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그녀의 죽음과 함께 시야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잘 갔다 오셨나요?”
귓가에 들리는 사서의 목소리, 그 순간 진하는 그대로 주먹을 꽉 쥔 채 사서에게 달려들었다.
“어이쿠.”
하지만 사서는 진하의 주먹을 아주 손쉽게 피해 버렸고 오히려 달려든 진하의 뒤로 돌아가 그의 뒷목을 붙잡아 제압했다.
“갑자기 너무 격하신 거 아니에요?”
“너지?”
“뭘 말하는 거죠?”
“이 판을 모두 짠 거 너 맞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신혜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죽고 싶어서인 줄 알았는데 스킬 <무력화>가 이전되었다. 그렇다는 건 이렇게 되길 사서가 유도했다는 뜻이었다.
“네, 제가 유도했어요.”
너무나도 시원하게 인정하는 사서, 편안히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진하가 이를 갈았다.
“뭘 그리 화를 내시죠? 어차피 제가 어느 정도 개입했다는 건 송하나 씨 때부터 예상하고 계셨잖아요.”
까드득!
“아, 설마 제가 아니었으면 이신혜 씨가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죽는 방법의 문제만 있을 뿐 그녀는 어차피 죽었을 거예요. 앞의 3명이 특이한 거지 원래는 그게 맞거든요.”
마치 영화를 한 편 보고 감상을 말하듯 편안히 말하는 사서를 보며 진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사서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왜…… 왜 그랬어.”
“뭐가 말인가요?”
“왜 이딴 짓을 했냐고 묻잖아!”
“아하, 송하나 씨와 이신혜 씨 말인가요?”
“그저 전생의 기억만 넣는다며, 이건 애초에 시험 내용이 다르잖아. 그러고도 네가 신적인 존재야?”
진하가 분한 듯 말하자 사서는 피식 웃으며 진하를 바라봤다. 확실히 시험 내용은 그가 알려 주었던 것과 꽤 다르기는 했었다.
“기본적인 틀은 다르지 않잖아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그저 인간일 뿐이라고요.”
“인간이면 더 그러지 말았어야지!”
“제가 왜요?”
“그걸 말이라고……!”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참에 하나 알려 드려야겠네요.”
그 말과 함께 사서는 진하의 뒷목을 놓았다. 그 순간 뻣뻣했던 마비가 풀린 진하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 장난감 칼을 꺼냈다.
“할머니, 공간 좀 열어 주시겠어요?”
“싫다. 그럼 내 수명 깎이잖아.”
“수천 년이 넘게 살았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고작 1년인데?”
“에휴.”
사서의 말에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는 한숨과 함께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사서와 진하가 있던 공간이 사라지고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자, 한번 덤벼 보세요.”
그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진하는 사서를 향해 달려들어 칼을 내리그었다.
“방(妨).”
콰직!
그의 말과 함께 허공에 나타나는 반투명한 장막이 손쉽게 진하의 칼을 막아 내었다. 진하는 보호막에 틀어박힌 칼을 재빨리 빼내며 뒤로 물러났다.
휘리릭!
그 순간 사서가 주머니에서 총 하나를 꺼내더니 진하를 겨눴다.
―천벌.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쏘아지는 커다란 전격, 피할 타이밍을 놓친 진하가 과거의 후회를 3단계로 높이며 방어했다.
콰아앙!
‘크윽…….’
진하는 몸을 덮치는 전격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게 마치 이기수가 풀 파워로 쏜 전격이 몸에 쏟아진 듯했다.
―꿰뚫어라.
뒤이어 날아오는 얼음창 하나, 진하는 저릿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장난감 칼로 날아오는 창을 내리쳤다.
파캉!
“어?”
콰직!
하지만 얼음창은 의도와는 다르게 장난감 칼을 아주 손쉽게 부수며 진하를 꿰뚫었고, 힘에 밀린 진하는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으…….”
“어때요. 많이 아프죠? 잘 움직여지지도 않고.”
사서가 묻는 말에 진하가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봤다. 사서는 진하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참고로 이건 제 힘이 아닙니다.”
그 말과 함께 사서가 들고 있던 총을 뒤로 던졌다. 그러자 총이 허공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죄다 자격을 가졌던 사람들의 힘이었죠. 그들은 당신처럼 관리자에 도전했고 패배한 시간선의 사람들이에요.”
“그…… 어…….”
“아, 마비가 아직 안 풀렸나 보네요.”
사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진하의 몸을 마비시키던 전격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제 좀 말하기 쉽겠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 진하는 사서를 보며 말했다. 자신이 약한 건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서가 그에게 한 행동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당신이 상대해야 할 관리자는 최소 이것보다 강해요. 그런데 당신은 너무 몸을 막 던지는 경향이 있어요. 유일한 대항책인데요.”
“그래서…… 그래서 나보고 동료를 죽이게 만들고, 그들의 스킬을 흡수하게 만든 거야?”
“뭐, 조금은?”
“그 정도 힘이 있으면 네가 했으면 됐잖아. 네가 막으면 됐잖아!”
진하의 외침에 사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랜 시간을 저쪽에서 보내서 까먹은 것 같은데 저는 이곳에 관여할 능력이 없어요.”
“그렇게 강한데도?”
“강함과는 다른 이유입니다. 아무튼, 알겠어요? 당신이 상대하려는 관리자는 그렇게 강한 존재고 당신은 그런 존재를 상대하면서 모두를 지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그 맛이 간 머리 좀 고치세요.”
사서의 말을 들은 진하는 그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이 무너지며 그대로 땅바닥에 몸이 쓰러졌다.
“나보고 어쩌라고…….”
이따위로 강하면 애초에 강해져도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고작 3방이었다. 사서가 손쉽게 날린 3방에 진하가 무너졌다. 그런데 그보다 강한 관리자를 그가 이길 가능성이 있을 리 없었다.
진하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서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누워 있는 진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정면으로 붙으면 당신이 죽죠.”
“…….”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죠. 그리고 당신은 그걸 저한테 증명했고요.”
“설득한 거?”
“아뇨. 제가 만든 판을 뒤엎은 거요.”
진하는 사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이미 진하는 이신혜를 죽여 버리게 되었다. 모두 다 그의 뜻대로 되었는데 무슨 판을 뒤엎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워 있지 말고 몸 좀 일으키시죠? 설명 좀 하게. 머리에 열도 좀 빠졌죠?”
진하는 그의 말에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확실히 얻어맞은 뒤라서 그런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머리에서 열이 좀 빠지긴 했다.
물론 여전히 진하는 사서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다만 그러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려 드리죠. 사실 제가 시험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원래 모두 당신한테 죽는 게 답이었어요.”
“……뭐?”
“인간이 여러 기억들을 감당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정신과 몸은 달라요. 최저로 적었던 이기수 씨만 해도 인간이 버티기 어렵죠.”
“그럼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야.”
“보고 싶었으니까요. 보통은 미치거나 절망하고 죽는 게 인간이에요. 물론 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제가 그들에게 보여 준 건 아무런 희망도 없었어요. 애초에 설득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죠.”
그렇다는 건 애초에 이 시험 자체가 진하의 친구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만들었다는 거였다. 진하가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스킬을 흡수하고 강해지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단 거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한 명 빼곤 아무도 안 죽었잖아요. 애초에 다 죽이려는 의도도 없었어요. 제가 말했죠? 당신에게 미래를 바꿀 힘이 있는지 확인할 거라고.”
시험을 시작하기 전 사서는 진하에게 말했다. 아주 약간의 희망을 보았다고. 그리고 그걸 확실히 하기 위해서 시행한 시험은 단순한 설득이 아니었었다.
“당신이 제가 만든 판을 얼마나 깨뜨릴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아주 만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하셨고요.”
“모두가 죽었다면?”
“뭐, 당신이 강해지겠죠. 그리고 제가 보여 주었던 힘들의 주인처럼 관리자한테 죽을 거고요.”
“왜…… 말하지 않았어? 왜?”
만약 사서가 말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행동을 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들 살아서 진하를 만나는 미래를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아, 진하 씨. 보통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행동하나요? 그저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것뿐이지 아무도 당신에게 미래를 알려 주지 않아요.”
“이건 미래가 아니잖아.”
“저는 당신이 미래를 바꾸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고요. 아, 참고로 잘하신 거 하나 있네요. 송하나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는 거. 어차피 틀린 정보였거든요.”
“하……!”
이제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만큼 짜증과 자괴감이 진하를 덮쳤다. 결국 그는 사서의 손에 놀아났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사서는 망연자실하는 진하를 향해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겨 그를 회복시켰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4개 중 3개의 미래를 바꿨어요. 개인적으론 3번째가 제일 인상 깊었죠. 솔직히 거기서부턴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계속 그렇게 있을 건가요? 그대로 있는다고 뭐가 바뀌진 않아요.”
사서의 말과 함께 흰 공간이 사라지고 원래 있던 공간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망연자실하고 있는 진하와 사서를 보며 혀를 찼다.
“쯧, 그러니까 적당히 하지 그랬냐. 애초에 자격을 가졌다지만 온전히 혼자 얻은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모든 걸 알려 주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그러는 할머니는 왜 그런 사람한테 자신의 문방구를 맡기고 회귀시킨 건데요?”
사서의 물음에 할머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애초에 문방구를 맡기려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관리자가 하는 꼴이 보기도 싫었고, 청승맞게 우연히 문방구를 지나간 진하가 보기도 싫었을 뿐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적어도 사실은 모두 알아야죠. 그리고 미래도 알려주고요.”
관리자에게 대항하겠다면 그에 맞춰 모든 걸 알려 주고 모든 걸 시험하는 게 사서였다. 적어도 그의 신념에는 그게 맞는 일이었다.
“너도 참 어렵게 사는구나. 그나저나 너는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냐?”
할머니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진하에게 말했다. 친구를 죽이고, 시험의 정체도 알고 패배도 겪고,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많았던 건 알았지만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하나만 물어볼 게 있어요.”
멍하니 있던 진하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할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어보거라.”
“왜 당신은 가만히 있는 거죠? 아니, 당신들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인 건가요?”
사서야 이방인이라서 그렇다고 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같은 관리자였고 신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녀가 나서줄 수 있는 거였다.
“흠, 글쎄? 나에게 인간은 그냥 안타까운 존재란다. 그리고 나도 사서처럼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 없는 존재고.”
“어째서요?”
“은퇴한 관리자는 힘이 딱히 없거든. 그리고 그럴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다. 억지로 하자면 못할 건 없지만 내가 굳이 소중하지도 않은 존재를 위해서 질 싸움에 나서고 싶지는 않거든.”
그녀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탁자 위에 놓은 차를 마시며 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왜 도와주는 거죠? 도와줄 이유도 질 싸움도 하기 싫다면서요.”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말 그대로다. 그냥 관리자가 싫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도와준 것뿐이다. 네가 내 눈에 띈 것도 있고.”
“진짜 당신들…… 싫네요.”
“그래서 그대로 계속 앉아 있을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