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그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라면 진하에게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속으로 어지럽고 짜증 나고 개떡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결국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그의 처지였다.
“홀, 그래도 아예 바보는 아니구나.”
“흠, 어거지로 준거긴 하지만 역시 자격을 가진 사람이긴 하네요.”
일어선 진하를 보며 둘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하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사서에게 손을 뻗었다.
“손잡아 주는 건가요?”
사서는 빙긋 웃으며 진하의 손을 붙잡았다. 진하는 일어나는 그를 세게 잡아당겼고 그 순간 딸려오는 그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무력화
퍽!
무력화까지 쓰며 빈틈을 만들어 사서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꽂은 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좀 낫나요?”
“아니, 짜증 나.”
짜증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신적인 존재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격차가 많이 차이 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스킬이 통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사서는 날아오는 주먹을 힐끔 바라만 볼 뿐 그대로 맞아 줬다. 즉, 일부로 맞았다는 거였다.
“뭐, 이건 제 죗값이라고 치고 일단 자리에 좀 앉죠?”
사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 모습을 보며 진하는 한 번 더 주먹을 날릴까 했지만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맞아 줄 것 같지 않아 그저 한숨만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뭔 놈의 한숨을 그리 푹푹 내쉴꼬?”
“하, 할머니 같으면 안 그래요?”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그게 결국 신적인 존재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던 것뿐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판 위에서 놀고만 있다는 걸 깨달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더욱이 짜증 난 건 그럼에도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싫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여기에 우리가 모인 것 자체가 네가 해낸 거야.”
“그렇죠? 우리는 애초에 저는 물론이고 할머니도 처음에는 그리 크게 기대 안 하셨을걸요?”
비록 시험하고 이것저것 그를 조종하는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적어도 여기까지 온 건 오로지 그의 선택과 행동으로 만들어진 거였다.
그래서 그들이 이곳에 모인 거고 진하에게 시험을 주고, 강하게 만든 거기도 했으니까.
“됐으니까 할 말이나 빠르게 끝내요. 머리 아프니까.”
진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더 이상은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냥 빠르게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흘, 그 점이 맘에 들어. 현실 순응이 빠른 점.”
“상상할 수 없는 미친 짓도 많이 하고요.”
감탄하는 둘을 보며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진하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더 놀리다간 이 노인네한테도 주먹을 날리겠구나. 뭐, 빠르게 전달할 거만 전달해 주마.”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도 되죠?”
사서가 둘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으니 이제 그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머지는 진하와 할머니에게 맡기고 가면 되는 거였다.
“그래라.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갈 거였으면서.”
“뭐, 그렇죠? 그럼 전 이만 갈게요.”
그 말과 함께 사라지는 사서, 진하는 사서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저놈도 저놈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
“알고 싶지 않네요.”
“알라고 하는 말 아니다. 그저 저놈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선택과 선물을 너에게 준 것뿐이니까.”
“선물?”
“두 번째 시험은 저놈이 도와준 거라 하지 않았냐. 그거 아니었음 이 정도까지 강해지기도 힘들었겠지.”
진하는 할머니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결국 도와준 게 있으니 원망하지 말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선택을 한 건 너였다. 그러니 그만해라.”
“하아…….”
“자, 이제 본론으로 진짜 돌아가야지. 우선 너한테 문방구를 줘야겠구나. 손 좀 내밀어 보거라.”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내민 진하의 손바닥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검지로 톡 하고 손바닥을 건드렸다.
<칭호: 문방구 알바가 문방구의 주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문방구 물품의 진열과 매입이 가능해졌습니다.>
<문방구 알바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인트 100만 점을 얻습니다.>
매우 간단한 메시지 창, 문방구를 넘긴 할머니는 창을 지긋이 바라보는 진하를 향해 말했다.
“내가 전에 문방구가 어떤 곳이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더냐?”
“사념이 모인 곳.”
“그래, 말 그대로다. 네가 쓴 물품들은 하나같이 죄다 인간들의 사념을 모아 만든 거다.”
문방구의 아티팩트는 그녀가 만든 게 아니었다. 그저 모든 시간 선에 퍼진 인간들의 사념을 모아 물품에 부여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굳이 문방구였던 이유는 문방구에 있던 물품들이 그나마 순수한 사념을 모으기 좋았고 비슷한 종류의 사념들을 모으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네가 들여놓은 물품들은 똑같이 사념 부여가 될 거다. 어떤 식으로 사념을 부여할 건지는 네 선택이고.”
“그게 끝인가요?”
“아니, 더 있지. 관리자를 막을 방법을 들어야지.”
“관리자를 막을 방법?”
“그럼 그냥 문방구만 툭 하고 넘겨주면 끝인 줄 알았더냐?”
솔직히 말하면 그런 줄 알았다. 어차피 관리자를 죽여야 한다면 그냥 강해지고 관리자를 만나 싸우기만 하는 게 끝인 줄 알았다.
“에잉, 쯧쯧! 어쩌다 이런 놈에게 문방구를 넘겨줘서.”
진하의 생각을 읽은 할머니가 혀를 찼다. 이렇게 맹한 행동을 보면 문방구를 줬던 게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네가 관리자를 죽일 방법은 0%이다. 아니, 그냥 0%도 아니고 그냥 생각조차 불경할 정도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거예요.”
“그래서 알려 준다는 거 아니냐. 네가 관리자를 이길 방법을.”
“그럼 빨리 말해 줘요.”
“성격이 급하기는. 간단하다 그냥 아바타를 부수면 되는 거야.”
“아바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타, 관리자가 세상에 관여하기 위해 인과율을 가지고 만든 일종의 분신체였다. 그걸 이용해 세상에 관여하는 게 관리자였고, 반대로 그게 부서지면 관리자는 꽤 오랜 시간 세상에 관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 그냥 한동안일 뿐이잖아요.”
“보통은 그렇지. 근데 그놈이 한 짓을 봐라. 게이트를 만들고 몬스터를 만들었지. 즉, 인과율을 미친 듯이 소모했다는 거다. 이번 한 번만 아바타를 죽이면 적어도 수천 년은 못 만든다.”
“고작 수천 년…….”
“그 정도면 됐지 뭘 바라냐? 인간들이 스스로 멸망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리고 그때쯤 되면 새로운 관리자가 나타날 수도 있고.”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관리자가 세상에 관여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게 다라는 소리였다.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그것만 해도 더 이상 게이트 폭주와 같은 일은 없을 거다. 게이트를 없애진 못해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냐?”
“예, 뭐…….”
확실히 그것만 해도 좋은 거긴 했다. 게이트가 폭주할 일만 없으면 적어도 친구들이 죽을 확률은 극도로 줄어드니까.
그리고 더 이상 신적인 존재가 자신들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는 했다.
“그래서 그 아바타는 어딨는데요?”
“여기에 있는 게이트 20층.”
그녀의 말에 진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회귀 전에 16층도 겨우 갔는데 20층을 가라니, 그건 너무 말이 되지 않았다.
“걱정 말거라. 너한테 20층까지 내려가라고도 말 안 해.”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16층 게이트 보스들을 죽이거라. 그럼 자동으로 아바타는 지상으로 올라올 거야.”
“네? 하지만 회귀 전에는 그런 적이…….”
“모든 게이트 보스가 죽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인과율을 많이 소모하지도 않았거든.”
회귀 전과 다르게 현 관리자는 꽤 많은 인과율을 소모한 상태였다. 애초에 시간선을 그녀가 옮기면서 소모한 인과율이 돌아오지 않았고, 진하로 인해 소모한 인과율도 원래 예상치보다 심하게 쓰인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관리자는 왜 저를 건들지 않은 거죠?”
진하가 여지껏 썼던 아티팩트들은 모두 할머니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할머니도 관리자이기는 했지만 이미 은퇴한 존재였고 지금의 관리자가 자신을 방해하는 할머니를 가만히 두는 게 이상했다.
아니, 적어도 그녀를 건들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의 힘을 쓰고 있는 진하를 건드려야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거야 못하거든. 내가 말했잖아. 인간을 직접적으로 건드리기 어렵다고. 그게 규칙이거든.”
“창조신이 만들었다는?”
“그래, 그리고 지금 나를 건드리는 건 오로지 손해밖에 없는데 건드릴 리 없지. 애초에 그놈은 그냥 내가 아티팩트를 사방으로 뿌리고 잠적한 거로 생각할걸?”
“그럼 휴가라는 게…….”
“당연히 그놈 눈을 피해 잠적한 거지. 그럼 진짜로 휴가라도 간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지금은 몰라도 초반에는 그냥 이상한 존재가 이상한 물품들을 맡기고 떠났다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뒤에 이런 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2차 게이트 보스들만 죽여도 놀라서 헐레벌떡 올라올 거다. 그리고 2차 게이트 보스가 파괴된 것만 해도 좀 약해진 상태일 거고.”
“그럼 결국에 해야 하는 게 게이트 공략이라는 소리군요.”
결국, 진하가 해야 할 일은 바뀐 게 없었다. 다른 헌터들처럼 그저 게이트를 공략하고 그 끝을 보는 건 똑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헌터와 달리 그는 꼭 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아, 한국 게이트는 건들지 말고.”
“네? 왜요?”
“그놈 여기 1 게이트 20층에 있거든. 바로 직속인 몬스터를 건드리면 눈치챌 거야.”
“어째서요?”
“왜냐면 넌 이제 문방구 주인이니까. 내 흔적이 듬뿍 묻은 채로 잡는데 모르면 그게 바보인 거지.”
아무리 인간을 건들지 못한다고는 해도 그녀의 흔적이 많이 묻은 진하를 보면 그대로 둘 리 없었다.
한국에 있는 보스부터 잡아 버리면 곧바로 아바타가 올라올 것이다. 다른 게이트야 그의 아바타가 있는 곳과 꽤 멀기 때문에 직접 건드릴 수 없으니 난도가 높아지기는 해도 아바타가 올 일이 없으니 해외부터 공략해야 했다.
“그럼 바로 아바타를 공략하는 게 낫지 않아요?”
“그 실력으로?”
“…….”
아직 진하의 실력은 여물지 않았다. 당장 아바타를 공략하면 이길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지금은 다른 곳부터 공략하며 아바타를 약화시키고 성장하는 게 훨씬 나았다.
“다행히 네가 해 놓은 것 때문에 당장 뭘 어떻게 건드리진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 틈을 이용해서 게이트 보스들을 공략하고 오거라.”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죽으면…….”
진하의 말에 할머니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론 사서에게 그렇게 호되게 얻어맞고, 주변 사람들이 죽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어찌 보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다른 사람들 안 죽게 노력해 봐라.”
거기까지는 그녀의 역할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그녀가 진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모조리 해 준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진하가 알아서 해야 했다.
“자, 내 설명을 끝났으니까 이제 나가거라.”
“네?”
“얼른 나가라고!”
할머니는 진하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진하는 황당함에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눈을 깜빡인 사이에 어느새 진하는 이미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하…….”
진하는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뭘 하고 이뤘다고 말했지만 결국엔 그냥 신적인 존재들에게 놀아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진하의 볼 위에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볼을 간질이는 느낌에 진하가 위를 쳐다보았다.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