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17화 (117/202)

#117

짐을 챙긴 진하는 곧장 훈련소를 나왔다. 그리고 자취방으로 가기 전 하예진의 부탁대로 정육점에 들려 고기를 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배달 주문이 들어온 게 있어서요.”

“아, 천천히 하세요.”

사장님이 뒤쪽에 있는 냉동 창고 쪽으로 사라지고,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던 진하는 가게 한쪽에 놓인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바라봤다.

[지금으로부터 약 12시간 전에 부패의 미로라 명명된 C―11922 던전 포탈이 열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미로를 공략하던 사족오 길드의 헌터 중에는 항암 그룹 일가인 한태성이 속한 것으로 알려져…….]

뉴스의 내용을 듣던 진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부패의 미로가 열린 시기였다.

‘하준수는 죽었겠지?’

하준수뿐만 아니라 재희, 휘센 등 진하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죽었다. 물론 이 시간선에 한해 죽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나도 만만치 않게 쓰레기네.’

바로 전 시험에서는 그 시간 선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게이트 보스를 죽였다. 그래놓고 이번 시험에서는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이 시간선의 사람들을 모조리 포기해 버렸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쓰레기였다. 제 주변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쓰레기.

‘뭐, 상관없어.’

그의 목적은 친구들을 구하는 거였다. 물론 이곳의 친구들 역시 가능하다면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구할 수 있는 한계가 있고, 그렇기에 이기적이라도 구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행동했다.

“주문하신 삼겹살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하는 사장이 넘긴 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가게 밖을 나갔다. 진하가 나가고 혼자 남은 사장은 TV에서 아직 보도 중인 길드 전멸 사태를 보며 혀를 찼다.

“어휴, 또 죽었구먼, 헌터도 할 게 못 된다니까…….”

* * *

“건배!”

쨍!

하예진이 치켜든 잔에 진하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러곤 입 안에 소주를 가볍게 털어 넣었다.

“크으…… 이 맛이라니까? 그치?”

“너 소주는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진하가 얼척 없는 표정으로 하예진을 바라봤다. 분명 그가 알기로는 하예진은 소주는 싫어했었다. 인생이 쓴데 술까지는 쓴 거는 싫다고 했었다. 그래서 마셔도 각성자 용 맥주나 다른 술을 마셨었다.

“좋아졌다랄까? 기억 중에는 모든 술을 좋아하는 주당인 나도 있었거든. 책상 위에 주르륵 펼쳐 놓고 음미하면서 마셨다니까?”

“주당이라…… 상상이 안 가네.”

잠시 탁자 위에 술을 종류별로 쌓아놓고 마시는 하예진을 상상해 봤다. 하지만 너무 이질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마시면 모를까 음미까지 하는 하예진은 생각만 해도 웃기기만 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했지만 진하가 보기에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신체가 뛰어난 각성자들도 취할 수 있게 만든 술이었다. 아무리 하예진의 등급이 높다 하더라도 아예 취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적당히 마셔.”

진하가 하예진의 잔을 빼앗았다. 하예진은 그런 진하의 행동에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진하는 그런 하예진의 행동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근데 왜 이러는 건데?”

처음 떼를 쓴 것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진하가 아는 하예진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기억이 많은 영향을 줬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기억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었으나 애초에 그 기억들이 지금의 자아 자체에 영향을 크게 줘서 사람을 변하게 할 정도였다면 진하에게 설득되는 방법을 말해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냥, 지금 아니면 언제 편하게 쉬겠어. 그래서 그런 것뿐이야.”

“하아…….”

하예진의 말에 진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진하가 시험을 통과하든 안 하든 세상은 멸망을 향해 나아갈 게 분명했고, 그걸 아는 사람들은 편하게 쉴 수 없게 된다. 알고 있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막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그래도 오늘은 이 정도만 마셔.”

“우…….”

“그런 표정을 지어도 안 되는 건 안 돼.”

더 이상 마시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몸을 괴롭히는 것일 뿐이었다. 아무리 많이 놀고 싶고 쉬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이 이상은 진하가 생각하기엔 그만해야 할 지점이었다.

“어차피 밥도 다 먹었고 이제 자자.”

진하가 비틀거리는 하예진을 부축했다. 확실히 몸을 비틀거리는 걸 보니 많이 취한 게 맞았다.

“후…… 치우는 건 내일 해야겠네.”

진하 역시 술을 많이 먹었기에 약간 알딸딸했었다. 대략적으로 무얼 할지 정한 진하가 하예진을 방으로 옮겨 침대에 눕힌 후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대충 냉장고에 넣어야 되는 것만 빠르게 집어넣고는 양치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 죽겠다.”

침대에 누운 진하는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몸이 피곤했다.

‘아니, 내 정신이 피곤한 건가?’

낮에 외면하고 있던 문제를 정통으로 봐버린 탓에 기분이 별로였다. 안 그래도 훈련하는 3주 내내 한쪽 마음 구석에만 담아두고 있던 죄책감이 낮에 죽어버린 하준수와 동료들을 봄으로써 터져버리고 말았다.

‘젠장, 잠이나 자자.’

이미 벌어진 일이고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지금 이곳은 진하가 있는 시간선이 아니기도 했다. 그러니 최대한 묻어두고 잠을 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다짐하고 진하는 눈을 감은 채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렇게 점점 머리를 비워갔다. 그리고 점차 머리가 비워지고 진하 또한 조금씩 잠이 들기 시작할 때쯤…….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소리로 인해 진하는 잠에 깨긴 했지만 딱히 움직이진 않았다. 밤에 하예진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경우는 가끔씩 있었으니까.

끼이익…….

그리고 다시 한번 들려오는 문소리. 이번에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가까이서 들린 소리였다.

‘내 방문?’

진하가 그런 의문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진하의 침대 위로 하예진이 누웠다. 서로가 같은 방향을 본 채 옆으로 누운 상황, 진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어 버렸다.

툭.

그때 진하의 등 위로 작은 온기가 닿았다. 하예진의 손, 진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안 자고 있지?”

작게 들리는 목소리, 아직 취기가 다 가신 건 아닌지 약간 혀가 꼬여있었다. 진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진하의 대답을 원했던 것은 아닌지 하예진은 곧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오늘 뉴스 봤어.”

약간 떨리는 목소리, 그제야 진하는 하예진이 무슨 뉴스를 봤고 왜 술을 많이 마셨는지 깨달았다.

“미안해…….”

하예진의 말에 진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에 괜찮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너무 걸렸고, 그렇다고 그녀를 탓하기엔 진하 역시 같은 선택을 한 거였으니까.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뭐가?”

약간 잠긴 목소리가 진하의 입을 통해 나왔다. 진하의 물음에 하예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가진 기억…… 모두 시험 당일 날이 끝이야.”

“…….”

“어떤 능력을 각성했든, 다른 던전을 공략했든 다 죽는 걸로 끝나. 심지어 일반인일 때도 같은 날짜에 죽었어.”

그녀의 말에 진하가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그동안 진하가 알고 싶었던, 그리고 묘하게 불안해 보였던 이유가 밝혀졌다.

“다른 미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선 지금이 축복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지막이더라…….”

“그래서 불안해?”

“응, 조금. 다른 나지만 어찌 됐든 나니까. 그리고 사실 불안한 것보단 무서웠어.”

“무…… 섭다고?”

“응……. 그거 알아? 너랑 나랑 시험 때 이후로 제대로 같이 있던 적 없단 거?”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제대로 같이 있던 적은 없었다. 같이 있을 만하면 사건이 터지거나 같이 있어도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

“네가 밖으로 나가면 당연히 바쁠 거야. 시간이 많고 아니고를 떠나서 넌 계속 뭔가를 준비할 테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따라가는 것도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하더라고.”

아무리 그녀가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이제 막 1년이 넘은 헌터였다. 경력이 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오로지 재능과 악으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진하를 따라갔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라붙었던 그녀는 어느 순간 조금씩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성장하는 진하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언제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에 대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달만 같이 있어 달라고 한 거야. 언제 못 따라가게 될지 모르니까. 멸망이란 게 정해졌다면 분명 너는 그걸 막으려고 움직일 거고 결국 떨어지게 될 텐데 그 이후에는 너랑 만나기 힘들 것 같았거든. 나 많이 이기적이지?”

“아니, 이기적이지 않아.”

오히려 진하의 배려가 부족했었다.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그녀라서, 또 그의 기억 속에선 항상 진하의 부족함을 메워주던 그녀라서 당연하게 따라오고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녀의 재능은 눈부셔서 빠르게 성장했고 지금까지 빠르게 잘 따라왔으니까.

‘내가 어리석었어.’

아무리 강단이 있어도 이제 겨우 헌터가 된 지 1년밖에 안 된 새내기였다. 그런 그녀가 수많은 목숨이 달린 사건과 주변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멘탈이 갈려 나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기에 진하는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 띵해지는 걸 느꼈다. 항상 가족이라고 말하고 아낀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런 부분은 터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내일 끝내자. 3주지만 확실히 즐거웠어. 충분히 만족했고 이기심도 다 채웠어. 그러니까…….”

“일주일 더 있어야지.”

진하가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하예진의 얼굴.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말대로 시간은 상관없다고 사서가 그랬어. 그리고 지난 3주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은 게 없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널널한 시간 덕에 충분하게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이것 확실히 그녀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남은 일주일은 나도 쉴 겸 그냥 편하게 놀자.”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어.”

진하는 그 말과 함께 하예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동안 참고 있었을 그녀에게 최대한의 미안함을 담아, 그리고 애정을 담아서…….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진하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계속 토닥여주었다. 그런 진하의 행동에 하예진은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지난 3주간의 시간 동안 오늘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하의 토닥임을 받아들였다. 오늘이 아니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한마디를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다. 그녀의 수명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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