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진하의 물음에 레이나가 자신의 무릎을 툭, 툭 치며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S급 헌터 1명과 A급 헌터 5천 명을 지원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럼 저희가 원하는 게 어떤 건지도 알고요?”
“최소 잭이죠? SS급 헌터요.”
“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12층까지 보조해 줄 인원도 있으면 좋겠지만 당연히 그건 안 되겠죠.”
아무래도 그것까지 바라기엔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다. 제2 게이트의 지리를 잘 아는 헌터가 있으면 좋겠지만 진하도 그건 어렵다는 건 알았다.
“그 부분은 죄송해요. 하지만 요즘 치안이 좋지 않아서요.”
“사이비교 때문에요?”
“네, 일반인이라 각성자가 함부로 건들기도 어렵거든요.”
“뭐, 그건 이해해요. 그래서 저희도 가장 고위급 헌터만 바라기도 한 거고요.”
“부족하다는 뜻이죠?”
레이나의 물음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잭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승률이 낮은 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SS급 두 명은 저희도 힘들어요.”
“저도 알아요. 그래서 여길 오면서 많이 고민했죠.”
“잭에 길잡이 겸 보조할 A급 헌터 50명을 지원할게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제안이에요.”
레이나의 말에 진하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튕겼다.
“SS급 한 명에 A급 50여 명이라…….”
확실히 걱정과 달리 레이나가 많이 양보하긴 했다. 보통이면 SS급 한 명이랑 한국에서 보낸 지원이랑 퉁치기도 애매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A급 50명은 길잡이 외에는 쓸모가 없으니까.
“잭도 필요 없고, A급 헌터도 안 지원해 주셔도 돼요.”
“네?”
“대신 레이나 당신이 우리를 지원해 줘요.”
진하의 말에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선 그녀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저는 임시지만 협회장이에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하물며 지금 치안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일반인들이 하는 시위나 폭동은 경찰들이 제압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은 제가 처리하고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나서고 있기에 아직 잠잠한 거예요.”
“사이비교가 그렇게 위험한가요?”
진하의 질문에 레이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송하나에게 정보를 받기 전까진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유럽에서 시위는 당연한 거였고, 사이비교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보를 받아 보니까 예상보다 더 규모가 크더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타국의 정보 길드가 유럽의 정보 길드보다 더 정확하게 알았다는 거에 조금 놀랐어요.”
“뭐, 이쪽에 조금 능력자가 있어서요.”
“그래서 저희 정보망도 그쪽을 집중적으로 돌려 봤더니 상급 헌터들도 감화되고 있더라고요.”
“상급? A급 헌터들 말하는 건가요?”
“아뇨, 아직 그 정돈 아니에요. 아직 확인된 건 B급 헌터들까지예요.”
“설마 그 수가…….”
“많아요.”
그녀의 말에 진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헌터가 속해 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B급 이상의 헌터들이 많이 넘어갔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고위급은 아니지만, B급 역시 높은 등급이었으니까.
“게이트에서 최소 1, 2년 이상 구른 사람들이 넘어가는 게 말이 돼요?”
“네. 저도 의아하지만 조금씩 넘어가더라고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말도 안 돼.”
게이트를 신성시하고 헌터를 비판하는 곳에 헌터가 들어간다니 말이 되질 않았다.
‘이쯤 되면 뭔가 이상한데.’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여러 사이비교들이 나타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규모가 커지고 상급 헌터까지 넘어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저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A급이 넘어갔다는 소문까지 있어요. 그러니 제가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도 그 정돈 다른 S급이나 잭이 해결 할 수 있지 않나요?”
“무력적인 측면에서는요.”
그녀의 말에 진하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녀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건 협회장이라는 소리였다.
“임시라면서 열심히 하시네요.”
“제 일이니까요. 그러니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레이나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작게 숙였다. 진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려갈 이유만 있음 되는 거잖아요?.”
“네? 거절이라면 아까…….”
“이것부터 보시고 얘기하시죠.”
진하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장난감 칼을 그녀에게 건넸다. 레이나는 진하가 건넨 아티팩트의 정보를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당신으로 교체하면 국가급 아티팩트 하나를 드릴게요. 어때요?”
“…….”
“참고로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원하는 형식으로 아티팩트 설정이 가능해요. 리스크가 없는 국가급 아티팩트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당장 만들어 준다는 건가요?”
“아뇨, 저도 이런 걸 쉽게 만들 수는 없어서요. 게이트를 내려갔다가 돌아오면 하나 만들어 드리죠.”
진하의 말에 레이나는 눈을 감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제한도 없는 국가급 아티팩트, 그것도 원하는 효과를 어느 정도 설정할 수 있다고 했다.
‘나쁘지 않아.’
언제 또 게이트 폭주와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리고 그때 그녀나 다른 S급 이상의 헌터들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물론 감시 시스템도 만들고, 항시 번갈아 가며 상주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급 아티팩트라면 방비가 더 튼튼해질 수 있었다. 그것도 아무나 쓸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고민 끝에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자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협회 임원들과 논의할 필요성이 있었다.
“당연히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죠. 어차피 한국에 헌터들이 올려면 며칠 기다려야 하기도 하니까요.”
“정말이지. 처음 봤을 때부터 끝까지 저를 안 놀래킨 적이 없네요.”
“고작 두 번 만난 거니까?”
진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진하의 미소에 레이나 역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뭐, 그럼 오늘 할 말은 이 정도인 것 같고, 결정 나면 다시 보도록 하죠?”
“네, 그러도록 해요. 호텔은 1층에 내려가시면 바로 직원이 안내해 줄 겁니다.”
진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배웅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진하는 작게 손을 흔들며 협회장 문을 닫았다. 협회장 문이 닫히고 일행은 천천히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하야, 근데 위를 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뒤따라오던 하예진이 물었다. 솔직히 이번 얘기에서 그들이 갈 필요는 전혀 없었다. 실제로 듣기만 했지, 얘기를 하진 않았으니까.
“맞는 말이다. 이기수라면 이해 가도 나나 예진이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준수 역시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하는 그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간단해요. 그냥 두 분을 소개시키는 거예요.”
“소개?”
“네, 대표는 저지만 중요한 자리에 3명을 다 끌고 왔어요. 그럼 상대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을 나와 거의 비슷한 자리로 인식하겠죠. 그리고 안면도 터야 하니까?”
“자칫 잘못하면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었다.”
하준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용을 들어 보면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자신이나 하예진을 대리인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를지도 모르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물론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나 그런거고 우리들에게는 아니잖아요.”
이기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이 상했을 수 있지만 레이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애초에 3명 다 게이트 폭주 때 최선을 다해 싸운 사람이었기에 좋아하면 좋아했지, 기분 상해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뭐 이기수 과면 그런 걸로 기분 나빠할 리 없지.’
진하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묻어 놨다. 이기수가 있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면 재밌을 것 같긴 했지만 삐질 게 분명했으니까.
“뭐, 성격 좋은 사람이니까요.”
대신 진하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이기수도 동의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흠…… 눈치가 없군.”
빠르게 상황이 캐치해 낸 하준수가 이기수를 보며 작게 웃었다. 확실히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기수와 레이나는 많이 닮기는 했다.
분명 순진한 건 아닌데 이상적인 생각 위주로 한다든가, 아니면 의외의 곳에서 허당이라든가 하는 점 말이다.
“근데 우리를 같은 수준으로 인식시킨다고 좋을 게 있나? 애초에 3명이나 그런 위치로 만들면 오히려 좋지 않잖아.”
하예진의 물음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한 명은 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게 제일 낫다고 생각해서 3명을 모두 데려온 것이었다.
“누가 죽을지 모르니까.”
진하나 이기수는 전투에서 항상 전방에 위치해 있었다. 즉, 사망할 확률이 높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존 확률이 진하, 이기수, 하준수, 하예진 순으로 낮았다.
“적어도 그때 리더가 될 만한 사람은 있어야지.”
사실 이기수나 진하는 거의 죽는다는 가정하에 데려온 거였다. 그래야 후방에 위치하는 하예진이나 스킬 사용 동안 죽지 않는 하준수가 나중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
“안 죽어.”
하예진이 그 말과 함께 진하의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아야야! 알았어!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어디 가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알겠어.”
“쯧, 아주 매를 벌어요.”
둘의 모습에 이기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진하는 이기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하예진의 시선에 빠르게 앞을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내를 맡은 지크라고 합니다.”
로비로 내려오자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진하에게 다가왔다. 그는 진하에게 다가오자마자 곧바로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무슨 일이 있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저희 팀원 못 보셨나요?”
진하는 로비에 보이지 않는 팀원들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레이나와 만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팀원들은 로비에서 대기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팀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 그분들이라면 20분 전에 먼저 호텔로 안내했습니다. 연락하신다고 했는데 못 받으셨나요?”
지크의 말에 진하를 비롯한 일행들은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연락이 왔는지를 확인했다.
“나는 안 왔어.”
“나도.”
“나도 안 왔다.”
지잉~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세 명은 진동이 울리는 진하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진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휘젠: 먼저 감. 올 때 메로나.>
정확히 방금 온 간단한 메시지 하나.
“오긴 왔네.”
“뭐, 조금 늦게 보낼 수도 있죠?”
“가면 주의를 줘야겠군.”
세 명의 말을 들으며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휘젠이야 원래 그렇다 치지만 재희 씨는 왜…….”
사실 안 봐도 뻔하긴 했다. 보나 마나 휘젠이 자기가 하겠다고 다른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주장했을 게 뻔했다.
“확인되셨나요?”
대화를 듣던 지크가 진하에게 물었다. 진하는 그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호텔로 가면 될 것 같네요.”
“그럼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지크는 그 말과 함께 협회 출구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일행이 편하게 따라올 수 있게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행이 임시 출입증을 반납하고 협회 본부를 나서자 들려오는 소리.
“협회는 게이트 공략을 멈춰라!”
“이건 신에 대한 모욕이다!”
커다란 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피켓을 든 몇몇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신을 믿어라!>
<게이트를 공략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이는 문구, 진하는 그 문구를 보며 지크에게 물었다.
“저런 사람 자주 오나요?”
“아뇨, 어제부터 오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사이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하는데 아마 그쪽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냥 두네요?”
진하의 말에 지크가 쓰게 웃었다. 그 역시 저런 놈들은 바로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협회의 보안 직원은 대부분 각성자였기에 단순히 시위만 하는 사람들을 건드리는 건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었다.
“경찰이 곧 저 사람들 치울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니 조금 부끄럽네요”
“아뇨, 괜찮아요. 어딜 가나 저런 사람은 있으니까요. 가던 길이나 가죠.”
진하의 말에 지크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한번 그들이 드는 피켓을 봤다.
<신의 축복을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