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독일에 있는 한 펜트하우스.
그곳의 주인은 소파에 앉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이 앞에 있는 술을 바라보았다.
<디어58>
무려 한 병에 약 2억에 달하는 고가의 위스키였다. 그는 이 술과 함께 오늘 있었던 일이나 처리할 안건들은 모두 잊은 채 보낼 생각이었다.
쿵!
그때, 베란다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펜트하우스의 주인이 재빨리 창문을 쳐다보았으나 창문 너머의 베란다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장식품이 떨어졌나?’
최근에 들인 조각상, 여기서 안 보이는 위치에 있을 만한 건 그것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내가 고정 좀 잘해 놓으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만.”
보나 마나 사용인들이 진열과 고정을 허술하게 해 놓은 게 분명했다. 그는 수억을 호가하는 장식품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아…….”
그는 베란다에서 시선을 돌린 채 잔을 들었다.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 굳이 망가진 장식품을 보고 더 더러워지느니 그냥 안 보는 게 나았다.
챙그랑!
그 순간 창문이 깨지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주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뚜벅, 뚜벅.
“아, 좀 가볍게 내려놓으면 안 되냐?”
“들고 날아와 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
깨진 창문을 넘으며 투덜 거리는 남자, 그는 둘의 외모를 확인하자마자 재빠르게 달려가 납작 엎드렸다.
“시, 신을 뵙습니다.”
주인의 모습에 창문을 넘어왔던 남자, 아레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치적거리니까 꺼져.”
“네!”
아레스의 말에 그는 몸을 낮춘 상태 그대로 저 빠르게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아레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인간이란.”
그대로 소파 쪽으로 걸어가는 아레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벌컥! 벌컥!
“크…… 이거 괜찮은데? 나쁘지 않아.”
아레스는 기분 좋다는 듯 소파에 앉아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테미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더러우니까 피 좀 치우고 먹지?”
아르테미스의 말에 아레스는 잘린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멎기는 했으나 아직 완전히 멎은 건 아닌지 여전히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 맞다. 야 인간, 이리 와 봐.”
아레스의 말에 멀리 떨어져 몸을 낮추고 있던 주인이 재빠르게 아레스에게 다가갔다.
“부르셨는지요.”
“내 친히 너를 위해 축복을 내려 주마. 어때 감격이지?”
“무,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신님!”
그는 아레스를 향해 넙죽 절했다. 역시 그동안 교단에 돈을 열심히 기부한 보람이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축복을 신이 직접 찾아와서 내려 주는 거겠지.
그런 주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레스는 곧바로 주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기뻐하라고 내 몸의 일부가 되는 걸 말이야.”
“네?”
콰직!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아레스의 손가락, 그의 머릿속을 파고든 손가락은 단단하게 그의 머리를 붙잡았고 그는 발버둥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쯧, 완전히 복구하려면 수십 명은 흡수해야겠는데?”
피가 멎은 팔을 보며 아레스가 혀를 찼다. 그래도 아예 쓰레기 같은 인간은 아닌지 다행히 피는 가까스로 멈췄다.
“피를 멈추랬더니 잡아먹으면 어떡해? 이 인간이 우리한테 공물을 얼마나 바치는지 아는 거야?”
“뭐 어때, 어차피 공물을 바칠 인간은 넘치잖아.”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아르테미스의 잔소리에 아레스가 귀를 후볐다. 애초에 그리 중요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진짜 중요한 인간이었으면 그녀가 그가 흡수하기도 전에 막아섰을 테니까 말이다. 아르테미스는 그런 아레스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뭐, 그건 넘어가고, 이제 어쩔 거야. 너 때문에 우리가 알려졌잖아.”
“네가 후퇴하자고 했잖아.”
“그럼 거기서 죽을 생각이었어?”
뻔뻔한 아레스의 대답에 아르테미스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애초에 그가 폭탄만 터트리고 갔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었다. 아니 후퇴를 하더라도 그가 이름만 말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레스는 그 모든 걸 다 어겼고, 결국엔 그들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버렸다.
“하아, 아버지는 왜 저런 놈 부탁을 들어주신 건지.”
심심하다고 나가서 놀고 싶다는 아레스의 말을 들어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무튼 아버지한테 혼날 준비나 해.”
“내가? 왜! 하라는 대로 폭탄도 터뜨렸잖아.”
“그리고 멋지게 인간들에게 네 이름을 다 까발렸고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다 죽이고 가면 됐잖아.”
“팔이 잘린 주제에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정보에도 없는 이상한 헌터한테 털린 아레스가 아버지가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헌터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놈의 머릿속에는 전투만 들은 건지 도대체 앞뒤 상황 파악이란 걸 할 줄 몰랐다.
“하, 그건 방심해서 그런거고. 그리고 애초에 내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이러지도 않았어.”
“개소리 그만하고. 내일 바로 다음 지역으로 갈 거니까 쉬고 있어.”
“에? 내일 바로?”
아레스가 아르테미스의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가 화를 삭이며 말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서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몰라?”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아레스를 따라가 감시하라는 아버지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편안히 쉬면서 힘을 회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다 한곳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레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네가 원한 일이잖아.”
“그래도 좀 천천히 하자고, 이왕 밖으로 나온 거 좀 놀다 가고 싶단 말이야.”
“하아, 노는 건 모든 일을 다 마친 다음에 놀아. 안 그래도 아버지가 왜 이리 속도가 느리냐고 뭐라고 하셨단 말이야.”
정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이놈을 두 번째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전쟁의 신이니 나름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쓸만할 줄 알았는데 진짜 전투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아무튼 내일 출발하는 거로 알아 둬. 그리고 침실은 내가 쓴다.”
말을 마친 아르테미스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놈과 이야기하다가는 자신의 복장만 터질 것 같으니 샤워라도 하면서 푹 쉴 생각이었다.
“쯧, 아무튼 까탈스럽다니까.”
욕실로 향하는 아르테미스를 보며 아레스는 혀를 찼다. 솔직히 그녀만 아니었다면 인간 세상을 더 즐길 텐데 계속되는 감시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뭘 그리 조심하시는 건지.”
이곳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강하다는 건 아레스 그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조심해야 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강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주의하라고 했던 인간조차 그가 모든 힘을 되찾는다면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인 수준인 인간.
그럼에도 이렇게 조심히 다녀야 하는 이유를 아레스는 알 수가 없었다.
* * *
“우선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요.”
레이나가 진하와 이기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민간인의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게 분명했다.
“아뇨, 어차피 우리 팀원들도 묵고 있던 공간이었으니까요. 당연하죠.”
진하는 레이나의 말에 손사래 쳤다. 당연한 걸 한 것이었기에 이렇게 감사를 받는 건 조금 머쓱했다.
“숙소는 바로 다른 곳으로 마련해 드릴게요. 그리고 다친 팀원들은 1순위로 치료 중이니 내일이면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고맙네요. 그나저나 제가 말씀드린 건 찾아봤어요?”
진하의 말에 레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아레스와 아르테미스, 저희 정보로는 그런 각성자는 찾을 수 없었어요.”
“뭐, 그럴 거라곤 생각했어요. 어차피 누가 봐도 가명이잖아요?”
“그리고 저희에게 주셨던 손으로 대조를 해 봤는데 그건 나왔어요.”
레이나의 말에 진하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보았다. 설마 나올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단서라도 잡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문제는 나온 사람이 두 명이라는 거에요.”
“두 명?”
“네, 지문은 최근에 사망한 거로 알려진 A급 각성자 비르다 미셸이라는 사람이고 피는 미하일의 피였어요.”
“미하일이요?”
진하의 반문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것은 좀 더 확인해 봐야 했지만 분명 피는 미하일의 것이 맞았었다.
“일단은 그래요. 그 밖에 유전 검사나 이런 건 아직 진행 중이고요.”
“혹시 미하일이 죽었나요?”
“아뇨, 어제까지만 해도 집에 있다는 걸 보고 받았어요.”
그녀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두 명의 흔적, 그리고 전혀 닮지 않은 인상착의까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거기다 분명 상대는 아무리 높아도 SS급 정도였어.’
진하가 쓴 무력화 스킬은 사기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스킬이었다. 동급이라면 무조건 먹히는 스킬이었고 그보다 높은 단계의 헌터에게 써도 반감은 될지언정 쓸 수 있는 스킬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스킬을 아레스라는 작자는 반감시켰었다. 방심했다고는 하나 진하는 한 번에 그를 무력화시켰고, 잡기 직전까지 갔다.
그렇다는 건 스킬이 제대로 먹혔어야 됐다는 건데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최소 SS급 막바지라는 건데…….’
그런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신 건가요?”
레이나가 가만히 테이블을 툭, 툭 치며 고민하는 진하를 보며 물었다. 진하는 그제서야 생각하던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저번에 최면 능력자라는 사람 최소 S급이라고 했죠?”
“네.”
“SS급 능력자가 갑자기 나타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알 수 없는 진하의 말에 레이나는 순간 왜 물어보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0%요. 사실 S급도 말이 되지 않지만 SS급은 더욱 아니에요.”
“그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헌터 등록이야 안 할 수 있다. 하지만 S급 이상이 안 밝혀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장을 하려면 적어도 전투가 필수였다. 그리고 S급 이상이라는 건 분명 수많은 전투를 했을 텐데 그걸 국가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설사 극악의 확률과 행운이 겹쳐 숨겨졌다 하더라도 SS급은 아니었다. 협회나 나라가 진짜로 머저리로 채워진 게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하물며 그게 여러 명이라면…….
“진하야.”
이기수가 진하를 불렀다. 진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야.’
관리자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었다. 오로지 이런 상황에 부합되는 걸 할 만한 사람은 관리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존재랑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야.”
관리자와 같은 존재들은 함부로 개입하기 어렵다는 걸 분명 사서와 할머니에게 장담받았었다. 그러니 관리자와 같은 존재일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겨우 SS급일 리는 없었다. 아마도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그의 수하이거나 몬스터라는 건데…….
‘문제는 할머니가 분명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한동안 개입은 거의 없을 거라고 분명 얘기했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을 떠나 먼 유럽부터 온 것이기도 하고.
“저기 죄송한데 둘 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레이나는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 둘을 보며 물었다. 말하는 투로 보아하니 뭔가 알고 있는 듯한데 도저히 그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흠, 얘기를 해 드릴 순 있어요. 다만 믿으실지…….”
“그건 제가 판단할게요. 그러니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시겠어요?”
진하는 잠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믿든 안 믿든 지금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어느 정도는 말해 줘야 하긴 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단 하나의 거짓도 없습니다.”
진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