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이곳으로 떨어지자마자 송하나가 가장 처음 느낀 건 혼란이었다. 알 수 없는 기억들에 점차 자신이 매몰되어 갔으니까.
―죽여! 죽여!
―진하 만나러 가자!
―복수해야 해!
갑작스런 정보와 수많은 기억들은 그녀를 괴롭혔고, 그녀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기억들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대부분의 기억을 통합하는 과정은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어디까지나 기억은 기억, 혼란스럽긴 했지만 어느 정도 정리는 가능했다. 하지만 진하에 대한 기억만은 달랐다.
―죽여!
―아냐, 사랑해야 해.
―아냐! 괴롭혀야 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기억은 유독 진하와 지독하게 얽혀있었고, 모든 기억마다 진하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달랐다.
그로 인해 송하나는 진하를 생각할 때면 수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느꼈고 그것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던 건 스킬을 얻은 보름 뒤였다.
<병렬사고: 수많은 정보를 통합하고 정리할 수 있다. 그 어떤 정보라도 빠르게 처리하고 그를 이용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스킬을 이용해 송하나는 진하에 대한 이질적인 기억들을 모아 인격 형태들로 만들었고 찍어 눌렀다. 덕분에 깨질 것 같이 난잡했던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기억과 정보를 통해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역할은 없어.’
아무리 정보를 정리하고 그녀에게 주입된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해 보고 시뮬레이션 돌려 보아도 다른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진하에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인간들과의 싸움이었다면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싸움은 몬스터와의 싸움, 어중간한 힘을 가진 단체를 가진 그녀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봐, 너희들 정말로 진하를 죽이고 싶어?”
―응! 죽여야 해.
―당연한 거 아냐?
“반대 놈들은?”
―진하를 살려야지!
―진하랑 이어지고 싶은데?
서로 상반되는 말을 하는 기억들, 송하나는 그 기억들을 얘기를 들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희들의 모든 소원을 이뤄 줄게. 아니, 정확히는 납득하게 도와줄게. 대신 내 말을 복종해.”
―정말? 죽일 수 있어?
―진하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어, 다 해 줄게. 대신 얌전히 나한테 완전히 통합되어 줘. 그리고 날 도와줘.”
그날 그녀는 기억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억들과 함께 하나둘 세력을 흡수했고 송준하와 접촉했다.
“미래를 알려 줄게. 나한테 협조해.”
“당신이 저한테 나타났다는 건 잡히고 싶다는 건가요?”
“잡을 거라면 마음대로 해. 다만 정말 안 들어도 되겠어?”
“……일단 들어보죠.”
일을 진행하는 건 손쉬웠다. 그녀에겐 수많은 정보와 미래의 지식이 있었고, 그녀와 의견을 나눌 인격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모든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고, 인격들의 뜻을 따라 진하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뭐, 약간 미친년처럼 보이게 되긴 했지만.
아무튼 약 100일간의 시간이 지나고 인격들은 대부분 통합되거나 완벽하게 그녀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서야 계획했던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 * *
“30분 남았나?”
바위에 앉은 진하는 시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이게 뭐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암살하는 시기를 아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매우 편안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날 미워하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는 건지.”
정말로 미워했다면 이런 식으로 공격을 준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아했다면 애초에 다음 시험으로 넘어가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둘 다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조차 잡히질 않았다.
[아! 아! 들려?]
그때 공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진하가 하늘을 둘러보자 작은 드론 하나가 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2시간, 딱 두 시간만 버텨. 그럼 끝이야.]
그 말을 끝으로 진하가 있던 땅 밑에서 커다란 빛이 솟아났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새빨갛게 변하는 공간, 그 속에서 뛰쳐나온 진하는 이를 갈았다.
‘젠장!’
조금이라도 스킬을 늦게 발동했으면 그대로 매장당할 뻔했다. 설마 이런 오지에 폭탄을 심어 놓았을 줄이야…….
피잉―
그 순간 진하의 귓가에 들리는 작은 소리, 진하는 재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수많은 화살들이 지나갔다.
콰직, 콰직! 치이익―
‘이런 미친…….’
나무를 뚫고 지나가는 화살들을 보며 진하가 속으로 소리쳤다. 저렇게 손쉽게 나무를 뚫고 나간다는 건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화살이란 소리였다. 거기다 녹아내리는 것까지 보면 독이 묻은 듯했다.
“아예 작정을 했구먼.”
이 두 가지만으로도 기존의 암살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예전의 암살이 진하를 그저 다치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2시간이랬지? 까짓거 버텨 주지.”
진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백린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 * *
“타켓 A 지점으로 이동합니다.”
“A 지역 준비한 함정 발동합니다. C 지역으로 몰이하겠습니다.”
“타겟 마모도 10%, 예상 수치보다 낮습니다. 무기 타입 B에서 A로 변경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기계를 조작했다. 그들이 보는 화면에는 공격을 피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진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얘기를 주고받는 공간의 중앙에는 송하나가 의자에 앉아, 진하가 도망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네. C 지역 가면 무기 타입 A랑 B 모두 사용해.”
“네!”
그녀의 명령에 부하 한 명이 대답하며 재빠르게 그녀의 명령을 하달했다.
“저기…….”
“뭐지?”
송하나는 옆에서 같이 앉아 지켜보는 송준하에게 물었다. 송준하는 그녀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걸 하는 겁니까?”
“이런 거라…… 이게 왜?”
그녀의 물음에 송준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하 한 명을 잡기 위해 팀까지 꾸린 이 모습을 정상으로 보긴 어려웠다.
“애초에 진짜 죽일 마음이 있으신 겁니까?”
“조금은?”
송준하는 그녀가 이런 짓을 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이권들을 다른 세력들에게 넘겨주면서까지 한다는 게 고작 사람 한 명을 공격하는 거라니…….
‘거기다가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고.’
조금만 이곳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진하를 죽일 듯이 공격하긴 했지만 진짜로 치명적인 공격은 없었다. 그저 다양한 공격을 하며 진하를 몰아붙이기만 할 뿐 진짜로 죽이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 공격 겹쳐, 1분 딜레이해서 공격해.”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같이 공격하면 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폭격인데도 시간차를 두고 공격하고 있었다. 준비한 무기들 자체는 수많은 곳에서 긁어모았으면서 정작 쓰는 건 비효율적으로 쓰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신경 쓰여?”
“예.”
송하나의 질문에 송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간단해 그냥 훈련 시키는 거야.”
“훈련이요?”
“어,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거지.”
미래에 그녀가 진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현재라면 아직 진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 있긴 했다.
‘너무 약해.’
이기수한테 들은 진하의 수준은 너무 애매했다. SS급을 약하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이기수에게 들은 말이 진짜라면 SS급으로도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하는 지금의 힘조차 제대로 끝까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해도 경험이 적으면 의미가 없어.”
그녀의 기억에서 진하는 한 번도 강한 힘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가 성장하는 속도 또한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랐다.
“모습을 보아하니 하예진이 뭘 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부족해.”
익숙하게 움직이는 게 그녀가 들었던 것보단 잘 움직이긴 했다. 나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훈련보단 죽음이 다가올 정도의 시련이었다.
“근데 그걸 굳이 왜 여기서…….”
“여기서밖에 할 수 없거든.”
송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있는 곳에선 절대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언제 게이트가 폭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훈련 따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가 알고 하는 훈련은 실전에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런 공간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오직 여기만 되지.’
그녀가 진하에게 갑으로서 행세할 수 있는 이 공간에서만 이런 훈련이 가능했다. 실제와 같은 느낌을 주면서 원래 있던 곳보다 쉽게 준비를 할 수 있는 건 이곳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누가 친절하게 알려줬거든.”
“네?”
“그런 게 있어.”
그녀는 송준하에 물음에 대충 대답했다. 설명하기 어려울뿐더러 딱히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은 관계없으니까 날뛰어.
그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머릿속에 심어진 정보 중 하나였다. 시간이 관계없다는 건 이기수한테도 듣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하가 이기수한테 말해 준 정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기수와 달리 머릿속에 정보가 전해졌다. 거기다 날뛰라는 말은 그녀에게 원하는 것들이 있다는 거였다.
‘아마도 나한테 이런 걸 원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신적인 존재가 굳이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을 한 번 더 상기시켜 줄 리 없을 테니까. 확실히 지금 이 짓은 그녀를 제외하곤 아무도 할 수 없는 짓이긴 했다.
“타겟 마모도 60%, E 타입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E 타입 독을 중화시키는 독을 공기 중에 퍼뜨려. 그리고 강도 좀 더 올려.”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 겨우 60%였다. 진하에게 사선을 넘는 경험을 주려면 좀 더 강하게 몰아붙여야 했다.
“저기…… 괜찮으십니까?”
“뭐가?”
“사실 미움받고 싶지 않잖아요.”
송준하의 말에 송하나의 고개가 그에게 돌아갔다. 송준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쓰게 웃었다.
“저는 당신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몰라요.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아마도 저와 같은 존재는 아니겠죠. 여러 차원을 넘나든다고 했으니까.”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와 다른 존재. 신적인 존재와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송준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러 차원을 넘나들 수 없을 테니까.
“당신이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협박했을 땐 조금 억울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갑자기 이상한 존재가 나타나서 미래의 정보를 줄 테니까 협조해라. 아니면 정보도 없고 이곳을 모조리 망쳐버리겠다는데 억울하지 않을 리 있습니까?”
그녀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송준하에게는 아니었다. 완전히 불합리한 조건이고 행동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어느 정도 선을 지켜가며 협조를 구했기에 군말 없이 따랐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준 정보는 협조한 것에 비하면 이득이 되는 정보들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송하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송준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오래 보다 보니까 당신들도 우리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이 김진하 씨에게 저러는 이유는 분명 그를 위해서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복잡하고 귀찮게 일을 행할 리 없었다. 이건 정말 강한 애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아니, 어떤 면에선 집착과도 같은 일이었다.
“근데 왜 굳이 그렇게 행동하세요? 다른 방법도 있잖아요. 그리고 미움받고 싶지 않을 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닥치고 있어.”
송하나는 송준하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