딱 한국에서와 비슷했다. 도대체가 진하와 엮이면 뭔가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빠르게 끝내야지.’
한국에서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됐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저벅, 저벅
그때 신지하의 눈에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 한 명이 보였다. 가까워지는 사람을 보며 신지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맞네. 너 때문었구나.”
“네가 왜 여기 있어?”
진하는 자신 앞에 있는 신지하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13층에서 일을 벌였으니 뭔가 반응이 올 거라는 걸 느끼긴 했지만 여기서 신지하가 나타나다니…….
“어떻게 한 거야,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수를 한순간에 없앤 거지?”
“슬라임을 말하는 거야? 너 슬라임에 대해 뭘 아는거냐?”
“말하지 않겠다면 힘으로 알아내마.”
신지하의 말에 앞으로 나서는 헌터들, 하나같이 S급 이상의 헌터들이었다.
‘SS급도 섞여 있는 건가?’
진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헌터들을 보며 짧게 평했다. 수많은 S급에 SS급이 두 명, 약간 피곤한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하는 놈인거야?”
세뇌라기엔 유독 신지하의 눈만 초점이 또렷했다. 심지어 유일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건 저 놈이 슬라임을 다루는 놈과 밀접한 관계라는 건데….
‘심지어 저놈 비각성자였는데 지금은 각성자의 느낌이 난단 말이야.’
“뭐, 상관없겠지. 잡아서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뭐?”
신지하는 진하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그가 핍박받는 상황인데도 저런 말을 하다니…….
“아, 너는 내 랭크 아직 모르지?”
“아니,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많은 수의 헌터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진하의 공식적인 랭크는 S, 하지만 진짜 실력은 SS랭크 최상위로 예측되고 있었다.
“땡, 아니야.”
진하는 신지하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정보가 느려서야 어떻게 일을 진행하는 건지.
“일단은 맞고 얘기하자.”
진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진하의 뒤로 펼쳐지는 커다란 포탈 하나, 이내 포탈에서 붉은 새 한 마리가 전격을 내뿜으며 튀어나왔다.
끼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