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상관없는 사람을 죽였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돈으로 매수하고 죽인 뒤 놀리듯 행동했다. 그건 진하가 알고 있는 송하나와 많이 멀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러 기억들을 이식받으니까 완전히 맛이라도 간 거야?”
[글쎄? 뭐 맛이 간 걸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래 봐도 소용없어.”
진하와 그녀 사이엔 아티팩트로 계약이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결국 그녀가 진하를 죽이는 일은 있을 리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널 공격했는데도?]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가능했지. 애초에 저격총도 나한테 소용없다는 건 너도 당연히 알고 있었잖아.”
아무리 저격총이 화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결국 일반 화기였다. 진하를 죽이려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근데 왜 되돌아가려 했어?]
“순간 너랑 내 계약 내용을 잊었었거든.”
하예진과 있던 세상에서 한 달, 그리고 이곳에서 한 달을 보냈다. 그 덕분에 송하나와 했던 계약을 잠시 까먹고 말았지만 저격총을 맞는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절대로 못 죽여.’
그렇지 않았다면 저격총을 쓸 리 없었다. 물론 설득과 죽이는 것은 별개긴 했지만 일단은 적어도 그녀가 그를 죽일 일은 없었다.
[흐음……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저격총은 그냥 인사일 뿐이었어.]
“그래서? 날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아마도? 뭐 나도 조금 피해를 입긴 하겠지만 아마 될걸?]
태연스러운 목소리에 진하는 살짝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적었다.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왜 잠수를 탔다고 생각해?]
“글쎄? 내가 그걸 알아야 되나?”
[알아야 할걸?]
피익!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진하가 재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전화를 받기 위해 닫았던 문에서 튀어나온 가시였다.
‘트랩.’
진하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급 낮은 인챈트 함정이었지만 저격총과 달리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어 충분히 진하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계약상이라면 벌써 그녀에게 어느 정도 제약이 갔어야 했다.
[짜잔! 어때? 이제야 내 말을 믿겠어?]
변함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그녀의 말에 진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며 물었다.
“어떻게 우회한 거지?”
[생각보단 간단하더라고. 여기가 다른 세계라는 점이랑 내가 네가 알던 송하나가 아니라는 게 컸어.]
“내가 알던 송하나가 아니라고?”
[그래, 그거 알아? 난 송하나지만 다른 송하나의 기억을 이어받았어. 모두 다른 송하나지. 그럼 그 기억을 이어받아 영혼 자체가 완전히 바뀐 나는 네가 알던 송하나일까?]
진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히 지금의 그녀는 그가 알던 송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억을 받은 거지 다른 세계선의 영혼을 받은 게 아니었다.
다른 영혼을 받은 거라면 그녀의 말이 맞겠지만 단순히 기억을 받은 거라면 그녀의 말은 성립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나도 너랑 똑같은 생각을 했었거든. 근데 기억이란 게 어쩔 수 없이 영혼의 찌꺼기가 따라오더라고.]
“그걸로 인해 바뀌었다고 말하는 거냐.”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 번 확인해 보니까. 꽤 많은 기억이 들어온 덕에 아주 조금이지만 내가 내가 아니더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을 모두 피할 순 없을 텐데?”
고작 영혼이 조금 바뀌었다고 달라질 거였으면 아티팩트의 계약이 절대적일 리 없었다. 영혼에 상처를 주는 아티팩트는 조금이지만 분명 있었고, 그걸로 인해 상처를 입으면 송하나의 말처럼 기존의 영혼과 달라질 텐데 그런 경우에도 아티팩트에 의한 계약은 이루어진다.
즉, 그녀의 말이 성립될 리 없었다.
[네 말이 맞아. 아무리 내가 다른 내가 됐다 하더라도 99% 이상은 내가 맞으니까. 근데 여긴 우리 세계가 아니잖아?]
“우리 세계?”
[그래, 너에 의해 초대받은 세상인 거지. 그 덕인지 아티팩트 자체가 많이 힘을 잃더라고.]
송하나의 말에 진하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 부분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명제였다. 설마 시간선이 다르다고 효능이 낮아진다니…….
“그래서 날 죽일 건가?”
[뭐, 그럴까 고민 중?]
“고민?”
[응, 사실 아무리 네가 싫다지만 이번 삶에서 네가 잘해 준 게 있잖아? 뭐 날 죽였지만 애증도 있고.]
“그래서?”
[내 거가 될 생각 없어? 그러면 설득당해 줄게.]
욕망 어린 송하나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것이 되라는 말, 회귀 전의 송하나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네 소유물이 아냐. 날 가지고 그런 건 없어.”
[역시 똑같은 말을 하네.]
진하가 거절을 표했건만 이미 예상했는지 그녀의 음성에는 아쉬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리 간단하게 가자. 평생 여기 있을 건 아니잖아?]
“말해 봐.”
[지금부터 6개월간 난 너를 암살할 거야. 너는 그 암살에서 살아나면 돼.]
“그러면 넘어가겠다는 거야?”
[응, 어때 쉽지?]
그녀의 말에 진하는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쉬웠다. 아니, 너무 쉬워서 문제였다. 암살을 피하는 방법이야 넘치고 넘쳤고, 그렇게 할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송하나도 그걸 알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이런 제안을 했다는 건 자신감이 넘치든가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였다.
[자, 그럼 시작이야.]
콰앙!
그 말과 동시에 전화부스가 폭발했다. 잠시 후 폭발을 뚫고 전화부스를 나온 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반년, 시작이었다.
* * *
“흐음, 나쁘지 않네.”
CCTV로 진하의 모습을 확인한 송하나가 빙긋 웃었다. 인사차 보낸 폭탄이라지만 이렇게 생채기가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다.
“뭐, 그러니까 가지고 싶은 거지만.”
지난 20개의 삶에서 그녀는 빠짐없이 진하와 만났다. 어떨 때는 적으로, 어떨 땐 연인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그와 만난 삶에선 항상 그와 헤어졌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소유욕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지금 삶에서의 송하나 역시 진하를 가지고 싶다는 점은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그녀는 다른 송하나처럼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점.
‘그러기 위해선 우선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것들부터 처리해야지.’
이것들을 처리할 준비를 마치기 위해 지난 한 달을 투자했다. 우선 계속해서 주 자아를 침범하려는 기억들을 협박하거나 협상하여 찍어 눌렀으며 없앨 계획을 짰다.
그 덕에 앞으로 반년간 기억들에게서 유예를 얻어낼 수 있었고, 반년간의 계획을 대략적이지만 짤 수 있었다.
―죽여! 죽여!
―잡아서 키우자, 어때?
―하아…… 보고 싶다.
그 순간 또다시 그녀의 생각을 뚫고 올라오는 생각들, 송하나는 빈틈을 보이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들에게 짜증을 냈다.
“다들 닥쳐!”
―칫, 아주 지 맘대로야.
―진하는 내 거야.
그녀의 외침에 토를 달며 사라지는 기억들, 겨우 다시 기억들을 내리찍은 송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진짜 실패하면 그냥 흡수되는 거다?”
―오케이
―걱정 마.
송하나의 말에 진하를 적대시하는 기억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 역시 안되는 걸 가지고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들 역시 송하나였으니까.
똑똑.
“들어와.”
송하나의 명령에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남자는 송하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하신 것 모두 준비했습니다.”
“그래? 곧 갈게.”
그녀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으며 나갔다. 송하나는 남자가 완전히 방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이번 계획 주도한 기억 누구였어.”
―나야.
“계획 틀 이야기해 봐.”
송하나의 말에 또 다른 송하나의 기억이 스르륵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송하나는 자신에게 수많은 기억들이 들어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허무하게 날릴 뻔했어.’
기억들이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그녀가 스킬을 각성했다는 것이고, 정보 길드의 온갖 비리와 약점들을 알고 있다는 거였다.
덕분에 정보 길드를 손쉽게 장악해 나갈 수 있었으며 진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은 채 이렇게 그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중 절반이 적대적인 바람에 반년의 시간 중 대다수를 그를 죽이는 데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뭐,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재밌을 테니까 상관없나?”
그녀가 아는 김진하라면 그녀의 습격쯤은 막아내야 했다. 그럴 만한 남자였고 그래야 그녀가 가질 만한 가치를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낼름!
“흠, 기다려지네. 다음 만남이.”
송하나가 입술을 핥으며 장난 어린 눈빛으로 CCTV 속에서 아직 비추는 진하를 바라봤다.
* * *
“하아…….”
“왜 그래?”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는 진하를 보며 물었다. 안 그래도 어제도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에 두 배 정도 되는 수준의 안색이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일이 해결 안 됐어?”
이기수의 물음에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고민하던 문제는 해결되기는 했다. 다만 그 해결된 방향이 그리 좋은 게 아니어서 문제일 뿐.
‘아니, 좋은 거긴 하나?’
어찌 보면 단순하니 좋다면 좋을 순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로 좋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난 한 달간 아무것도 모를 때보단 낫긴 했다.
“일은 해결됐으니까 걱정하지 마.”
진하는 걱정하는 이기수를 다독이곤 음료를 뽑기 위해 자판기로 다가갔다. 동전을 넣은 진하는 눈앞에 보이는 커피 버튼을 자연스레 눌렀다. 그리고.
피잉―
덥썩!
“이런 미친…….”
날아온 침을 붙잡은 진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협회 내 자판기를 눌렀더니 암기가 날아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무의식적으로 붙잡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암기야 다행히 아티팩트가 아니라 상처가 크게 나진 않겠지만 독이 발라져 있어 자칫 잘못했다가 오늘 하루를 불편하게 다닐 뻔했다.
“미친, 이게 뭐야!”
이기수 역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암기에 놀라 소리쳤다. 설마 협회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현 상태에서 협회에 대항한다는 것은 죽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하, 벌써부터 시작인가?”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 시작이라곤 들었지만 설마 벌써부터 준비를 할 줄이야…….
‘이래선 집에도 못 들어가겠군.’
진하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몰랐다. 폭탄을 설치했을 수도 있고 암살자를 보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아, 기수야.”
“왜?”
“나 등급심사 좀 다시 본다고 좀 협회장한테 말해라.”
아무래도 등급을 갖춰 놔야 할 듯싶었다. 그래야 최소한의 방비라도 하지…….
“아, 그리고 협회 숙직실 있지?”
“어, 있어. 왜?”
“아니, 한동안 거기서 지내야 할 것 같거든.”
진하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반년간 꽤나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한 달 후, 진하는 퀭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변으로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완전 말려 죽이네.’
어떤 식으로든 공격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한 달간 진하를 습격한 횟수만 약 60회, 거의 하루에 두 번꼴로 습격을 당한 셈이었다.
사실 습격 자체는 크게 상처 입을 만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게 아예 무시할 정도는 아니어서 신경을 슬슬 긁는다는 점이 짜증 났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주변 인물이었다.
‘이래선 완전 아싸구먼.’
진하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이루어지는 습격으로 인해 그에게 다가오는 동료들이 한 명 빼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당연하게도 이기수였고.
“진하야.”
이기수가 그를 부르며 부서로 들어왔다. 진하는 생각하자마자 나타나는 이기수를 보며 저놈도 양반은 못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부른 이기수를 쳐다봤다.
“야, 누가 너 찾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