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울컥!
그 순간 엘리사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 그 모습에 놀란 진하가 재빨리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괜찮아.”
무덤덤하게 말하는 엘리사, 그 모습에 진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기억…… 다 못 읽었어.”
시무룩한 모습으로 말하는 엘리사를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못 읽어도 괜찮아. 이렇게 노력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걸?”
“그래도 도움이 못 됐어.”
“아니, 충분히 도움이 됐어. 엘리사가 있어서 작전의 폭도 넓어지고 이렇게 기억도 읽을 수 있는 거야.”
진하는 우울해하는 엘리사를 달랬다. 그와 동시에 한국으로 떠나기 전 하준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엘리사, 아무래도 나아질 순 없을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삶에 문제는 없겠지만 저 상태에서는 못 벗어날 거야.
엘리사는 단순히 어린 나이에 게이트에서 동료들이 죽은 것에 충격을 받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많은 이유 중 하나였지만 가장 큰 원인은 돈에 눈이 먼 부모로 인한 것.
남매였던 그녀는 부모에게 기계처럼 몬스터만을 죽이라고 배워 왔고, 그 상태로 정신이 굳어진 케이스였다.
―그럼 날 왜 이렇게 따르는지는 알아?
―죽은 동료 중 한 명이 너랑 닮아서 그런 것 같아.
―그럼 던전 공략을 중단시키고 어서 빨리…….
―불가능해. 말했잖아. 정신이 굳어졌다고. 부모와는 이미 떼어 놓았지만 변하지는 않을 거야.
그녀의 삶은 오로지 부모가 명령한 대로만 살아왔었다. 그래서 부모가 좋아할 수 있게 능력을 좀 더 잘 베끼려 하거나 기억을 읽는 쪽으로 발달해 왔다.
즉, 이미 S급에 오를 정도로 정신이 굳어져 버린 그녀를 되돌릴 방법은 현재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그래도 돼?
짧은 말이었지만 무엇을 말하는 건지 진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진하는 그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비겁한 생각이고 이기적이지만 그에게는 엘리사가 필요했으니까. 그랬기에 그는 그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해?”
“응?”
“읽은 기억, 말해?”
엘리사의 말에 잠시 다른 생각을 했던 진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는 데까지만 말해 줘.”
진하의 허락이 떨지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거의 반 죽어있는 둘을 가리켰다.
“사회를 이루는 존재들 중에 상위권 존재지만 바닥이야.”
“사회? 혹시 그리스 로마 신화?”
“응, 그런 존재들이 사는 곳, 거기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긴 하지만 이곳으로 강림할 수 있는 존재들 중에는 최하위에 속해.”
그녀의 말에 진하는 빠르게 그녀의 말을 번역했다. 힙노스, 로마 그리스 신화에 존재하는 신들 중 네임드에 속하니 아마 높은 자리란 그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림은 아마도 게이트를 나오는 것을 뜻하고 그중에 가장 바닥이라는 건 나올 수 있는 존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목적은 인간들을 지배하는 것, 그리고 이들의 몸을 유지하는 건 신앙심과 인간.”
“인간은 대충 뭔지 알 것 같은데 신앙심은 뭐야?”
“그들이 쓰는 신력이라는 힘의 원천, 원래 그냥 가지고는 있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더 믿을수록 더 강해져.”
“신력이라…….”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지만 아마도 마력의 일종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사람들의 신앙심에 의해 강화된다는 점이 다른 거겠지.
“혹시 지금 몇 명이나 밖으로 나왔는지 알아?”
“얘들까지 합쳐서 총 8명, 누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어…….”
“총 나올 수 있는 숫자는?”
“그것도 몰라. 모든 기억을 다 읽지 못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아는 게 적어.”
엘리사의 말에 진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나올 수 있는 이 중에 바닥인 존재라면 모든 계획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8명이라…….’
그중 4명의 정체는 알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4명의 존재는 몰랐다.
지금까지 이들의 행보를 보아 분명 모르는 4명 또한 분명 어디선가 뭘 하고 있을 텐데 조용하다는 점이 거슬렸다.
“혹시 그 외에 다른 정보가 있어?”
“이거 외에는 최종적으로 소환하려고 하는 존재만 알아.”
“그게 누군데?”
“제우스, 포세이돈.”
“제우스, 포세이돈?”
진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3주신들이 최종적인 소환의 주체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오로지 2주신만 소환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하데스는 안 뽑는 거지?’
관리자가 원본을 베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제우스를 베끼는 게 더욱 어려울 테니까.
“미안해…… 더는 모르겠어.”
진하는 우울해하는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가장 중요한 목표와 현재 인원 등을 알았으니 괜찮았다. 그리고 거의 졸개나 다름없는 게 힙노스라고 했으니 어쩌면 이 이상은 애초에 모르는 걸 수도 있었다.
“후, 남길 말은?”
“큭, 남길 말?”
진하의 물음에 되묻는 힙노스 진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기억을 읽는 건 한 개체당 한 번밖에 하지 못한다. 즉, 고문조차 통하지 않는 힙노스는 이제 거의 이용 가치가 다된 존재였다.
“너희들은 아버지에게……!”
퍽!
진하가 무심하게 힙노스를 기절시켰다. 그리고는 네메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남길 말이 없냐 했지, 언제 저주를 하라 했냐. 너는 할 말 없어?”
“너희들을 찢어 죽일……!”
퍽!
주먹으로 네메시스를 재운 진하가 혀를 찼다. 이놈은 어찌 된 게 아까부터 복수만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놈은 그냥 죽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쓸모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처음 힙노스가 소개했을 때 느꼈는데 네메시스는 자세한 계획도 모르는, 그냥 바닥 패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 진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내렸다.
확실히 네메시스는 그저 장기말인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하 개인의 생각, 정확한 것은 까 보기 전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다 끝났어?”
엘리사를 통해 기억을 읽는 동안 저택을 한번 훑은 뒤 올라온 이기수가 진하를 보며 물었다.
“대충은, 그러고 보니까 그쪽에선 진짜로 아예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
“없어. 건진 거라곤 사이비교 다른 지점 몇 곳 정도? 그것도 규모가 작은 곳뿐이야.”
“그래? 근데 어째서 이곳으로 온 거야?”
볼일이 끝나고 나서야 생각난 건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굳이 이곳으로 올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다 같이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기수는 분명 진하가 부르기도 전에 저택으로 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 하려는 말이 있었다는 거였다.
“아, 여기랑 연관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유럽 프랑스 지부가 습격당했어.”
“네?! 지금 어떤 상황이죠? 아니, 피해 정도는요?”
옆에서 가만히 있던 레이나가 놀라 이기수에게 물었다. 이기수는 그런 레이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확한 규모는 몰라요. 다만 인명 피해는 거의 없는 모양이에요. 습격의 목적이 마정석이었던 것 같거든요.”
“마정석이요?”
“네, 무전으로 들었던 보고론 그래요.”
이기수의 말에 레이나는 순간 아차하며 엘리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엘리사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모든 뒷정리가 끝난 후 온 거 아니죠?”
“응.”
“하하…….”
레이나가 꺼두었던 무전기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들리는 목소리 하나.
[레이나 님! 도대체 어디십니까?]
“하아, 뒷정리는 모두 잘 끝났나요?”
[네, 잘 끝났습니다. 그나저나 정리 중에 갑자기 이기수 헌터와 함께 사라지셔서 놀랐습니다. 다녀올 곳이 있다고만 말한 후 한참 동안 연락이 없으셨으니까요.]
“죄송해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자세한 건 협회에 가서 이야기하죠. 그나저나 프랑스 지부에서 뺏긴 마정석 양은 얼마나 되죠?”
[S급으로 10개, 그리고 A급은 약 500개가량이 털렸습니다.]
“알겠어요. 이따 다시 연락드리죠.”
연락을 끊은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기수를 살짝 노려보았다.
“연기를 하는 거면 제대로 했어야죠. 부하들이 놀라잖아요.”
연기를 하는 건 엘리사였지만 그걸 보조하는 건 이기수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평소에 하지 않을 행동을 하다니…….
“하하, 죄송합니다. 초기의 목표는 이미 이룬 후라고 생각해서요.”
초기의 목적은 혹시 모를 첩자를 피하는 거였다. 그래서 두 곳으로 나눠서 습격한다는 내용을 숨기고 엘리사가 레이나인 척 연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건 성공적으로 목표를 이뤘기에 이기수는 더 이상 딱히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그만 엘리사를 데려오고 말았다.
“하아, 어째 둘 다…….”
목표를 이루면 됐다는 마인드가 진하나 이기수나 완전히 똑같았다. 이래서는 그들과 계획을 나누고 철저하게 긴장했던 그녀가 오히려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어때요. 애초에 계획을 나눌 만한 존재들도 아니었잖아요.”
진하의 말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경우의 수를 여러 개 준비했는데 인간을 우습게 보고 약해도 너무 약한 신들 덕에 준비한 시나리오가 모두 수포가 되긴 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우리가 건진 건 크게 없네요.”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힌트가 있길 바랬는데 이래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아뇨, 아예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찾아갈 방법이 없다면 끌어들이면 되죠.”
“끌어들여요? 어떻게요?”
“이렇게요.”
진하는 가볍게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돋보기 하나를 꺼냈다.
“돋보기?”
“네, 꽤나 쓸모가 있을 거예요.”
이미 예전에 구입한 물건이 봉인이 풀린 형태라 쓸 수 있는 건 진하뿐이었지만 효과는 완전히 발군인 물건 중 하나가 돋보기였다.
<모 유명 만화를 본떠 만든 탐정 돋보기.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흔적이든 모조리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용: 내 이름은 탐정, 범인이죠. / 해제: 내 증조부모님의 명예를 걸지 않겠어.>
<대상의 기운이 담긴 흔적 필요, 대상의 한 달간의 흔적을 모조리 밝혀낸다.>
<제한: 자격을 가진 자, 문방구 주인.>
업그레이드된 돋보기는 스펙이 꽤나 화려했다. 예전에는 현재의 위치와 갔었던 곳에 대한 자료가 색으로 부정확하게 나왔던 것에 비해 지금은 완전히 180도 달라졌다.
기운이 담긴 흔적이 필요하다, 라는 애매한 조건이 붙긴 했지만 대상이 머문 날짜, 체류 시간, 다음 장소로 이동에 걸린 시간 등 장소와 시간에 대한 것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표시됐다.
심지어는 자세하진 않지만 무엇을 했는지도 간단하게 적혀있었다.
“그럼 어째서 아레스라는 존재 때는 쓰지 않은 거죠?”
레이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이런 게 있었으면 애초에 굳이 본거지를 습격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당연히 해 봤죠.”
습격이 정리되자마자 잘려 나간 팔을 넘기기 전에 미리 조금 떼어 내 사용했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이,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흔적이 표시되어 포기했던 것뿐이었다.
“아마도 아레스라는 육체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원주인들의 유전 정보들이 나타나면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었던 것 같아요.”
“그럼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뇨, 그건 아니죠.”
아레스 때는 몇 시간이 지난 그저 굳어진 고깃덩어리나 다름없는 팔을 가지고 검색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진하의 눈앞에 있는 건 살아있는 완전한 존재 그 자체, 즉석에서 흔적을 뽑아 쓴다면 바로 확인되는 건 죽어 버린 원주인들의 흔적이 아닌 힙노스의 흔적이 나타날 것이다.
‘뭐, 정 안되면 네메시스나 이런 놈들 풀어 주는 척하고 공격을 유도해도 되고.’
기운이 흔적만 있으면 되는 거였기에 육체가 안 되면 공격의 흔적을 이용하면 되는 거였다.
“자, 아무튼 이제 꼬투리도 잡았으니까. 제대로 된 작전을 실행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