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시끄러운 놈도 사라졌고 드디어 조용하겠네.”
진하를 내쫓은 할머니는 책상 위에 놓인 잔을 치우면서 생각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진하가 관리자를 처리할 확률은 10% 미만이었다.
‘그놈이 그 확률을 뚫을 수 있을련지…….’
“뚫겠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할머니는 잔을 싱크대에 넣으며 들려온 말에 대답했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냐?”
“그쪽은 이미 끝났대요. 그리고 저를 붙잡았던 건 할머니였잖아요.”
“그거야 일이 있으니까 그런거고, 그러는 너는 왜 안 갔냐. 더 이상 여기 올 이유도 없잖아.”
할머니의 말에 목소리의 주인공인 사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할머니한테 인과율 좀 나눠 주러 왔죠. 꽤 무리했죠?”
“애끼, 이놈아! 겨우 그 정도로 내가 무리했겠냐?”
“인과율 정제하는 포인트 시스템에 관리자 막기, 문방구 이관, 인과율 주기. 이 정도면 꽤 준거 아닌가요?”
“겨우 그 정도 준다고 무리가 아냐.”
“뭐, 현 관리자였다면 그렇겠죠. 가끔 보면 할머니는 츤데레 끼가 있단 말이에요?”
“츤……, 뭐?”
할머니의 말에 사서가 빙긋 웃었다. 모습만 할머니지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존재였다. 그냥 부끄러워서 저러고 있는 거였다.
“할 거 없으면 여기 청소나 좀 하고 가라. 너랑 방금 나간 그놈 때문에 아주 먼지가 풀풀 날리는구나.”
“어…… 저는 가도 될까요?”
“이리 와서 앉아.”
“넵.”
사서가 재빠르게 책상 위에 앉았다. 그러자 잔을 모두 닦은 할머니가 수건에 물기를 닦으며 물었다.
“그래서 진짜 왜 왔어?”
“말했잖아요. 할머니가 무리하는 것 같아서 인과율 좀 나눠 주러 왔다고.”
“이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아니고?”
“하하, 뭐, 그런 것도 좀 있죠.”
할머니는 넉살스럽게 대답하는 사서의 말에 혀를 찼다. 그녀를 걱정한다, 뭐다, 이런 말을 했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건 진하가 클 때까지 시간을 벌어 달라는 거였다.
“너도 꽤 진심인가 보구나.”
“뭐, 이야기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좋은 거니까요. 그러는 할머니도 나름 진심이잖아요?”
“나는 그냥 적당히 한 거다. 어차피 곧 죽을 거 바리바리 싸가는 건 귀찮잖아? 그래서 넘긴 것뿐이야.”
“뭐, 그렇다고 해 드릴게요. 그런데 진짜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김진하 씨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속이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할 텐데.”
사서의 물음에 할머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끝날 때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미 1차 게이트 보스를 죽인 순간부터 어느 정도 관리자가 의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으니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뭐, 수명을 좀 더 바치면 1년 정도는 버티겠지.”
“수명을 막 쓰시네요.”
“그게 방금 전에 나한테 수명 좀 닳아도 된다고 했던 놈이 할 말이더냐?”
“1년이랑 수십 년은 다르니까?”
“뭐, 어차피 살 만큼 살았는데 고작 그거 줄어든다고 바뀌는 건 없다.”
이미 수천 년을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에게 살아있는 건 그냥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기에 더 이상 수명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잠시 정적이 지나가고, 가만히 앉아있던 사서가 입을 열었다.
“그…진하씨가 이기겠죠?”
“지겠지.”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너 그 말 수십 번째인 건 아니?”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매번 이야기가 무너지는 걸 지켜봤으면서 다시 기대하는 게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좋은 것만이라도 보여주던가. 안 될 거라는 건 죄다 보여 주면서 성공을 바라는 건 무슨 심보인 건지…….”
“머리가 꽃밭이면 되는 게 없으니까?”
“됐다. 쓰잘데없는 말 할 거면 이제 가거라.”
할머니의 말에 사서가 일어나며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방안에 작은 바람이 흐르더니 그의 손에 먼지들이 동그랗게 압축되어 모였다.
“이건 서비스?”
휴지통에 먼지를 넣은 사서는 그 말과 함께 스르륵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할머니는 혀를 쯧쯧 찼다.
“으이구, 언제 철이 들련지. 그리고 끝까지 늙은이를 부려 먹으려 하는구나.”
사서가 떠난 자리에는 그가 놓고 간 구슬 하나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
“크리스마스 한정 케잌 사세요!”
“커플들은 50% 할인!”
거리 주변에 넘치는 사람들,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진하는 황당해하며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크리스마스라고?”
그것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렇게 진하가 허탈해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은 상황에서 얇은 옷을 입은 진하를 보며 쑥덕였다.
“저 사람은 춥지도 않나?”
“각성자인가? 각성자는 추위를 덜 탄다잖아.”
“근데 왜 혼자서 청승맞게 서 있데? 솔로인가?”
당연하게도 그 말들은 진하의 귀로 쏙쏙 들어왔고, 진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대가 안 맞아.”
시험을 하며 계산한 시간과 실제로 흐른 시간이 맞지 않았다. 분명 하예진한테 들었을 땐 1대1 구조로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닌 듯했다.
‘하기야 진짜 1대1로 흘렀으면 사서가 시간은 상관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어떤 곳은 빠르게, 어떤 곳은 느리게 흘렀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듯했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 수개월을 더 지냈어도 똑같이 오늘 떨어졌을 것 같았다.
‘이거 보고 화를 풀라는 건가?’
행복한 얼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목표를 다지라는 건지 아니면 시험을 하면서 된통 당한 기분을 정리하라는 건지…….
고개를 저은 진하는 우선 근처에 있는 협회로 향했다.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그가 얻은 힘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하는 게 중요했다.
‘그나저나 그럼 인간은 도대체 뭐인 걸까.’
고작 창조신이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적인 존재들에게 미움 받고 그들의 뜻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 그리고 거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싶다.’
물론 말뿐인 생각이었다. 아무리 농락당하고 그들의 뜻에 따라 변하게 되는 게 인간이라도 소중한 것이 있는 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만큼 조금 허탈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진하가 해온 일들이 모두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고 스스로 이룬 거라고 해도 결국 그건 조그마한 케이지 안에서 사람들이 동물을 보며 대단하다 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거라면 그중에 인간 출신이 존재한다는 거? 좀 개떡 같은 놈이긴 했지만 적어도 완벽한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사서 덕에 아예 절망인 건 아니었다.
‘물론 그놈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가 깔리겠지만.’
그렇게 잡생각과 어두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진하의 몸은 어느새 협회에 도달했다. 진하는 곧바로 협회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슨 용무시죠?”
“협회장을 만나려고요.”
“약속이 잡히셨나요?”
“아뇨.”
“죄송하지만 협회장님은 미리 약속된 게 아니시면 만날 수 없습니다.”
“일단 말이라도 전해 줄래요? 그럼 알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죄송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요즘에 협회장님 지인이라고 사칭하는 자들이 많아서요.”
게이트 입구에서 가로막는 직원의 말에 진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헌터 자격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뭘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일을 다하는 직원을 탓할 수도 없고…….
“흠…… 진짜 말만이라도 전해 주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직원의 말에 진하가 침음성을 흘렸다. 집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너무 귀찮았다.
“저기, 저 헌터인데 자격증을 두고 와서 그러는데 그 조회는 안 되나요?”
“조회는 가능합니다. 그래도 협회장님을 만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협회장님은 S급 헌터가 아닌 이상 미리 약속을 잡으셔야 합니다.”
순간 진하의 목구멍에서 SS급이라는 말이 턱 끝까지 치솟았다가 잦아들었다. 무력만 보면 SS급이 맞긴 했지만 여기선 아직 A급 랭크였기에 SS급이라 말한들 소용이 없었다.
“하아, 알았어요.”
삐리릭!
그 순간 안내 데스크의 내선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직원은 진하에게 양해를 구하곤 전화를 받았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철컥
전화가 끊기고 직원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진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진하는 방금 온 전화가 협회장실에서 온 것임을 깨달았다.
“혹시 김진하 헌터님 되십니까?”
“네, 맞아요.”
“협회장님이 만나시겠다고 합니다.”
직원의 말에 진하가 씩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그가 생각한 대로 협회장실에서 온 전화였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로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다만, 협회장님께서 바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테러범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준하게 검사를 한 뒤에 올려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직원의 말에 순간 진하가 눈을 크게 깜박였다. 그 모습에 직원은 아주 천천히 다시 한번 자신이 전해들은 말을 다시 진하에게 전달했다.
“왜요?”
“그건 저도 잘…….”
직원의 모습에서 진하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깊이 생각하면 그러는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긴 했다.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으니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사기꾼이면 그것만큼 귀찮은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방법은 아니었다. 분명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많을 텐데…….
“아, 그리고 전달하라는 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그게…….”
잠시 말을 흐리는 직원, 그의 모습에 진하는 더욱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진하의 표정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지금부터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실감 나게 재현하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네, 괜찮아요.”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인지는 몰라도 실감 날 필요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진하의 말에 직원은 살짝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기수 님께서 말씀하시길…….”
“기수?”
“뺑이나 열심히 치다 와라!”
“네?”
“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진하는 순식간에 모든 전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직원에게 말했다.
“검사 어디서 받죠? 최대한 빠르게 받을 수 있을까요?”
빠르게 검사를 받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겨 버린 순간이었다.
* * *
“아무리 놀렸다고 계란이 뭐냐 계란이.”
“편의점에서 날계란도 팔았다. 훈제 계란인 걸 다행으로 여겨.”
진하의 말에 이기수는 입을 다문 채 머리에 묻은 계란 껍질을 마저 털어냈다. 그리고 송준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우선 돌아오신 것에 환영합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환영 인사도 고맙고요?”
뼈가 있는 진하의 말에 송준하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하, 그건 어디까지나 이기수 헌터님 독단이었습니다.”
“허락한 건 송준하 씨고요.”
진하가 그를 살짝 째려보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으며 근처 소파에 앉았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이제야 진짜 제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나저나 다른 시간선은 어땠어?”
“개떡 같았어. 거기서는 네가 울보였다.”
“거짓말치지마라?”
“뭐 믿지 말던가. 그나저나 예진이는 언제 와요?”
“곧 도착한답니다. 그리고 송하나 씨도 곧 도착할 겁니다.”
“흠, 그래요?”
“근데 갑자기 왜…… 모이라고 하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멸망에 관한 거라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이기수와 하예진, 그리고 송하나에게까지 모든 정보를 받은 상태였고 멸망을 막기 위해 준비도 어느 정도 차곡차곡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거 말고도 전할 게 하나 더 있어서 그래요.”
“무엇을?”
“흠……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진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자칫 잘못 말하면 말이 필터링 될 테니 최대한 고르고 골라 말해야 했다. 고민하던 진하는 이내 적당한 말을 생각해내곤 입을 열었다.
“뭐, 신을 죽이는 방법이라고 해 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