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송하나의 얘기를 들은 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모든 말을 끝낸 뒤 그저 가만히 진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쩌면 만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만약 만나지 않았다면 송하나가 이런 식으로 변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난…….”
“됐어. 감성팔이나 하려는 거 아니니까.”
송하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진하를 보며 말했다. 한 점의 후회도 없는 모습, 진하는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내 선택이야. 어느 시간선이었든 너를 선택한 내 선택이야. 그리고 그걸 모두 이어받아 여기서도 널 선택한 것도 나고.”
“…….”
“그러니 그런 말은 말고 어서 아티팩트나 빼고 어서 날 죽여,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그녀의 말에 진하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세 개의 반지를 스르륵 뺐다. 진하의 손에서 세 개의 반지가 빠지는 모습에 송하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하는 거야?”
“계약은 이루어졌어. 넌 10분 안에 모든 걸 말했어.”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진하가 뺀 반지 두 개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계약을 하기 위해 손가락에 끼운 반지였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아니었다. 그건 그녀와 예전에 나눴던 계약에 사용된 반지였다.
“뭐긴 계약이 종료됐다는 소리지.”
“그 계약에 종료는 없어.”
송하나를 도와주는 대신 모든 것이 그에게 종속된다. 그런 계약이었다. 그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않는 절대적인 약속이었다.
“계약은 상대가 끝났다고 인식하면 끝나는 거야. 그리고 난 계약이 끝났다고 생각해.”
더 이상 반지는 필요 없었다. 이 이후에도 반지를 유지하겠다는 건 그녀를 못 믿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못 하겠고.’
그녀의 진심을 모를 때에도 거리감을 두려는 게 잘되지 않았던 진하였다. 그리고 진심을 안 지금은 굳이 이런 아티팩트로 그녀와의 관계를 상하로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난 안 끝났어. 어차피 넌 나를 죽여야 끝나.”
“다음에 나오는 시험 상대가 누구야?”
“그건 나도 몰라.”
“거짓말.”
다음 시험의 내용과 상대를 모르는 게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리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죽이게 만들고, 그 원망은 한 사람에게 몰리게 만드는 것 자체가 다음 시험을 알아서였다.
“그리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알려 줄게. 우선 하나, 난 이런 식으로 소중한 사람을 죽인다고 익숙해지지 않아.”
분명 어떤 일이든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둘, 네가 이런 식으로 한다고 너를 증오하지 않아.”
예전에 그녀를 싫어했던 건 맞았다. 블랙 길드 출신에 서로를 보듬어 주던 상대를 죽이려던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를 죽였음에도 잊지 않을 만큼, 그 기억에 그녀를 멀리하려 했음에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이렇게 억지로 원망할 대상을 만들어도 그걸 선택할 일은 없었다.
‘어쩌면 이런 걸 애증이라고 해야 하나.’
죽을 만큼 싫은데도 또 그만큼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녀가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가득했다.
“미안하지만 너를 죽일 생각도 없고 내가 미칠 일도 없어.”
“그럼 시험은 통과 못 해.”
단호하게 말하는 송하나, 진하는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다시 계약하자. 나는 미치지 않는다. 너는 죽지 않는다.”
그 말과 함께 진하는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지 하나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웠다.
“계약 실패의 조건은 없음. 어때?”
“뭐 하는 짓이지?”
“뭐 하는 짓이긴, 보면 몰라? 계약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에 내가…….”
“넘어가 줘.”
진하가 송하나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삐뚤어진 집착을 한다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될 뿐이었다.
“정말 나를 사랑하고 집착하면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줘.”
“…….”
진하가 송하나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마주 보는 송하나의 눈은 조금씩 흔들려갔다.
“아니면 여기서 날 죽이든가.”
진하가 한 손에서 단검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죽이든가 통과시키든가 그녀에게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참고로 통과 안 시키고 내 시험도 실패하면 난 그대로 죽을 거야. 이것도 아티팩트로 제약 걸까?”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간선 넘어가면 어차피 그 아티팩트 제대로 작동 안 하잖아. 그리고 죽이라면서 스킬을 해제 안 하는 이유는 뭐야?”
“음…… 그냥?”
“비겁한 새끼. 그래 통과다.”
송하나의 말에 진하가 미소를 지었다.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그녀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친 새끼.”
“칭찬 고마워.”
진하는 송하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일어났다. 누군가 본다면 말도 안 된다고 말할 설득 방법이 성공해버렸다. 그만큼 서로가 절박했으니까. 그리고 미쳤으니까.
“후, 다음 시험 내용을 말해 줄게. 다음 시험 내용은…….”
“됐어.”
진하가 송하나의 입을 막았다. 어차피 진짜 어려운 거라면 지금 들어도 딱히 큰 의미는 없었다.
“그거 말해 주라고 사서가 너한테 정보를 준 것 같진 않거든.”
“그래도 들어.”
“응, 싫어.”
진하가 고개를 흔들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가 통과를 외친 지 대략 1분, 이때쯤이었지 아마?
“잘 들어. 다음 시험은…….”
갑자기 뒤바뀌는 시야. 진하는 뒤바뀐 환경에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 한번 칼 같네.”
진하는 빠르게 주변과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위치는 던전, 시간은 주변의 헌터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걸 보니 식사 시간, 차림은 협회제 방어구와 무기.
“하아, 다음 상대가 누군지 알겠네.”
* * *
‘여긴……?’
이신혜는 갑작스럽게 변한 공간에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랏빛 숲과 푸른 잔디, 그리고 식사를 준비하는 헌터들까지, 갑작스럽게 변한 공간에 이신혜는 황당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환상?’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협회 내 독실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공간이 변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보는 게 환상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협회에서 그럴 이유는 없었다. 정보를 원하는 거였다면 고문을 했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식사를 준비하거나 쉬고 있는 헌터들의 모습이 환상이라기엔 너무 현실성이 짙었다.
“큭!”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생소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이지만 그녀의 기억이 아닌 이상한 기억, 그리고 알 수 없는 생소한 정보들…….
잠시 후, 모든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정신이 맑아진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벌떡!
“뭐야? 왜 그래?”
“어디 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에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헌터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곧바로 진하에게 다가가 그대로 안았다.
휘익! 휙!
“와, 커플인 거 티 낸다!”
“우우, 커플 지옥 솔로 천국!”
지켜보던 헌터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야유를 보내며 소리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하를 꼬옥 껴안았다.
* * *
‘이신혜라…….’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이신혜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머리를 움켜잡고 있는 게 확실히 그녀가 맞았다.
‘이번에는 몇 가지 기억이 들어가려나…….’
진하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설득시킬지 고민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뒤에 3명은 그래도 진하에 대해서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갑작스런 기억과 정보는 분명 그녀를 두렵게 만들 테고, 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녀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게 뻔했다.
“어?”
그때, 그녀가 진하에게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 모습에 진하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렇게 바로 다가올 줄은 몰랐으니까.
‘나에 대한 판단이 됐나?’
살기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일단 아주 안 좋은 기억들이 주입된 건 아니라고 봐야 할 듯싶었다. 아마도 다가오는 이유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와락!
그 순간 진하를 안는 그녀. 진하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휘익! 휙!
“커플은 죽어라!”
“와, 낯뜨거워라! 아주 이불을 펴라 펴!”
그리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야유 소리, 진하는 재빠르게 자신을 안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갑자기 왜 그래?”
“보고 싶었어.”
“잠깐만, 혼란스러운 거 아는데 우리 잠깐만 떨어져서 얘기 좀 하자.”
진하가 다급히 그녀를 떨궜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난 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팀장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스윽―
진하의 수신호에 웃으며 엄지로 목을 긋는 팀장, 그 모습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헌터들이 소리를 듣지 못할 만한 곳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어디가! 식사는 뒷전이냐!”
“너무 멀리 나가지 마라! 그러다 몬스터 나올라.”
둘에게 킬킬대며 소리치는 헌터들. 진하는 그 소리를 모두 무시한 채 멀어졌고 둘이 멀어지자 헌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아…… 갑자기 왜 그래?”
어느 정도 멀어진 진하가 이신혜에게 물었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가 됐지만 갑자기 이러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좋아서. 우리 오랜만이잖아.”
“뭐…… 그렇긴 하지. 신혜야. 미안한데 혹시 기억 몇 개가 들어왔어? 나랑 관련된 기억은 몇 개고?”
“열 개, 너랑 관련된 건 여기 이곳의 기억이랑, 여기서 죽었던 시간선의 기억.”
그녀의 말에 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겼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다행히 그 두 개뿐이라면 적어도 진하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없는 듯했다.
“그, 혼란스럽겠지만 잘 들어줘. 지금 네가 어떤 상황이냐면…….”
“말 안 해도 알아.”
이신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기억과 정보가 들어오면서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다.”
진하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번 설득은 꽤나 쉬울지도 몰랐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면 그녀와도 다시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듯했다.
포옥.
“고마워.”
그녀가 갑작스레 다시 진하에게 안겼다. 있는 힘껏 진하를 안는 이신혜. 그 모습에 진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열 개의 기억, 그 모든 기억이 비슷하다면 그녀에게 지난 삶은 꽤나 고역이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죽고 싶었을 정도로…….
“나 부탁이 있어. 그거 하나만 들어줘.”
“뭐?”
“……나를 죽여줘.”
안긴 채로 나지막이 말하는 이신혜. 진하는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나를 죽여 줘. 그게 내 소원이야.”
“그게 뭔 개소리야!”
진하는 그녀를 떼어내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 보고 나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진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생기가 전혀 없이 죽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