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너는 왜 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거지?”
이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진하가 잃는 것은 은근히 많았다. 아니, 정확히 얻는 게 적었다.
물론 그가 참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겠지만 헤르메스와 입을 맞췄다면 그 이상의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너는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으면 오히려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았어야 했어.”
보통 자신이 복제품이라고 알게 된 존재들은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제외하곤 결국 하는 행동은 제우스나 하데스 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었다.
만약 그라면 이런 식으론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르메스 쪽으로 붙게 해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제우스를 제거하거나 제우스에 붙게 해 서로 최대한 피해를 많이 입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자신이 얻을 이득은 적어지고 리스크는 커지게 만들어 버렸다.
“이건 뭐 알려 줘도 뭐라 하네.”
“네 입장에서는 나 역시 신, 결국 인간의 적이란 건 같아. 그렇다고 네가 머리가 모자라다고 생각되진 않고,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너를 믿어서.”
“나를?”
“한때는 인간이었고, 인간을 낮춰보지 않으니까. 적어도 나에게 예의를 차리는 적에게 그에 맞게 예의를 차린 것뿐이야.”
“고작 그 이유라고?”
“아, 못 믿겠으면 믿지 말든가.”
진하는 설득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헤라클레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에 헤라클레스의 의구심은 더욱 짙어져만 갔고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너에 대한 결론은 보류하도록 하지.”
“뭐 그건 알아서 하고 내가 찾아온 이유는 이게 다야.”
그 말과 함께 헤라클레스에게 내미는 명함 하나, 진하의 행동에 헤라클레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물어볼 게 있거나 할 얘기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그러도록 하지.”
명함을 받아든 헤라클레스는 잠시 명함을 바라봤다. 그가 인간에게 받은 첫 명함이었다.
“아, 맞다. 혹시 이거 뭔지 알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진하는 품속에 있던 구슬 하나를 헤라클레스에게 보여 주었다. 헤라클레스는 잠시 구슬을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신력이 모여 있다는 것 외에는 크게 특별한 게 없는 것 같군.”
“그래? 이게 우리에게 딱히 피해를 주진 않겠지?”
“딱히 문제는 없을 거다. 그저 힘을 뭉쳐 놓은 구슬이니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론 그래. 너도 알고 있으니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런 걸 적에게 묻다니…….”
“인간을 인도하는 게 신의 역할이라며 그러니 물어보는 거지.”
“특이해…… 그나저나 그런 건 어디서 나는 거지? 비슷한 걸 저번 습격 때 다른 인간한테서 똑같이 봤었는데.”
“지난 습격? 혹시 휘젠을 말하는 거야?”
헤라클래스와 싸웠던 사람 중 신과 따로 접촉한 사람은 휘젠뿐이니까 아마 맞을 것이다.
“그 인간의 이름은 모른다. 그저 가지고 있었다고만 알고 있지. 그래서 그건 어디서 난거지?”
“헤르메스가 줬어.”
사실 이 안에 담긴 건 아레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의 신력이었지만 굳이 그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신의 신력이 모여 있군. 우리들 몰래 신력을 갈취하거나 빼돌린 건가?”
알아서 생각에 잠기는 헤라클레스를 보며 진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이 알아서 망상해 준다는데 굳이 정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난 간다?”
가볍게 손을 흔든 진하는 남아있는 커피를 마신 후 카페를 나섰다. 아직 저녁이 다 돼 가서 그런지 햇빛이 저물고 있는 게 보였다.
“으자자잣!”
기지개를 피는 진하, 그는 잠시 헤라클레스가 있는 곳을 보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놈.’
적은 적일 뿐이었다. 그게 신이든 인간이든 그건 진하에게 상관없었다. 그런데 한때 인간이었기에 믿는다는 말에 흔들리다니…….
하기야 본인이 말하는 인간을 인도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하는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잘 알았다. 아무리 인간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 존재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쉽게 태도가 바뀌진 않는다. 특히, 주변 사람들을 죽인 존재라면.
‘덕분에 일이 쉬웠지.’
진하가 그에게 사실을 말해 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애초에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그저 진실을 말해 준 것이다.
헤르메스조차도 이미 신뢰 관계에 금이 간 상황인데 진하를 믿을 리 없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르는 것 자체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진실을 얘기해서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조금이라도 신뢰를 얻어 두는 게 더 이득이었다.
‘거기다가 사실인 게 밝혀지면 다른 존재와의 사이는 더욱 멀어질 거고.’
겉으로 보기엔 작은 이득을 취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진하는 불확실한 큰 이득보다 확실한 작은 이득을 취한 효율적인 행동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 적당히 적대와 함께 친근함을 보이기도 했고.
‘내가 이방인이라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행동이 먹힐 리 없었다. 어디까지나 진하의 옆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고 적당히 같은 소속인 사람들만 죽었기에 통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아까부터 왜 졸졸 따라오는 건데?”
“그거야 만날지 몰랐던 사람을 만났으니까요?”
중간부터 진하를 졸졸 따라오던 헤르메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설마 이곳에서 진하를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헤라클레스를 만나셨군요.”
“만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잖아? 왜 당황스러워?”
“뭐 조금 당황스럽죠. 설마 인간이 신과 대화를 나눌 줄은 몰랐거든요.”
“너도 신이잖아. 아무튼, 헤라클레스는 제우스 옆에 붙을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그럼 당연히 너도 이번 작전에서 나서겠지?”
진하의 말에 헤르메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대화는 제가 나눈 게 아니라서요.”
“뭐, 그럼 대화를 나눠 보고 나한테 알려줘. 너는 분명 헤라클레스의 설득, 즉 습격할지도 몰라서 참가하지 못하는 거라고 얘기했으니까.”
“네, 대화를 나눠 보고 말씀드리죠.”
그 말과 함께 헤르메스는 곧바로 헤라클레스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진하는 점차 멀어지는 헤르메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유있는 척하기는.’
진하가 이미 선수를 쳤기에 헤르메스는 함부로 거짓말을 입에 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럼 당연히 설득도 쉽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진하는 진실이었기에 아무리 잘 만든 거짓이라고 해도 진실을 덮기엔 애매했다.
그렇게 되면 헤르메스가 인간을 이용하여 세력을 갉아먹으려 했던 에뢰섬 습격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 테고.
“어우, 속 시원해.”
계속 끌려다니고 이리저리 치여서 계속 스트레스받았었는데 이번 일로 나름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을 마친 진하는 다시 협회로 몸을 돌렸다. 이제 급한 일은 끝났으니 다음 일을 해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 * *
“무슨 일이야?”
훈련을 하고 있던 휘젠은 굳은 표정으로 훈련실로 들어오는 진하를 보며 의아해했다. 지금까지 저렇게 굳은 표정인 진하는 별로 본 적이 었었으니까.
“설마 훈련해서 그런 거야?”
이번 전투에서 많은 팀원들이 다쳤고, 진하는 그들에게 치료에만 전념해서 최대한 컨디션을 끌어올리라고 얘기했었다.
거기서 휘젠은 다친 곳이 전혀 없다시피 했기에 그냥 훈련을 진행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에 저렇게 표정이 굳은 걸 수도 있었다.
‘근데 겨우 그걸로 저렇게 표정이 굳어?’
단순히 그것 때문이라기엔 표정이 너무나 굳어있었다.
진하는 자신을 쳐다보는 휘젠에게 다가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너 헤르메스에게 뭐 받았어.”
“뭘 받다니?”
“알고 왔으니까 시치미 뗄 생각 말아.”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는 진하, 그 모습에 휘젠은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신이라는 작자가 아무래도 말한 듯싶었다.
“별거 아냐.”
“당장 내놔.”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뭐 문제될 거 있어?”
“그러니까 내놔. 사용하지 않을 거라면서 왜 가지고 있어?”
진하는 단호하게 휘젠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진하에게 휘젠이 말했다.
“이게 위험한 거야?”
“나도 몰라. 그러니 달라는 거고.”
“그러면 너는 나를 못 믿어?”
“지금 그런 소리 하자는 게 아니잖아.”
진하의 말에 휘젠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안쪽 주머니에 있던 구슬을 꺼냈다.
“진하야. 네가 찾는 게 이거지?”
“어.”
“나를 믿고 맡겨 줄 순 없냐?”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너는 내가 전투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 거야.”
휘젠은 고개를 저었다. 진하는 도움이 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아랫놈들을 상대하는 거라면 도움이 되겠지. 그렇지만 그 위는? 네가 진짜로 마주치는 적들이랑 싸울 땐 도움이 돼?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능력 이양뿐이야.”
말 그대로 그냥 능력치 증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도움이라면 도움이었다. 하지만 휘젠은 그 이상을 하고 싶었다.
“약해진 나를 적들이 공격하면 누가 나를 지키지? 네가? 그러면 내 맘이 편할 것 같아?”
진하의 성격은 동료를 버리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지.
그러니 약해진 그가 위험에 처하면 진하는 반드시 그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 약점이 될 테고.
“나는 말이야 싸우고 싶어. 너한테 짐이 되고 싶은 게 아냐.”
“짐이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내가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만약을 대비할 방법은 마련해 주면 안 될까?”
그 말과 함께 휘젠이 자신의 아티팩트와 구슬을 내밀었다.
“가져가도 좋아. 만약 이게 위험한 거라면 나도 너희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진 않아. 대신 아티팩트도 가져가.”
“휘젠…….”
“나는 차라리 팀에서 빠져서 유럽 협회 쪽에서 싸울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만약 이게 위험한 게 아니라면 그냥 나를 믿어 주면 안 돼?”
마력이라는 것과는 다른 개념인 신력, 그게 무엇인지는 휘젠도 잘 모른다. 다만 완전히 다른 힘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는 저번 헤라클레스의 습격 이후 이 구슬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해 왔었다. 무력하게 힘이나 빌려주거나 아니면 약한 상태로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강해져서 팀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만, 이 구슬을 바로 쓰지 않은 건 위험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로 유럽 협회에 조사를 의뢰하기도 했었고.
“가져가.”
휘젠이 손바닥을 위로하여 진하가 가져가기 쉽게 물건을 보여 주었다. 진하는 휘젠과 물건을 번갈아 봤다. 단호한 휘젠의 얼굴과 그렇지 못한 떨리는 손.
‘다들 왜 이러는 거지…….’
진하가 하고 싶은 건 그저 친구들을 살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고.
물론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한 거고 솔직한 마음으론 그냥 친구들 모두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길 바랬다.
하지만 이기수와 휘젠 아니, 모든 사람들이 자꾸 그 이상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몸과 목숨을 걸어 가면서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고맙지만 받기 싫은 그들의 마음에 진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휘젠을 보며 말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