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63화 (163/202)

#163

“헤르메스!”

진하는 자신의 옷안에서 빠져나간 구슬을 느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구슬이 빠져나가면서 순간적으로 그의 몸을 당겼기에 무너지는 균형을 잡기에도 시간이 급급했으니까.

쾅!

타이밍이 늦었는지 제우스가 내뻗은 주먹에 어깨를 맞고 뒤로 밀려나는 진하. 하예진이 재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간단한 치료만을 한 뒤 제우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근육이 살짝 찢어진 정도인가?’

그것도 하예진이 전투 중에 짬을 내서 치료를 걸었기에 그 정도였다. 원래는 맞는 순간 뼈에 금이 갔다는 느낌이었으니까.

“괴물 새끼.”

진하가 재빠르게 달려가 레이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 제우스를 막았다.

“지쳤느냐? 좀 더 힘내거라!”

자신을 공격하는 적을 응원하는 제우스, 그 모습에 이가 갈렸지만 진하는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제우스를 죽이는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그를 가장 초조하게 하는 건 헤르메스였다. 구슬이 빠져나가면서 얼핏 봤던 광경, 헤르메스와 휘젠이 같이 있었던 게 너무나 거슬렸다.

‘젠장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보아하니 휘젠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았는데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맘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막고 싶었지만 헤르메스가 빠지면서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상태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게 너무나 짜증 났다.

“음?”

순간 제우스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그로 인해 생긴 잠깐의 소강상태, 모든 존재들이 지친 기색으로 갑자기 물러난 제우스를 쳐다봤다.

까드득!

“헤르메스…… 네가 선택한 게 이거였었나?”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제우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우스와 싸우던 일행은 뒤쪽에서 오싹한 기세를 느꼈다.

저벅저벅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 한 명, 진하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휘젠?”

“응? 이 몸의 이름이 휘젠인가?”

진하는 그 순간 눈앞에 사람이 휘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휘젠의 얼굴, 휘젠의 목소리였지만 그는 휘젠이 아니었다.

“아, 이 몸의 친구들인가 보군요. 이 몸 나쁘지 않네요. 전령의 신인 저와 비슷한 능력 때문인지 일치율이 꽤 좋은데요?”

“너…… 헤르메스냐?”

말하는 말투가 딱 헤르메스였다. 진하의 물음에 휘젠의 모습을 한 존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복제품이냐를 묻는 거면 아니고 전령의 신이냐 묻는다면 맞습니다. 정확히는 분신 정도 될까요?”

“분신?”

“네. 그 정도? 당신도 어느 정도 알지 않나요? 몸에서 뱀파이어 로드의 흔적이 느껴지는데?”

휘젠, 아니 헤르메스의 말에 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휘젠은 과거 진하의 상태와 매우 비슷하다는 소리였다.

“휘젠은 어떻게 됐지?”

“뭐, 소멸은 안 당했어요. 꽤 질기던데요? 뭐, 그래 봐야 의미 없지만.”

헤르메스가 혀를 찼다. 본체의 생각대로 휘젠의 육체는 본체의 힘을 버티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인격이 소멸되진 않았다. 무슨 집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끝끝내 소멸되지 않은 채 그의 구석진 곳에 잠들어 있었다.

다만, 그래 봤자 의미는 없는 게, 이미 그가 이 몸에 들어온 이상 휘젠의 인격이 몸을 차지할 확률은 없었다. 지금도 영혼과 인격이 구석진 곳에서 깨질 듯 말 듯 현상 유지를 하는 게 고작인 상태니까.

“헤르메스.”

그 순간 그를 부르는 목소리 하나, 헤르메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오! 아버지의 복제품이네?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는데요?”

“복제품이라 하지 말아라!”

헤르메스의 말에 화를 내는 제우스, 헤르메스는 그런 제우스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엥, 복제를 복제라 하는데 뭐, 어때요. 그리고…… 기껏해야 찌꺼기한테 존대를 써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그 말에 제우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우스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은 채 땅에 꽂힌 창을 집어 들었다.

“오, 아스트라페의 복제품? 꽤 괜찮은데요?”

“난! 가짜가 아니다!”

그 말과 함께 제우스가 헤르메스에게 달려들었다. 헤르메스는 달려드는 제우스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찌꺼기라도 아버지의 찌꺼기답네요. 분신인 저로서도 꽤 애를 먹겠는데요?”

“닥쳐라!”

제우스는 연신 창을 휘둘렀고 헤르메스는 그런 제우스의 공격을 피하면서 진하 일행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그럼 일단 귀찮은 존재들부터…… 윽!”

순간 머리를 부여잡는 헤르메스, 그와 동시에 제우스의 창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쯧, 버티는 게 겨우인 줄 알았더니…… 당신들은 좀 이따 보죠.”

혀를 찬 헤르메스가 진하 일행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변하는 주변 풍경, 진하는 아테네의 외곽으로 이동한 것을 깨닫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몸에 힘을 빼던 진하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곳에는 황당한 표정의 헤라클레스가 진하를 보며 서 있었다.

‘이놈도 같이 온 건가?’

주변을 살펴보니 헤라클레스를 포함, 모든 인원이 외각으로 이동된 것 같았다. 다행히 이 인원이면 헤라클레스 하나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긴장 풀어라. 싸울 생각 없으니까.”

검을 치켜든 진하를 보며 헤라클레스가 손을 내젓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하는 그런 그의 모습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미쳐버린 아버지, 아니, 제우스와 갑자기 인간의 몸에 들어간 헤르메스까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허탈하게 말하는 그의 눈은 저 멀리서 번쩍이는 아테네의 중심부를 향해 있었다. 뭔가 쓸쓸함과 허탈감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나도 모르겠다. 쉬자.”

그 말과 함께 진하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이놈도 머리가 있으면 덤비진 않을 것이다. 여기서 레이나 한 명이랑만 붙어도 질 수준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겐 덤비지 않겠지.

“레이나도 좀 앉아요. 다른 사람들도 좀 쉬고.”

진하의 말에 하나둘 씩 자리에 앉았다. 다만 하예진은 돌아다니며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레이나는 앉지 않은 채 헤라클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하는 순간 뭐라 말할까 하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아테네를 쳐다봤다.

번쩍이는 시내와 커다란 굉음들.

“이게 뭐냐…….”

커다란 허탈감이 진하를 감쌓다. 그렇게 노력하고 움직였는데 그 결과가 이거였다. 들러리마냥 인류가 멸망할지도 상태인데도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입장.

더 슬픈 건 저 싸움에 진하의 친구인 휘젠이 있다는 것과 그가 저렇게 될 동안 진하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개 같네.”

“그러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헤라클레스가 진하와 같은 얼굴로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뭔 일인거지…….”

“뭔 일이긴, 복제품과 진품의 분신 사이에서 새우등 터진거지.”

“진품이라 함은…… 저번에 얘기했던 그 말인가?”

헤라클레스의 질문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헤라클레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도대체 뭘 위해 싸운 거지.”

어머니를 범한 제우스를 따른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먼 시간이 지나 제우스를 따랐던 건 올림포스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에게 남은 건 없었다. 올림포스는 이제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남지 않았고, 죽일 듯이 싫어했던 제우스는 그가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거기다가 그 모든 게 거짓에 복제품일 뿐이라는 거였다. 진하의 말에 수긍은 했지만 반쯤은 믿지 않았던 사실이 이제는 진짜로 진실이라고 알려져 버렸다.

“난 뭘 해야 하는 거냐…….”

지켜야 할 것도, 복수할 힘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멍하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글쎄…….”

진하가 그런 헤라클레스의 말을 받았다. 그 역시도 뭘 해야 할지 더 이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뭘 더 할 수 있겠다, 라는 자신감이 들지 않았다.

실패, 실패, 실패. 변수가 계속 생기고 계획은 계획 대로 안 되고 기껏 나아졌다 싶으면 더 악화되는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일행들도 진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건지 부정적인 기운이 진하게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심지어는 몬스터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됐던 하준수까지 굳은 얼굴로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쭈욱

“엘리사?”

진하는 갑자기 자신의 옷을 당긴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굳은 표정으로 진하를 보며 말했다.

“휘젠이…… 전달한 말이 있어.”

“휘젠이?”

“응…….”

엘리사는 그 말과 함께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자기가 구슬을 사용하고 위험해지면, 그리고 스스로 팔찌를 끊지 못하면 나보고 팔찌를 끊어 달라고 했어.”

“휘젠이 구슬을 사용했던 거였어?”

진하의 물음에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 상황에서 몸을 빼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보았다. 구슬을 깨뜨렸던 휘젠과 그런 그에게 다가선 헤르메스를.

“구슬?”

하준수가 둘의 대화에 의문을 표했다. 그를 포함해 다른 인원들 역시 갑작스런 둘의 대화에 같은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오직 레이나와 이기수만이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슬이라는 그게 뭐지?”

하준수가 진하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옆에 있던 다른 팀원들 역시 진하에게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고 진하는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간 있었던 일을 팀원들에게 말해 주었다.

퍽!

설명이 끝나자마자 하준수가 진하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진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을 회수하지 않았다고?”

“그만해. 진하 씨라고 회수를 안 하고 싶었겠어.”

재희가 더 달려들려는 하준수를 막아섰다. 하지만 말리는 그녀 역시 진하를 보는 표정이 곱지는 않았다.

“그럼 뭐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진하가 피 섞인 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진하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너였으면 그럴 수 있어? 위험한 걸 알면서도 달라는데, 그러지 않으면 자긴 쓸모가 없다는데 뺏을 수 있냐고.”

“그래도 뺏었어야지!”

“내가? 어떻게? 난 죽어도 못해. 그리고 휘젠이 어떤 맘으로 S급이 됐는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아?”

진하의 말에 하준수는 순간 말을 잃었다. 확실히 휘젠이 S급이 되면서 겪은 고통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나가라고 말한 것도 그였고, 그가 어떤 식으로 지내 왔는지 확인한 것도 그였으니까.

“그래서 준 거야. 말릴 수 없으니까. 아무리 검사하고 확인해도 찝찝한 물건인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근데 내가 어떻게 그걸 뺏어.”

그건 팀에서 나가라는 말과 같았고 휘젠에게 또 한 번 같은 상처를 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진하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회귀 후부터 지금까지 진하는 자신이 먼저 나서 사건을 해결한 적은 있어도 친구들의 각오를 한 번도 무시한 적은 없었다. 그게 그가 행동하는 기준이었으니까.

“젠장!”

하준수가 애꿎은 땅만 발로 차며 자리로 돌아갔다. 진하는 아직도 곱지 않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엘리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리사, 네가 한 말 진짜야?”

“응. 진짜야. 휘젠이 그렇게 말했고 실험도 해 봤는데 됐어.”

엘리사의 말에 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휘젠은 만약 그가 팔찌를 끊지 못했을 때 엘리사가 팔찌를 끊어 주길 원했다.

실제로 엘리사의 복제 능력은 그 사람의 기질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기는 했다. 거기에 실험했을 때 엘리사가 휘젠의 능력을 복사한 상태에선 팔찌를 끊었었다면...

‘휘젠, 이 개자식.’

진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딴 계획을 짠 휘젠을 욕했다. 그리고 그걸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너무나 짜증 났다.

“하아…… 알겠어. 휘젠이 그렇게 원했으면 해야지.”

이미 분신에게 몸이 뺏긴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건 진하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러기엔 상대의 격이 너무 높기도 했고, 되돌려 줄 만한 인성을 가진 착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도 부서지겠지.’

진하의 몸 역시 뱀파이어 로드에게 빌려 주었을 때 완전한 소멸을 맞을 뻔했었다. 아마도 휘젠 역시 그럴 가능성이 컸다.

“소멸보단 죽음이 나으니까…….”

마지막이라면 휘젠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진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져.”

그의 말에 하나, 둘 몸을 일으키는 인원들.

“네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휘젠을 저렇게 둘 생각은 없다.”

“저는 제 조국이 피해를 입길 바라지 않아서요.”

“나도 뭐 공범이니 빠질 수 있나.”

이윽고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하는 그런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자, 그럼 가….”

“나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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