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날?”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확실히 진하를 찾은 게 맞았다.
“그럴 리 없는데?”
진하는 의아한 듯 말했다. 이 시간선에서 진하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같은 부서의 동료들과 몇몇 헌터뿐이었다. 그리고 진하가 알기론 대낮부터 진하를 찾을 사람은 딱히 없었고 이기수가 그 친구들을 모조리 아니 이런 말을 할 리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웬 여자던데? 야! 어디 가!”
진하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부서를 빠져나와 협회의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한 진하는 출입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송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야, 여기!”
손을 흔들며 외치는 송하나. 진하는 뻔뻔한 그녀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뭐긴 점심 가져다주는 거지.”
송하나는 그 말과 함께 손에 든 커다란 도시락을 보여주었다. 진하는 그녀의 모습에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지금 장난쳐? 암살하겠다고 말하고 실행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뭐 하는 거야.”
진하가 송하나에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질이 나쁜 장난이었다.
“왜? 문제 있어? 암살은 암살이고 이렇게 하는 건 내 맘이지.”
“하, 좋아. 그럼 내가 지금 널 잡아서 가둬도 되는 거지?”
반년간 암살만 막으면 됐으니 그녀를 가두기만 해도 내기는 성립되는 거였다.
“아니? 당연히 안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송하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진하는 소리를 치려다가 주변에 사람이 많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뭐 하자는 건데.”
“연인 놀이?”
송하나가 도시락을 흔들며 말했다. 진하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녀가 그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뭐, 바쁜 것도 끝났고 앞으로 종종 찾아오려고.”
“이 도시락에 독이라도 넣었어?”
“넣었겠냐? 아무튼 받아.”
그 말과 함께 도시락을 안겨주는 송하나. 그녀는 도시락을 넘긴 후에 진하에게 말했다.
“참고로 다 안 먹으면 오늘 밤에 암살자 보낸다?”
그 말과 함께 송하나는 손을 흔들곤 협회를 나갔다. 진하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뭔…….”
“야, 뭘 그리 빨리 뛰어가냐? 어라? 그건 뭐냐? 그러고 보니 아까 어떤 아가씨가 들고 있던데.”
뒤늦게 진하를 쫓아온 이기수가 진하가 들고 있는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 진하는 그런 이기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시락이다. 그것도 죽음을 듬뿍 담은 도시락.”
“뭔 개소리야?”
“있다, 그런 게.”
진하는 이기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1. 암살 시작 48일째, 협회의 숙직실에 테러가 일어났다.
2. 암살 시작 60일째 협회에서의 숙식이 거절되었다. SS급이 된 진하가 송준하를 찾아가 따졌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테러에서의 위협 배제였다.
3. 암살 시작 70일째 띄엄띄엄한 간격으로 송하나가 새로 구입한 집에 잠입하기 시작했다. 하는 것 없이 순순하게 잠만 자고 돌아간다.
4. 암살 시작 90일째 참다못한 진하가 협회에 협조를 구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어째서인지 협회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암살 시작 100일째, 진하의 집.
팡!
“와! 암살 시작 100일째를 축하합니다.”
진하는 앞에 놓인 케이크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송하나는 고깔모자를 쓴 채 웃으며 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진하는 송하나를 이제는 멍하니 바라봤다. 도대체가 뭘 원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암살이면 암살, 연인 행세면 연인 행세, 둘 중 하나를 하면 모를까 그녀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두 상황을 오가면서 진하를 괴롭히고 있었다.
‘쫓아낼 수도 없고…….’
웃긴 건 그녀를 쫓아내면 당일 날 암살자가 찾아온다는 거였다. 그것도 쉬지 않고 20분 간격으로 왔다.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그녀를 쫓아낼 때마다 오니 그녀를 내쫓을 수도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오는 날이면 암살은 더 이상 없었으니까.
“뭐 해? 케이크 안 먹어?”
송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진하는 멍하니 숟가락을 들어 케이크를 퍼먹었다. 매우 달았다.
“어때? 맛있어? 내가 직접 만든 건데.”
“달아.”
“그래서 맛은?”
“달아.”
진하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송하나는 그걸로도 만족하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크를 잘랐다.
“야, 하나만 물어보자.”
“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시험이라서 그동안 그냥 참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답을 듣고 넘어가야 했다. 도저히 남은 시간 동안 이 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자신이 없었다.
“너 미쳤어?”
짧게 내뱉어진 말, 그 말에 송하나가 들고 있던 칼을 스르륵 내려놓았다. 진하는 그녀가 그러든 말든 그동안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하, 그래 시험인 것도 알겠고, 내가 너를 설득시켜야 된다는 것도 알겠어. 근데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뭐가?”
“할 거면 하나만 하라고. 아니면 기억을 너무 많이 받아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거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송하나는 굳은 표정으로 진하를 바라보았다. 진하는 그녀의 표정에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똑같이 그녀를 노려봤다.
“후, 네가 원한다면 한 가지만 할게.”
담담히 말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하는 얼떨떨한 모습으로 송하나를 바라봤다. 설마 이렇게 쉽게 설득될 줄이야…….
“근데 일단 오늘까지는 내 맘대로 오케이?”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다시 케이크를 자신의 그릇으로 옮겼다. 진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자기 위해 방으로 들어선 진하는 오늘도 역시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송하나를 보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들어와라.”
“잘 자라.”
“내일도 오늘처럼 똑같이 할까?”
진하가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송하나는 그런 진하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진하는 재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송하나는 진하를 스윽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물었다.
“당장 끝내줄 테니까 내가 시키는 거 할래?”
“뭔데?”
“네가 계속 피하던 거.”
“응, 싫어. 그냥 습격받을게.”
진하가 송하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다른 거는 몰라도 그녀를 안으라는 제안은 죽어도 들어주기 싫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싫을까? 기억을 보면 내가 매력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기억 중에 내가 널 죽인 게 일곱 번이 넘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안는다고 바뀌는 것도 없잖아? 아님 날 죽였던 게 그렇게 꺼림칙해?”
“어.”
“왜? 난 나쁘지 않았는데?”
그녀의 말에 진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괜찮았다니…….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기억 중에 동일했다고 말한 시간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선이랑 다른 거 아냐?”
“아니,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선이랑 완벽하게 동일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
송하나의 대답에 진하는 어질해지는 걸 느꼈다. 아니, 애초에 도대체 그녀가 왜 이러는지도 감이 안 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미친 것 같았다.
“아까의 연장선상인데 혹시 진짜 미쳤어?”
“미친 것 같아?”
송하나가 진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 제대로 있는 초점까지, 아무리 봐도 미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내가 오락가락하는 게 그렇게 싫어?”
“어.”
“그럼 내가 싫은 이유는 뭐야?”
“너의 성향을 아니까.”
단호한 진하의 대답에 송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성향, 그녀 스스로도 정의 못 한 걸 진하가 안다니 약간 우스웠다.
“내 성향이 뭔데?”
“소유욕, 그리고 악함, 독기, 상처.”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니잖아. 네가 예전에 알던 기억 속의 나지. 지금의 나는 다르잖아.”
“아니,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지금 보니까 아니다. 넌 똑같아.”
진하는 확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송하나는 절대로 이 성향을 벗어날 리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바뀐 모습이 많이 보였으니까.
그런데 여러 기억들이 주입된 지금의 상태를 보면 아니었다. 그때는 모르지만 확실히 지금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미친 사람 같았다.
“흐음, 그런 말 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고.”
“그런 표정을 하면서?”
진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는 송하나를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상처받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뭐, 그건 넘어가고. 아무튼 그래서 싫다는 거야?”
“어, 싫어.”
“근데 왜 잘해 줘? 단순히 이용하려고? 그거라면 좋은 수단 있었잖아?”
송하나가 진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켰다. 정말로 그가 그녀를 이용하려 했다면 더 좋은 수단은 많았다. 실제로도 그녀가 가진 기억 중에는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한 진하의 행동도 몇 개 있었다.
“그건 내가 그냥 하기 싫었을 뿐이야.”
“그럼 이왕 싫은 김에 나도 그냥 받아들이면 안 돼?”
“안 돼.”
진하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아무리 송하나가 이야기를 도돌이표처럼 돌려서 같은 말을 해도 진하의 대답은 단 하나였다.
“그럼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가져와.”
“굳이 그래야 돼?”
“응, 그리고 실제로 너랑 나는 사랑했던 건 맞잖아?”
“하아,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진하는 더 이상 얘기하는 걸 포기했다. 이렇게 얘기하다간 끝이 없었다. 그리고 뭘 얘기하든 분명 다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겠지.
“그럼 나도 설득당하기 싫은데?”
송하나의 말에 진하가 그녀를 노려봤다. 협박에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아무리 진하가 철저히 을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장난이야,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그런 장난은 치지도 마.”
“대신 좋은 정보 하나 알려줄게.”
“좋은 거?”
진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하에게 좋은 정보라 해 봤자 거의 다 미래에 대한 정보였다. 그리고 그걸 진하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송하나가 말하는 좋은 정보는 성립하기 힘들었다.
“응, 아주 좋은 거. 대충 다음 시험을 쉽게 통과하는 법?”
“그걸 네가 안다고?”
“뭐, 조금? 그래서 들을 거야?”
진하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에 송하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신 내기 내용을 좀 바꾸자고.”
그녀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려준다고 해놓고 갑자기 내용을 바꾸자니, 이건 좀 아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간단한 거야. 앞으로 너에 대한 암살 시도를 극도로 줄일 거라는 얘기야. 대충 2~3번?”
“그럼 추가될 건? 뭐가 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겠지?”
“당연하지. 추가될 건 단순히 암살에서 버티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유를 찾을 것.”
“그거야 옛날 기억 중에 내가 널 죽인 게…….”
“땡! 그거 아니야.”
송하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명 표면적 이유는 그게 맞긴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남은 80일 동안 잘 찾아봐.”
“실패하면? 아니, 거절할 수는 있나?”
“실패야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그리고 거절은 당연히 안 되는 거 알지?”
그 말과 함께 송하나가 짓궂은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펄럭이며 말했다.
“아님 이쪽으로 변경한다면 바꿔줄 의향은 있는데?”
“선택권은 없다는 소리네.”
“그럼 네가 갑을 하든가.”
“하아……. 대신 더 이상 변경하기 없어. 그리고 내가 실패하더라도 다른 걸로 기회를 줘.”
“오케이, 그 정돈 쉽지.”
가볍게 승낙하는 그녀의 말에 진하는 두통이 이는 걸 느꼈다. 남은 시간 80일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문제를 그녀가 출제해 버렸다.
“아, 참고로 앞으로 암살은 진짜로 조심해? 진짜 죽일 듯이 덤빌 거니까.”
그녀가 진하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