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71화 (171/202)

#171

“이상해. 진짜 뭔가 이상해.”

진하는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은 채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2층, 3층, 4층 그 어떤 곳에도 몬스터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냥 텅 빈 공간 같았다.

‘관리자가 한 건가?’

사서와의 싸움에서 다쳤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회복을 위해 원래 내보냈던 몬스터들을 다시 회수한 걸지도 몰랐다.

적어도 진하가 알기론 인과율은 거의 만능 재료 같은 역할을 하는 개념이었으니까.

“하아, 아냐, 고작 회복하려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것 때문에 몬스터를 없앴다면 이미 뉴스에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장소로 어딜갈지 뻔하게 알 텐데 미국만 없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진짜 없앴다면 헌터들이 1층만 돌아다니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가장 의심되는 건 여기도 세뇌됐다는 건데…….”

유럽 때처럼 세뇌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 유럽만 해도 올림포스 신들이 튀어나와서 힙노스가 난리친 걸 생각하면 미국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다만, 사서가 절대로 유럽 때와 같은 일이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한 게 걸렸다.

물론, 여지껏 행보를 보면 믿기는 매우 어렵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안 믿기도 뭐했다.

“뭐가 어찌 됐든 뭔가 일어나긴 했다는 건데.”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 이 상황을 유도했다는 건데 그 존재가 초월적인 존재라는 점 빼고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윤휘성 역시 그런 존재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나를 노리는 건 아닌 건가?”

윤휘성은 진하가 있기 전부터 정보 길드에서 미리 미국으로 파견된 걸 생각하면 진하를 노리고 그랬다기보단 그냥 원래부터 일을 진행 중이었는데 송하나의 길드가 같이 걸린 거라고 보면 될 듯싶었다.

“여기 16층 보스 뭐였지? 적어도 신은 아닐 텐데.”

미국에 신화가 딱히 없다는 걸 생각하면 올림포스와 같은 형태는 아닐 테고…….

진하는 복잡함에 머리를 움켜쥐어봤지만 그런다고 생각나지 않는 게 생각나는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한다.”

가장 중요한 정찰은 이미 물 건너갔고, 이대로 공략까지 이어나가려 했던 계획은 폐쇄해야 했다. 이 꼴을 보면 분명 16층 게이트 보스 역시 튀어나왔을 테니까.

꾸물. 꾸물.

“응?”

그때 진하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초록색 물체 하나가 보였다.

“슬라임?”

미국이나 유럽의 1층에서나 볼법한 몬스터였다. 아무것도 없었던 게이트에 몬스터가 나타난 건 기뻤지만 이 상황에서 갑자기 슬라임이라니…….

콱!

순간 느껴지는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피하자마자 떨어진 검을 보며 진하는 빠르게 발을 박차 뒤로 물러났다.

화륵!

“미친!”

뒤로 물러나자 그보다 더 뒤쪽에서 날아오는 화염, 재빠르게 스킬을 모조리 작동시킨 진하는 화염을 그대로 맞으며 몸을 돌렸다.

스겅―

돌리는 그대로 검을 베었지만 뭔가를 벤 느낌은 없었다. 그 사이 화염에 가려졌던 시야가 밝혀지며 보이는 남자 하나.

‘베였어?’

팔이 잘린 남자가 다른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화염.

콰르릉!

그대로 돌파해 베려던 진하는 천둥소리에 다급히 다시 한번 스텝을 밟아 몸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방금 전까지 있던 자리고 낙뢰 하나가 쿵! 하고 떨어졌다.

“이거 몇 명이나 온 거야.”

진하는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3명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경계 태세도 아니었다지만 그의 감각을 속이고 근처까지 도달했다는 건 그만큼 뛰어난 실력자란 소리였다.

“그래서 갑자기 나를 공격한 이유는 뭐지?”

“…….”

진하의 물음에도 진하를 둘러싼 3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진하는 그들의 눈이 흐리멍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쯧.”

사태를 파악한 진하는 혀를 찼다. 지금 이 상황에서 3명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진 않았다. 다만 세뇌당한 사람들을 죽이는 거라 살짝 찝찝했다.

‘뭐, 그런다고 망설이는 건 아니지만.’

휘익!

그 순간 검을 든 남자가 진하의 뒤로 나타나 검을 내질렀다.

푹! 퍼억!

“미안하지만 그냥 죽어라.”

진하는 역수로 쥔 검을 뒤로 찌른 채 요요에 머리가 터진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검을 뽑은 진하는 반대 손을 잡아당겨 요요를 회수했다.

“흠, 역시나 안 도망치네.”

한순간에 요요와 검을 이용해 두 명이 죽었음에도 남은 한 명은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하기까지 했다.

“에휴.”

어느새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던 남자의 뒤에 나타난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리그어 목을 잘랐다.

“신체 능력은 대략적으로 S 내외고 능력은 왜 안 사용한 거지?”

진하는 의아함을 담아 말했으나 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싸늘하게 죽은 상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근처에서 꾸물거리던 슬라임까지 베어 죽인 진하는 잠시 그들을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향은 5층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 * *

“저, 저기 이러시면…….”

비서가 당황하며 이기수를 불러 보았지만 이기수는 그런 비서를 무시하고 그대로 눈앞에 있는 문을 발로 찼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들어선 이기수는 눈앞에 앉아 있는 둘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둘 다 찾아가려 했는데 딱 좋게 둘 다 있네.”

이기수의 말에 송하나는 커피를 한 입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뭔 일이죠?”

“뭔 일? 지금 뭔 일이라고 했어?”

“네.”

“진하 어디 갔어. 똑바로 말해.”

이기수의 말에 송하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은 건지…….

“미국으로 정찰 갔어요.”

“정찰? 개소리 마. 정찰일 리가 없잖아.”

이기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다른 사람은 속아도 그는 절대 속지 않았다. 진하가 혼자서 정찰을 갈 리 없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정찰이라고 말하고 공략을 하러 갈 놈이 그놈이었다.

“저기 진정 좀 하시죠.”

송준하가 대충 고갯짓으로 비서를 돌려보낸 뒤 씩씩거리는 이기수를 잡아당겨 소파에 앉혔다.

이기수는 자리에 앉으며 송하나를 보며 말했다.

“너 알면서 보낸 거지.”

“뭘 말이죠?”

“적어도 너라면 나만큼 진하에 대해 잘 알 거 아냐. 그런데 네가 순순히 보낸다는 건 알면서도 보냈다는 거잖아.”

이기수의 말에 송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기수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러면 어쩔 건데요?”

“뭐?”

“당신 말대로 진하가 공략을 하려는 생각으로 미국을 간다고 치고 얘기해 봐요. 그래서 어쩔 건데요.”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그런 위험한 곳으로 진하를 혼자 보내 놓고 그게 할 말이야?”

송하나는 화를 내는 이기수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안 그래도 지금 미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짜증 나 죽겠는데 이놈까지 이러다니…….

“여기서 진하를 말릴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없죠? 적어도 하예진 빼고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차분하게 받아치는 송하나의 모습에 이기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다시 한번 쏘아붙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송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만약 진하 혼자서 안 가면? 누가 같이 가는 데요? 당신? 아니면 하준수? 둘이 도움이 되기는 해?”

점차 짧아지는 말투, 얘기할수록 더 짜증이 솟구치는 걸 느낀 송하나는 그대로 이기수에게 쏘아붙였다.

“짐만 안 되면 다행이지. 당신 지금 팔 접합 두 번째지? 들어 보니까 접합률도 현저하게 떨어졌는데 그 몸으로 뭘 어쩌려고? 솔직히 말하자. 여기서 지금 진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있기는 해?”

“…….”

“말릴 사람도 없어. 그렇다고 따라가서 도움될 만한 사람도 없어. 근데 뭐? 왜 안 말렸냐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반대로 묻자 너야말로 생각이 있어?”

“그렇다고 진하를 혼자 보내면…….”

“그럼 그냥 시간만 죽쳐서 뭘 어쩌려고, 팀은 해체 상태지 적은 강한데 우리들은 도움도 안 되지. 그럼 적어도 앞길은 막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자, 잠깐 진정 좀 하시죠. 너무 감정적이 되셨어요.”

가만히 듣던 송준하가 식은땀을 흘리며 송하나를 말렸다. 송하나는 그런 송준하를 노려보았고 그 모습에 그는 순간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하아…… 진정, 그래 진정…….”

눈을 감으며 송하나가 화를 삭혔다. 그의 말대로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해서 뭐가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후, 진정하자.’

요즘 들어 잘되지 않는 일 처리와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인 건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그녀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원래의 차분함을 되찾은 송하나가 이기수를 바라보았다.

이기수 역시 흥분을 가라앉힌 건지 아까보다는 나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후, 다시 말해 봅시다. 일단 진하는 떠났어요. 어차피 말릴 사람도 없었고요. 그건 이해하겠어요?”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해할게. 확실히 진하를 말릴만한 사람이 없는 건 맞으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찰을 목적으로 간 거예요.”

“맞습니다.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아직 공략권도 안 나왔는데 공략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송준하가 송하나의 말을 보탰다. 이기수가 왜 이리 찾아왔는지는 그도 이유를 잘 알았지만 지금 한 말은 너무 억측이었다.

이기수는 그런 송준하의 말에 한숨을 내쉬고는 송하나에게 말했다.

“너도 알잖아. 그놈이 그렇게 말하고 갔어도 실제로는 공략을 진행할 거라는 걸. 공략권? 솔직히 그건 어디까지나 팀으로 갔을 때 편하게 활동하려는 거지. 걔 혼자라면 그런 거 신경 안 쓸 걸?”

“그건…… 뭐, 인정할게요. 당신 말이 맞긴 해요.”

차마 이기수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던 송하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리고 뭐, 사실 이기수의 말이 진실이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거짓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럼 적어도 걔가 갔으면 바로 얘기해 줬어야지. 송준하 씨야 그렇다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잖아.”

“하아, 이런 말 다시 해서 미안하지만 제가 숨긴 이유는 간단해요. 진하가 숨겨 달라고 해서도 있지만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숨긴 거기도 해요.”

“더 낫다고?”

“지금 도움이 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당신은 지금 팔 병신이고요.”

“…….”

이기수는 할 말을 잃었다. 뼈 아프지만 송하나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약한 것도 사실이었고, 겨우 새로 붙인 팔 역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팔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전력이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 상태로도 100%는 아니지만 80% 정도의 실력은 낼 수 있었다.

‘다만 100%도 부족하다는 게 문제지.’

모든 실력을 발휘해도 어려운 상황에서 80%의 실력은 솔직히 송하나의 말대로 짐이나 다름없었다.

“얼굴을 보니 이해한 것 같네요. 알았으면 이제 민폐는 그만 끼치시죠.”

“……준하 씨.”

“예.”

이기수의 부름에 송준하가 빠르게 대답했다. 이기수는 크게 숨을 한번 내쉰 뒤에 그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독일로 가는 티켓 빠르게 끊어줘요.”

“네? 아, 예 알겠습니다.”

80%가 짐이라면 100%로 다시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팔을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어 20%가 부족하다면 다른 것으로 채우면 된다.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그리고 당시 거의 빈사 상태였던 이기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아스트라페를 헤라클레스가 가져갔다는 걸.

‘아스트라페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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