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다음 날 아침,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진하를 보며 이기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너 요즘 연애하냐?”
“뭐?”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는 손가락으로 진하의 셔츠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왼쪽 목 카라 근처에 아주 옅게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하아, 미친…….’
진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셔츠를 바라봤다. 아침에 가기 전에 갑자기 껴안길래 뭔가 싶었는데 이런 짓을 해 놓을 줄이야…….
“아니, 내가 연애하겠냐?”
“그럼 그건 뭔데?”
“살인 예고?”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하는 이기수의 의문 어린 시선을 무시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이기수가 자신의 의자를 밀어 진하에게 가까이 붙이며 물었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뭔데? 응?”
“하아, 말 그대로다.”
“진짜 아무것도 없어? 아님 어디 룸살롱이라도 간 거야?”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가자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기수는 자신의 장난이 심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뭘 물어보고 싶은 건지 알잖아.”
“하아…… 그래, 마침 잘됐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진하가 의자를 돌려 이기수와 마주 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의 손이라도 빌릴 필요가 있었다.
“뭔데?”
“잘 들어봐. 한 여자가 있어.”
진하가 천천히 운을 뗐다. 그 순간 각자 일을 하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진하에게 쏠렸다.
“야! 연애 얘기다!”
“진하가 연애 고민이 있단다!”
“근처 수색해서 폭발물 있는지부터 확인해라!”
“폭발물 없음! 암살 장치도 없어! 다가가도 돼!”
순식간에 몰려드는 동료들, 그 모습에 진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아니, 이 미친것들이 평소에는 다가오지도 않더니…….”
“지금은 안전하지 않냐. 뭔데 빨리 말해 봐.”
가장 강한 헌터들이 진하 근처를 감싸고 조금이라도 약한 헌터들은 부서 문을 닫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습격이나 폭발에 대비해 멀리 떨어져서 진하에게 귀를 기울였다.
“하, 이 미친놈들…….”
진하는 철저하게 암살이나 습격, 폭발 등에 대비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료들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쉰 뒤에 입을 열었다.
“일단 간략하게 말하면 한 여자가 있는데 나한테 너무 극과 극으로 대해, 근데 나보고 그 이유를 찾으래.”
“츤데레야?”
“뭘 어떻게 대하는데?”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쏟아지는 질문에 진하는 잠시 동료들의 입을 막은 뒤 지금까지 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물론 실제로 암살했다는 내용이나 중요한 내용은 빼고 적당히 각색해서 동료들에게 전했다.
“흠, 평소엔 너한테 죽일 듯이 행동하고 욕하는데 가끔씩 엄청 잘해 준다라…….”
“그거 이중인격 아냐? 아니면 미친 것 같은데?”
“아냐, 진하가 들이대는 걸 칼같이 거부했다니까 복수 아닐까?”
“그런 여자 오히려 좋아!”
별별 말들을 주고받는 동료들, 진하는 그런 동료들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복수는 일부 있긴 한데 그게 다가 아니래. 자신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찾으라던데?”
“근데 그걸 네가 굳이 찾아야 해? 그냥 신고하면 안 돼?”
누군가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 다른 동료들도 그 말에 동감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하아, 신고할 수 있음 벌써 했지. 그냥 내가 어쩔 수 없이 꼭 알아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만 알아둬.”
시험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어 진하는 대충 넘어갔다. 그때 멀리서 듣고 있던 헌터들 중 여자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나 하나만 물어볼 게 있어.”
“뭔데?”
“결국엔 전 여친이 질척대는 거랑 비슷한 거잖아?”
“뭐…… 비슷하지.”
“근데 넌 왜 안 밀어냈어?”
그 말에 진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밀어내기는 오질라게 밀어냈는데 왜 안 밀어냈냐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그녀를 진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뭘 들었냐? 밀어냈다니까?”
“그 말이 아니라 지금 하는 얘기 들어보면 너 진짜 애매하게 행동하는 것 같은데?”
“내가? 어떤 게? 분명 싫다고 표현했거든?”
“근데 왜 잘해 줘? 왜 사적으로 만나?”
“아니, 찾아온 건 그쪽이고 공적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난다니까?”
진하의 말에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네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야. 내가 봐도 그 여자가 좀 이상하긴 해. 근데 네가 여지를 주는 감도 좀 있는데?”
“뭐가?”
“굳이 그 사람이 아니면 일 못 해? 그리고 사적인 거 포함해서 네가 충분히 칼같이 끊을 수 있잖아. 근데 최근까진 그러지 않았고, 그럼 아예 네가 대처를 잘했다고 보기에도 좀 그런데?”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진하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다. 최대한 공적으로 대했고 싫다는 표현도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건 진하의 문제라기보단 송하나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말했지? 다 들은 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여자가 조금 집착이 있는 거 같다고. 근데 아무리 집착이 있어도 보통은 그렇게까지 안 하거든? 네가 생각하기엔 그 여자가 정말 미친 사람 같아?”
“……아니.”
진하랑 관련된 것만 빼고는 오히려 냉철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진하로 인해 할 일을 못 하는 존재도 아니었고, 오히려 자기 할 일을 모두 잘하면서 행동하는 게 송하나였다.
물론 지금이야 여러 기억이 엉켜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적어도 진하가 아는 그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확실히 이유가 있는 거네. 그 여자가 미친놈처럼 보일 수밖에 없으면서 너한테 들이대는 이유, 그리고 뭔지는 몰라도 그거랑 관련돼서 너도 뭔가 애매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애매한 게 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너 애초에 겁나 각색했잖아.”
여자의 말에 진하가 순간 흠칫했다. 분명 자연스럽게 각색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 여자 미친 것 같은 거 아니랬지? 그럼 네가 보기엔 어떤데?”
“나랑 관련된 거 빼고 냉철하고 자기 할 거 다 하는 사람.”
“너랑 관련된 거 할 때도 물불 안 가리고 너한테 들이대?”
“아니, 할 거 다하면서 들이대지.”
“그럼 백퍼 네가 애매하게 행동했든가 아님 그냥 짝사랑 오지게 하든가 뭔 이유가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뭔데?”
“네가 알아서 찾아야지! 숨길 거 숨기고 각색할 거 각색했으면서 그걸 나한테 바라냐? 애초에 네가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냐.”
그녀의 말에 진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숨긴 거나 각색한 것도 많았고 송하나를 잘 아는 사람도 진하밖에 없었다.
“이참에 하나만 얘기하자. 너 평소에 겁나 애매하게 행동하는 거 하나 있거든?”
“나?”
“그래, 전 여친 못 잊으면 전 여친만 생각하든가. 썸이란 썸은 다 타고 안 사귀는 건 뭔 심보야?”
“내가?”
진하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단 말인가?
“진짜 몰라? 너 이 부서 신설되고 몇 명이랑 썸 탔던 거 다 알고 있었어.”
여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이기수 역시 진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깐만! 그건 내가…….”
“네가 뭐?”
입을 열려던 진하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진하가 한 행동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렇게 행동했으리라 예상되는 건 이 시간대의 김진하. 진하는 그 점이 억울했지만 뭐라 말은 하지 못했다.
“아냐…….”
“아무튼 넌 모든 게 애매해! 제대로 행동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부서를 나갔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야기가 끝났음을 느낀 헌터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아니, 나 억울한데…….”
“진하야 그냥 그러려니 해라.”
억울해하는 진하를 이기수가 토닥였다. 그 모습에 진하는 더욱 울컥했다.
“아니, 애초에 연애 상담도 너한테 했지, 다른 놈들은 지들이 직접 온 거잖아!”
“얘기한 건 너고.”
“……그건 그렇지.”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고민 상담이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진하가 애매하게 행동한 부분도 확실히 조금 있다는 것과 송하나가 확실히 뭔가 이유가 있어서 진하에게 행동을 한다는 거였다.
‘쯧, 이유가 있다 생각하면 기억에 완전히 잠식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애초에 그랬으면 암살도 애매하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미친년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건데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생각하자, 생각해.’
하예진 때도 비슷했다. 경우는 다르긴 했지만 그녀 역시 한 달이라는 시간을 조건으로 내건 이유가 분명 있었다. 그러니 그때처럼 이번엔 송하나의 이유를 생각해 내야 했다.
“야, 너 출장 명령 떨어졌다.”
이기수가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 진하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진하는 하던 고민을 멈추고 이기수를 바라봤다.
“출장? 내가? 아니, 애초에 우리 출장이라는 개념이 있었어?”
하는 거라곤 블랙 길드를 때려눕히고 염탐하는 게 다인 부서였다. 심지어 요즘은 블랙 길드가 급감해서 거의 없다시피 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출장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협회장 직속 명령인데? 너 강원도에 있는 연구소에 방문하래. 새로 개발한 아티팩트 가지러 가라던데?”
“아티팩트?”
진하가 곰곰이 과거를 되짚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하의 기억에는 그런 아티팩트 따위 개발된 적이 없었다.
‘시간선이 달라서 그런가?’
“아무튼 협회장이 너 올라오래.”
“근데 아티팩트를 가져오는데 그걸 내가 왜 가?”
SS급까지 이미 랭크를 찍어놓은 상태였다. 고작 아티팩트를 가지러 SS급인 진하가 갈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가 아티팩트와 관련된 부서 또한 협회 내에 따로 존재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일단 올라가 봐. 중요한 일이겠지.”
“뭐지?”
진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가 이번 시간선은 뭔가 비슷하면서도 꽤 꼬인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잘 다녀와.”
“안 갈 거야. 거부하고 올 거니까.”
이기수가 손을 흔들며 배웅하자 진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곧바로 협회장실을 향해 올라갔다. 협회장실에 도착하니 비서가 가볍게 인사를 하며 진하를 맞이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진하의 대답에 비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협회장실 문을 노크했다.
“협회장님, 김진하 헌터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송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서는 곧바로 몸을 돌려 진하를 바라봤다.
“들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감사해요.”
진하는 비서에게 미소로 화답하고는 협회장실의 문을 붙잡았다.
철컥!
문이 열리고 들어선 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송준하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계약상 협회장님이 제 직속상관이긴 하잖아요. 근데 출장이란 건 뭐죠?”
진하의 물음에 송준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한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진하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그가 시선을 돌린 쪽을 바라보았다.
“안녕?”
그곳 보인 것은 커피를 마시며 손을 흔드는 송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