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47화 (147/202)

#147

“안녕하세요?”

복도 끝에서 나온 남자는 진하를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하는 그런 그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뭐가 ‘안녕하세요’야.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뭐야?”

“이러길 원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자리를 마련해 주시니 약간은 당황스럽네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데 당연히 만들어야지. 오히려 내가 더 놀랐어. 설마 레이나의 감지를 피하다니.”

진하보다 강한 게 레이나였다. 당연히 그녀의 근처로 다가오면 걸릴 텐데 눈앞에 남자는 레이나의 감지를 피해 정확하게 진하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를 불러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없었다.

“넌 이름이 뭐지?”

“아, 이름을 말씀 안 드렸군요. 저는 헤르메스라고 합니다.”

“헤르메스라…….”

전령이자 도둑의 신이었다. 그제야 진하는 조금 이해가 됐다. 확실히 그런 특성을 가진 신이라면 레이나의 감지망을 피할 가능성이 있긴 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동료를 찾기 위해서인가?”

진하가 스킬을 시전하며 물었다. 그리고 진하의 말에 헤르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그런 놈들 있으나 마나입니다. 아니, 오히려 없는 게 낫죠.”

“그래도 동료잖아? 평가가 꽤 박하네?”

“저승의 법도를 어긴 놈 따위 동료라 칭할 생각 없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부른 이유가 궁금하시다 했죠?”

“그렇지?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얘기를 했다간 넌 오늘 여기서 죽을 거고.”

진하의 말에 헤르메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 공간이든 항상 빠져나갈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진하의 말 또한 거짓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안 믿겨? 그럼 시험해 보겠어?”

진하의 말에 헤르메스가 손사래를 쳤다. 확실히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맘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의 호기심을 채울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고 싶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제가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제 보스를 만나 주셨으면 해서요.”

“제우스?”

“아뇨, 아버지 역시 제 윗사람인 건 맞지만 제 보스는 아니죠. 제가 말하는 것은 하데스 님입니다.”

그의 말에 진하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윗줄에 놓인 것은 제우스였다. 그런데 하데스가 헤르메스의 보스라니…….

‘그러고 보니 최종 목표에 하데스는 존재하지 않았지.’

힙노스의 기억을 통해 알아냈던 사실을 떠올린 진하는 뭔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데스라는 말이 나온 이상 일단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온 신들이 관리자에 의해 대부분 복사가 된 것은 맞는 듯했다. 즉, 예측했던 생각 중의 하나가 틀렸다는 소리였다.

“역시 역사가 제대로 적혔네.”

콩가루 집안 중의 콩가루 집안이 그리스 신화라더니 확실히 틀리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실이긴 하지만 좀 부끄럽네요. 그래서 만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글세…… 내가 뭘 믿고?”

헤르메스는 전령과 도둑의 신이기도 했지만 거짓의 신이기도 했다. 지금 그가 진하에게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법은 없었다.

“흐음, 제가 거짓의 신이라서 그렇나요?”

“응, 내가 함정일지도 모르는 곳에 굳이 갈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 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제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화아악!

그 순간 진하를 향해 진한 농도의 살기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살기를 받은 진하는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강해.’

힙노스는 물론이고 저번에 만났던 아레스보다도 강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이렇게 살기를 흘리고 있음에도 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가 지금 이 살기를 완벽하게 컨트롤 해 진하에게만 핀 포인트로 보내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전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살기를 풀며 싱글벙글 웃는 헤르메스, 진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보다 강해.’

3단계까지 스킬을 사용한다 해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레이나보다도 강하다는 뜻.

게이트 보스를 잡는 게 험난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상정 외였다. 헤르메스 정도로 이렇게 강하면 제우스는 얼마나 강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는데 혹시 같이 가 주시겠어요?”

“부탁이 아니라 완전 협박이네.”

“무슨 말씀을 정중한 부탁이랍니다. 그리고 절 못 믿으시는 것 같으니 특별 서비스를 하나 하죠.”

헤르메스는 그 말과 함께 무언가를 던졌다. 진하는 그가 던진 물건을 받아 들고는 표정을 굳혔다.

손에 들린 건 지팡이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다만 그게 아티팩트라는 점이 문제였다.

<카두케우스: 신화 속에 나오는 헤르메스의 지팡이, 우호를 상징한다.>

<사용 시 1시간 동안 비전투 상황 강제, 집단 최면 가능, 영혼 초혼 가능.>

<사용 제한: 헤르메스. 헤르메스가 인정한 자.>

띠링!

<헤르메스가 김진하를 인정하였습니다.>

진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아티팩트를 아무 생각도 없이 넘기다니 도대체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참고로 제 인정은 회수가 불가능합니다. 어때요. 함정이라도 충분히 벗어날 수 있겠죠?”

“넌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일개 몬스터라고 보기에 너무 어려웠다. 단순한 몬스터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었다. S급 이상의 몬스터는 그걸 억제 할 수 있다고 알고 있긴 했지만 신들이 인간들을 깔보는 걸 생각하면 그럴 이유는 더 없었고.

“저를 뭐냐고 물으시냐면 글쎄요. 그냥 전령의 신이라고 해두죠. 그래서 안 가실 건가요?”

헤르메스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안 가는 게 안전하긴 했다. 하지만 이미 헤르메스의 힘을 확인해 버리고 말았다.

승산을 높이려면 결국 하데스를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앞장서.”

* * *

헤르메스가 안내한 공간은 카지노였다. 그것도 사람들이 매우 많고 저급한 카지노, 진하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헤르메스가 의아했다.

“신들은 인간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뭐, 대부분 그렇죠.”

“그런데 인간이 제일 많은, 그것도 저급한 공간에 숨긴다라…….”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이런 말이 있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죠.”

“신과 인간은 같은 존재가 아닐 텐데?”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이렇게 인간이 많아야 다른 신들도 잘 안 오거든요. 특히 자신들이 굉장히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신들은 더욱 안 오죠. 쎄오스 신도들도 설마 그들이 믿는 신이 이렇게 저급한 곳에 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거고요.”

헤르메스의 말에 진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신들 중에 한 명이 헤르메스였기에 더욱 웃겼다.

‘도대체 뭐지.’

하데스가 제우스와 척을 지는 사이라는 건 대략적으로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런 공간이라니…….

제우스가 그만큼 위험하고 무섭다던가 아니면 하데스가 인간 친화적인 놈이라는 소리였다.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자, 다 왔습니다.”

헤르메스가 방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카지노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진하는 허름한 문 사이로 들리는 교성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라고?”

“정확히는 이 방 너머죠.”

헤르메스는 그 말과 함께 문을 열었다. 진하는 순간적으로 보일 광경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다행히 드러난 광경은 진하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름 깨끗했다.

‘이걸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양쪽으로 늘어선 커튼과 그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 더러운 장면을 눈으로 보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깨끗하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이건 마약인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냄새를 분석해 보니 확실히 마약이었다. 회귀 전 블랙 길드를 소탕하면서 발견했던 마약들을 태우는 냄새와 매우 비슷했다.

“자, 들어오시죠.”

헤르메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진하는 앞선 그를 따라가면서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지?’

진하가 여지껏 알고 있던 존재들과는 너무나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이래서는 관리자가 정해 놓은 틀을 완전히 부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자, 진짜 도착!”

헤르메스가 방문 하나를 열며 말했다. 안쪽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방, 진하는 잠시 헤르메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진하가 들어가고 헤르메스는 문을 닫은 뒤 방 한쪽 구석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수정구를 깨끗이 닦은 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뒤, 수정구에서 빛이 나더니 방안이 거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나는 수정구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너인가?]

“네가 하데스인가 보네.”

수정구 너머로 보이는 남자는 흑발과 흑안의 남자였다. 아니, 검은색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검은색이긴 했지만 검은색보다 더 어둡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래, 내가 하데스지.]

“나를 초대한 이유는 뭐지?”

[간단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자리에 앉겠나?]

옆에 있던 헤르메스가 의자 하나를 진하 쪽으로 내밀었다. 진하는 잠시 헤르메스를 보더니 이내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라…… 이야기 좋지. 그전에 내가 먼저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봐도 되겠지? 초대를 했으면 그 정도 배려는 해 줄거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시간 관계상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눌 수 없으니 모든 질문을 받아줄 순 없지만 최대한 대답해 주지.]

“우선 너희의 목적, 제우스와는 다르겠지?”

제우스의 목적은 인간의 지배였다. 하데스의 모습으로 보아하니 제우스의 적인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을 위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흠, 내 목적이라……. 글쎄 굳이 말하자면 평화랄까?]

“평화?”

[나는 굳이 인간을 지배하고 싶지 않거든. 그리고 이대로 평안한 삶을 유지하고 싶기도 하고.]

“몬스터가 평화라니 어이가 없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마도 몬스터의 본능에 있는 인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겠지?]

하데스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들은 관리자가 인위적으로 넣은 본능을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군. 그 부분은 이미 없애 버린 지 오래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그럴 리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관리자가 만들어 낸 몬스터였다. 인식할지언정 벗어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가능하지 않았지. 나도 최근까지는 인간이 밉고 짜증 났거든.]

“그렇다는 건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거겠지?”

[그래, 관리자가 실수했지. 아마도 너를 막기 위해 무리한 것 같은데 너무 급하게 행동하느라 실수를 했거든.]

하데스의 입에서 나온 관리자라는 말, 그 말에 진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자를 안다라… 등급이 높은 몬스터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다른 능력이 있어서 그런 건가?”

[후자라고 대답해 주지. 아니, 정확히는 네 옆에 있는 헤르메스의 능력이라고 말해 주지.]

진하가 옆에 서 있는 헤르메스를 쳐다보았다. 헤르메스는 진하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너네들 원본의 기억을 이어받은 건가?”

“네.”

헤르메스가 긍정했다. 그리고 수정구 너머의 하데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너를 부른 거다. 자격을 지닌 존재가 필요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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