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일주일 후, 자취방에 마주 보고 앉은 진하와 하예진은 서로 빙긋 웃고 있었다.
“재밌었지?”
“응, 재밌었어.”
그녀의 말대로 지난 일주일간 진하와 하예진은 정말 원 없이 놀았었다. 어릴 적 이후로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동물원도 가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공원을 걷기도 했다.
또, 즉흥적으로 바다를 보러 당일치기를 하기도 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드러누워 있기만도 했다. 정말로 모든 걸 잊고 딱 노는 것만 생각했었다.
“아쉽네.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럼 하루 이틀 더 있을까?”
진하의 말에 하예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욕심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3주간 훈련을 하고 일주일간 휴식을 했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 이상은 그저 회피만 하는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욕심이 생길 것 같아.’
하루, 이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늘려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늘릴 수 있는 한 최대로 기간을 늘릴 것 같았다. 그렇게 하는 건 피해를 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추한 모습을 진하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난 이걸로도 충분히 만족해. 덕분에 즐거웠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 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수십 개 물어봐도 돼.”
“이 시험이 끝나고 내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야? 완전히 잊는 거야? 아니면 다 기억하는 거야?”
“글쎄…….”
그건 진하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사서가 그런 것까진 설명해 주진 않았으니까. 가장 베스트는 모든 기억을 가지고 원래 장소로 돌아가는 거고 가장 안 좋은 것은 모든 걸 잊는 거였다.
‘딱 시험에 관한 기억이라도 남으면 좋을 텐데.’
다른 시간선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돌아가는 건 솔직히 진하도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시험 기간 동안 지냈던 기억만은 가지고 돌아갔으면 했다.
그래야 이 기간 동안이 하예진에게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진하 역시 이 시간을 같이 기억하고 싶었다.
“모두 기억했으면 좋겠다.”
하예진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진하는 하예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분명…….”
그 순간 바뀌는 풍경. 갑작스럽게 변하는 시야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예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하게 됐으니까.
“뭐 해? 안 갈 거야?”
누군가 진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진하가 옆을 보니 이기수가 진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뭔 소리야. 내가 여기에 있지 그럼 다른 곳에 있겠냐?”
“아니, 넌 시험을 이미 봤잖아.”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진하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데…… 너 혹시 어제 한 대 맞은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 아니지?”
“어?”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 그랬잖아. 아무리 C, D급만 있는 블랙 길드 없애러 가는 거라지만 왜 방심을 해서 한 방을 맞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그제야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깨달았다. 협회 내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그것도 블랙 길드를 전담하는 헌터들이 모인 임시 부서의 휴게실.
“흠, 분명 어제 멀쩡하다고 병원에서 그랬는데…… 한 번 더 병원에 가 볼래?”
“어? 아냐. 내가 뭐 좀 착각했나 보다.”
이기수의 물음에 진하가 빠르게 대답했다. 괜히 여기서 오해를 받아서 좋을 건 없었다.
“진짜 괜찮아?”
“어,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 마. 그냥 내가 어제 꿈에서 봤던 거랑 헷갈렸던 것 같아.”
“꿈? 너 설마 졸았냐?”
“어…… 요즘 많이 피곤한가.”
“어쩐지 너 요즘 무리하는 것 같긴 하더라. 어차피 오늘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일찍 퇴근해라.”
“어, 그래야겠다. 나 먼저 일어난다?”
진하는 빠르게 일어나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휴게실을 빠져나온 진하는 곧바로 아무도 없는 공간을 찾아 들어간 후 한숨을 내쉬었다.
“후…… 뭐지?”
일단 시기는 블랙 길드를 잡던 시기였던 것 같았다. 이기수도 있었고 협회에 블랙 길드 전담부서가 있는 거로 보아 확실했다. 애초에 블랙 길드 전담부서는 임시로 만들어졌던 거였으니까.
“설득할 대상이 누구지…….”
앞선 두 번과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시작하자마자 공략대라는 곳에서 같이 있었던 이기수나 하예진과는 달리 협회에서 시작해서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이기수는 절대 아니고…….”
이미 설득된 사람을 다시 보냈을 리 없었다. 물론 나간 후 모든 걸 잊은 상태가 되고 다른 전생의 기억들을 주입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아무리 다른 기억을 받더라도 진하가 있던 원래의 시간 선의 기억은 무조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기수의 성격상 그런 기억이 있는데 진하에게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라는 건데…….”
짚이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시간대를 고려해서 설득해야 할 사람을 추려내 보면 대표적으로 송준하와 송하나 있었다. 그리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회귀 전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진하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해 보았다.
<협회 비서실.>
“비서실?”
웬만하면 비서실에서 전화할 일이 없을 텐데…….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협회 비서실 이지하입니다.>
“네, 무슨 일이죠?”
<협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혹시 바로 올라오실 수 있으신가요?>
진하는 그녀의 말에 이번 대상이 송준하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송준하가 진하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고작 B급 헌터를 갑자기 보자고 하는 건 이상하지.’
거기다 타이밍도 진하가 이 시간선으로 오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송준하가 설득의 대상이었다.
<안 되시는 건가요?>
“아뇨, 바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빠르게 대답한 진하가 핸드폰을 끊었다. 그리고 빠르게 협회장실로 이동했다. 협회장실로 가는 길은 진하가 알고 있는 것과 딱히 다르지는 않았다.
시간선이 다르면 미묘하게 또는 조금 많이 구조물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기에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도 이곳 협회는 그리 변화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 빠르게 오셨네요.”
협회장실에 도착하자 프론트에 있던 비서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진하를 바라봤다. 이곳은 협회의 장이 있는 곳이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오는 길이 좀 꼬여 있었다.
그래서 보통 협회장님을 자주 보러 오는 게 아니라면 헤매기 일쑤일 텐데 진하는 전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빠르게 협회장실에 도착했다.
“뭐, 제가 조금 길을 잘 기억해서요.”
진하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무덤덤한 진하의 모습에 잠시 놀랐던 비서는 이내 표정을 바로 하고 진하를 협회장실로 안내했다.
똑똑!
“협회장님. 부르셨던 김진하 헌터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주세요.]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비서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진하는 문을 열어준 비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송준하의 성격을 보여 주듯 매우 단촐하고 깔끔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볕이 잘 드는 위치에 있는 책상에는 서류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려 주시겠어요? 이것만 처리하면 됩니다.”
‘어라? 송준하가 아닌가?’
송준하의 정중한 말에 진하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기억을 가진 존재라면 이렇게 행동할 리 없었다.
“예.”
진하가 조용히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서류를 빠르게 검토하는 송준하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진짜 아닌가?’
시기상으로는 송준하가 맞았다. 나름 친하기도 했고 진하를 부른 타이밍도 완벽했다. 그런데 진하를 매우 정중하게 대하고 있으니 영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턱!
그때 서류 검토가 끝난 건지 송준하가 서류를 간단히 정리한 뒤 진하가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진하와 마주 보는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갑자기 부르셔서 당황하셨죠?”
“아닙니다.”
“부른 건 다름 아니라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이유요?”
“네.”
송준하의 대답에 진하는 송준하가 대상일 가능성을 한없이 떨궜다. 아무래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송준하는 이 시간 선에 존재하는 송준하인 듯싶었다.
“두 가지 이유가 뭔가요?”
대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진하는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송준하를 바라봤다. 대상이 아닌 이상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시간선이 달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본질이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문제는 없었다.
“뭐, 하나는 이기수 헌터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블랙 길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었는데 단순한 치료가 아닌 정밀 검사도 같이 이루어져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건의가 있었습니다.”
송준하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시간선의 이기수는 원래의 이기수보다 진하를 더 적극적으로 챙기는 이기수인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협회장한테 바로 보고를 할 리 없었다.
“음…… 아뇨. 전 멀쩡합니다. 괜한 말을 오가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찌 됐든 블랙 길드 전담 부서는 제 직할 직원입니다. 건의를 저한테 하는 것도 당연하고 다쳤다면 산재를 요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별말씀을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이유 말인데요.”
“예.”
“행동을 조금 조심히 하셔야 될 듯싶습니다.”
“네?”
갑작스런 말에 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행동을 조심하라니, 이 시간선의 진하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는 건가?
“알다시피 진하 씨는 B급입니다. 아시죠? 블랙 길드 전담부서는 90%가 A급 이상이란 거.”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진하 씨가 B급인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적기는 하지만 B급 헌터들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다만 문제는 진하 씨의 파트너가 이기수 씨라는 점입니다.”
그제서야 진하는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이것과 관련된 것은 예전에도 진하에게 똑같이 온 기억이 있었다.
“질투 말씀이시군요.”
“예, 맞습니다. 몇 없는 SS급 헌터인 이기수 씨입니다. 그를 보조할 헌터가 급이 높아도 모자랄 판에 B급이니 당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높은 등급인 헌터이기에 이기수 씨는 가장 위험한 장소 위주로 파견됩니다.”
“도움이 못 된다는 점을 짚으시는 거죠?”
진하의 말에 송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B급 헌터가 낮은 등급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SS급이다 보니 당연히 그가 도와줄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거기다가 이번에 다쳐서 돌아온 것으로 인해 협회에서 진하에 대한 평판은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도움이 못 되는 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기수 씨 혼자서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장 믿을 만하고 편한 당신이 파트너로 배정된 거기도 하고요.”
“알고 있습니다.”
“김진하 헌터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치가 위치다 보니 행동에 있어 조그마한 실수도 안 하게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갓 변한 협회 입장에선 자그마한 불씨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할 말은 이게 끝입니다. 혹시 하실 말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말이 끝났음을 안 진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송준하를 쳐다보았지만 역시나 그는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그럼 이만…….”
송준하에게 인사를 한 진하가 협회장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불안하냐…….”
아무래도 대상을 찾기 위해 협회를 꽤 많이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